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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Mar 15. 2018

쿠바를 훔치던 소리, 찰~ 칵

아바나 1




'아쉽다'

모자라서 안타깝다는 뜻이다.

모든 여행이 그랬지만 특히 아쉬움이 컸다.


가고 싶은 맘이 간절하던 쿠바는

멀다. 위험하다. 비싸다 등등,

생각해보면 뭐 그리 크게 어렵지도, 중요하지도 않은 이유로 무기한 다른 나라들에게 밀려나 있었다.

쿠바는 그런 곳이었다.


2016년 3월 21일, 버락 오바마가 쿠바 아바나 공항에 발을 디뎠다.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88년 만이었다.

“퀘 볼라, 쿠바(Que Bola, Cuba, 스페인어로 ‘잘 지냈어요, 쿠바’)”.

그의 첫인사 말이다.

 

Yes we came, 아바나의 헌 책방에 걸린 오바마와 롤링 스톤즈 캐리커처


그가 쿠바를 다녀가고 1년 후, 인천에서 멕시코시티까지 직항이 생긴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실 '언젠가~'라는 말은 불가능에 가까운 말이 아니던가.

언젠가~' 가 '지금'으로 바뀐 건 순간이었다.

생각이 미치면 곧바로 시작하는 사람, 그게 나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고 했던 버나드 쇼의  묘비 글에 백만 번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는 멕시코시티로 날아가 세 곳의 도시를 여행한 후 쿠바 섬으로 다.

유럽이나 미국, 캐나다에 가려면 열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야 한다.

복대를 차거나 백팩을 수시로 아기 안듯 앞으로 메고 다니며 소매치기를 피해야 했던 파리나 로마도 위험하긴 마찬가지다.

북유럽이나 스위스는 버거 하나에 15,000원쯤 하는 고물가를 자랑한다.

그러나 쿠바는 우려했던 것처럼 멀지도 위험하지도 비싸지도 않았다.

그동안 다녀온 수많은 나라들처럼 다름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하찮은 다름이 매력 있었다. 

세상과의 소통을 끊고 지낸 12일,

시간마저 단절된 섬 바를 카메라에 훔치던 소리를 쓰려고 한다.

 

숙소 발코니에서 보이는 모로 성


멕시코 시티와 과나후아토, 산 미겔 데 아옌데 등 멋진 곳을 지나온 터였다.

모로 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발코니의 의자에 앉아 바다를 가르는 바람을 바라보았다.

카리브해의 파도는 여인의 치맛자락처럼 부드럽게 또는 뺨을 때리듯 사납게  말레꽁(방파제)으로 날아들었다.

칸쿤으로 가는 크루즈가 고래의 낮잠처럼 무겁고 느리게 지나가기도 했다.


'비 한 줄기 내려도 좋겠어'


간절함까지는 아니었다.

이미 축축한 바람이 머리칼을 날리고 있었다.

지금도 좋지만 비가 내려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 순간 웰컴 드링크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극적인 순간에 행복은 강렬하게 전달되는 법,

우연히 내리는 비에 기분 좋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빗소리가 복잡하게 들릴 때가 있다.

그러나 카리브해에 떨어지는 비의 가닥가닥이 음표처럼 아름다웠다.

적우행(寂雨行)이 웃었다.

고요할 적(寂), 비 우(雨), 갈 행(行)은 글보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또 다른 나의 이름이다.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을 떠올리게 되는 레드 카,

앙증맞게 작고 하얀 꽃을 수놓은 핑크 카, 파랗거나 노란 올드 카들이 무채색 공기 속에 흘러갔다.

아바나는 매 순간, 어느 공간이든 모두 영화이다.

삶은 어차피 각각의 영화가 아닌가.

그러니 영화 같은 이라는 말은 안 하고 싶다.

비를 가르는 원색의 올드 카들을 볼 수 있는 공간에 내가 들어있는 현실감 하나만으로도 행복했다.


'쿠바,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



헤밍웨이와 체 게바라, 모히또와 시가, 살사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육감적인 쿠바나(Cubana·쿠바 여성)와 쿠바노(Cubano·쿠바 남성), 정열의 태양과 코발트 빛 푸른 바다….


고립 속에 갇혀 있는 중세 스페인 건축물,

빛바랜 거리를 누비는 올드카의 행렬 속에 쿠반(Cuban·쿠바 사람)들은 춤추듯 걷고 노래하듯 말한다.

아바나는 수많은 침략과 전쟁, 혁명의 역사 속에서도 고고함을 잃지 않았다.

미국이 쿠바와 국교를 단절한 1961년에게 '응답하라 쿠바'라고 외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여전히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고립과 결핍도 없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누구든 결핍을 갖고 있다.

쿠반들이 지금 그 모습, 그 방식 그대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세상 밖의 나라로 그냥 그대로 남아 있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을 했다.

행복을 배우러 그곳에 간 게 아니다.

그러나 쿠바는 내가 행복을 얼마나 몰랐던 사람인가를 알게 했다.



모네 그림을 연상시키는 구름이 비에하의 나른한 골목을 지키고 있다.(2018년 1월 23일 오후)

               

- He was an old man who fished alone in a skiff in the Gulf Stream and he had gone eighty-four days now without taking a fish.


- 그는 멕시코 만류에서 조그만 돛단배로 혼자 고기잡이를 하는 노인이었다. 84일 동안 그는 바다에 나가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문학동네)


<노인과 바다>의 첫 문장이다.

헤밍웨이는 <노인과 바다>로 노벨문학상(1954년)을 받은 후

“나는 이 상을 받은 최초의 쿠바 입양인이다. 그래서 행복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책을 아바나에서 집필했다는 이유로 노벨상으로 받은 황금 메달을 산티아고 레 코브레 성당에 기증했다.


헤밍웨이와 관련된 곳을 모두 찾아가 봐야지 생각했다.                                                                          

<노인과 바다>의 배경이 된 어촌, 코히마르로 가는 교통편을 알아두었던 터다.

그곳에는 코히마르 어부들이 못 쓰게 된 배들의 프로펠러를 모아 쇳물로 녹여 만들었다는 헤밍웨이의 흉상이 있고, 헤밍웨이가 살던 저택 '핑카바히아'에는 그가 사용하던 가재도구들을 그대로 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곳에서 145km만 가면 미국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이 짧은 거리 덕분에 쿠바 혁명 직후 미국으로  탈출하는 보트 피플들의 출항지가 바로 이곳 꼬히마르였다.

아바나에서 버스를 타면 30분이면 갈 수 있는 코히마르, 하지만 싶음이 현실과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아바나에 머물렀던 6일 동안 골목만 걸어 다녔다.

그래도 부족했다.

아바나는  딱히 어딜 가야겠다는 생각 없이 다녀도 좋은 곳이다.

 

헤밍웨이가 7년 간 기거하며 집필했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de Ambos Mundos)과 저녁마다 다이키리를 마시곤 했다는 술집은 갈 수 있겠지 했다.

오비스포 거리를 걸어가는데 범상치 않은 라이브 음악이 카페 안 쪽에서 흘러나왔다.

혹시 여기가? 하며 간판을 보니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라 플로리디따(La Floridita)'

어디에서도 신용 카드를 쓸 수 없는 나라, 인터넷이 안 되는 나라이다 보니 구글맵도 무용지물이다.

만일 '라 플로리디따'에 가려고 맘먹고 나섰다면 지도를 보며 몇몇 사람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 했을 터였다. 

게다가 쿠바 사람들은 영어로 소통한다는 게 거의 불가하므로 사정은 더 나쁘다.

그런데 우연히 발견한 그곳에서 간판 사진 하나 찍고 휘리릭 지나칠 수는 없었다.

한낮에 술을? 하는 망설임은 사치다.

일부러 찾아다니느라 시간 허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무조건 문을 밀고 들어선다.


라 플로리디따

문 옆으로 연주와 노래를 하는 악사들의 흥이 한참이다.

그리고 왼쪽 구석에 실물 크기의 헤밍웨이 동상이 떡 하니 앉아있다.

'어서 와' 하며 우리를 반기듯 환하게 웃는 모습이다.  

그야말로 달 디딜 틈이 없었다.


마라카스를 흔드는 여인이 메인 보컬로 바이얼린 연주도 수준급
헤밍웨이
'라 플로리디따(La Floridita)의 환생한 헤밍웨이?


그곳에서 가장 핫한 칵테일은 다이키리(Daiquiri), 

다이키리와 모히토를 주문했다.

쿠바 민요 ‘관타나메라(Guantanamera)’가 흥겹게 울려 퍼지고 있다.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 노래는 ‘관타나모의 시골 여인’이라는 뜻으로 쿠바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가 전래 민요에 시를 붙인 것이다. 

노란 렌즈의 안경과 꼬들꼬들한 라면발 닮은 머리카락, 가녀린 체구의 여성 보컬은 다른 사람의 몇 몫을 하고 있었다.

여인은 시종 마라카스를 흔들며 노래를 하거나 바이올린을 켰다.

무대도 없이 문간에 서서 연주를 할 뿐이었지만 바에 들어온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연주 수준, 카메라를 향해 웃어주는 센스, 열정적인 매너가 많은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묘한 힘을 갖고 있었다.  

의무가 아닌 스스로 음악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의 사진을 전해줄 수 있는 기회가 있길 바란다.


오감이 취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이키리의 깔끔함과 모히토의  청량함은 헤밍웨이의 간결한 문체와 닮은꼴이다. 

세계 각지에서 온 여행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느라 분주하다.

커튼 안 쪽은 식사를 할 수 있는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바깥쪽이 선술 집이라면 안 쪽은 격조 있는 레스토랑 분위기였다.

빨간 타이와 빨간 에이프런을 두른 모습이 슈트를 입은 듯 멋져 보이는 남자는 지배인일까?

넉넉한 체격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재고 손놀림은 노련했다.   

                                              

 플로리디따 총 지배인?
라 플로르디타의 안 쪽 레스토랑


다이키리(정확한 발음은 다이 큐리)는 쿠바의 도시인 상챠고 근교에 있는 광산의 이름에서 따온 것. 

19세기 말, 다이키리 광산에서 일하였던 미국인 기술자가 현지의 럼과 라임, 설탕을 섞어서 만든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화이트 럼  2/3 ,  라임 주스 1/3 , 설탕 2 tsp.
1. 화이트 럼과 라임 주스, 설탕을 셰이커에 넣고 흔든다.
2. 칵테일 잔에 따른다.
※ 라임은 가능하면 병에 들은 주스가 아닌, 생 것을 사용하기 바란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바나엔 헤밍웨이로 유명한 술집이 둘 있다.

‘엘 플로리디타’와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이다.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타’에서,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에서(My mojito in La Bodeguita, my daiquiri in El  Floridita)” 

'라 보데기타'벽에는 헤밍웨이가 썼다는 글씨가 걸려있다.

그런데 헤밍웨이는 '라 보데기타'에 간 적이 없었다는 내용이 신문에 실렸었다.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

1942년 올드 아바나. 마르티네스 부부는 한 잡화점을 사들인 다음 ‘카사 마르티네스’란 간판을 달고 술을 팔기 시작한다. 

이런저런 칵테일을 개발해 팔던 중 1950년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로 이름을 바꾸고 손님을 더 끌어들일 수가 없을까, 궁리를 한다. 

단골손님 중 하나가 끼어든다. 


“헤밍웨이 때문에 ‘엘 플로리디타’가 장사 잘되는 거 알고 있죠? 

그래서 말인데

‘나의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에서, 나의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타에서-헤밍웨이'라고 써서 벽에 붙여두면 어떨까요?”

 “그거 재밌겠는데!” 

그들은 우스개 삼아 사인까지 위조해 한쪽 벽에 붙인다. 


웃자고 한 짓이 다큐가 되고, 유명인을 소재로 글을 써대는 작자들은 엉터리 문장에 착안해 ‘헤밍웨이가 사랑한 모히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와 <노인과 바다>를 집필하면서도 마셨다’고 쓰곤 한다. 

당사자가 살아 있었다면 사실무근으로 판명이 났겠지만 헤밍웨이는 미국으로 돌아간 지 2년 만에 자살. 

핵전쟁이 터지네 마네 하는 판에 한낱 술집에 붙은 글씨를 파헤칠 기자가 있을 리는 만무. 

장난이었는지 작당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헤밍웨이-모히토-라 보데기타’로 이어지는 스리쿠션이 전 세계를 도는 사이 ‘모히토’는 세계적인 칵테일이 되고 ‘라 보데기타’는 각국에 분점까지 연다.  

진실이 밝혀진 건 2012년. 지금은 ‘라 보데기타’를 떠난 원래 주인 마르티네스가 양심선언을 한 것. 

그러나 분서갱유를 하려고 해도 석 달은 족히 탈 정도로 ‘헤밍웨이? 모히토? 라 보데기타’를 잇는 서적과 기사가 서점과 도서관에 쌓인 후였으니 오늘도 쿠바 여행자들은 다른 술집의 2배 값을 치르면서까지 ‘라 보데기타’에서 모히토를 마신다. 

'헤밍웨이처럼!'을 외치며. <2016 한겨레 신문>

                                                                           

“다이키리는 ‘엘 플로리디타’에서, 모히토는 ‘라 보데기타’에서” 헤밍웨이의 친필일까?

                                                 

모히토의 오리지널 베이스는 럼이다. 

럼은 사탕수수를 주원료로 하는 술로, 제당산업이 번창했던 카리브해의 서인도제도 및 바하마 제도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뱃사람들이 즐겨 마셨다고 하여 ‘해적의 술’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설탕을 정제하고 남은 당밀로 만들어서 가장 값싸고 서민적인 술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럼(골드) | 45ml
라임 주스 | 1/2개분
설탕 | 1 tsp.
민트 잎 | 4장

텀블러에 라임을 짜 넣고, 껍질도 안에 넣는다. 

민트 잎과 설탕을 넣고 설탕을 녹이면서 민트 잎을 으깬다. 

크래슈드 아이스로 채우고, 럼을 따라서 글라스 표면에 서리가 낄 때까지 충분히 젓는다. 

민트 잎으로 장식하고 빨대를 꽂는다.  [네이버 지식백과] 


민트 잎을 넣은 모히토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de Ambos Mundos) 역시 우연히 발견했다.

오비스포 거리를 걷는데 몇몇 사람들이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다가가 보니 헤밍웨이가 7년간 묵었다는 그 호텔이다. 

그 후로도 아바나에 머무는 동안 오다가다 몇 번 지나가곤 했다. 

1932년부터 1939년까지 그 호텔 511호에 머물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집필했다. 

그동안 호텔 객실과 로비 등이 리모델링을 했지만 그가 머물렀던 방과 엘리베이터는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Hotel Ambos Mundos
헤밍웨이가 암보스 문도스 호텔 501호에서 집필하던 타이프 라이터


낚시광인 헤밍웨이는 1928년 낚시 여행으로 처음 쿠바 땅을 밟았다. 

이후 추방되던 1961년까지(여행을 위해 떠났던 시간을 빼고)  늘 쿠바에 있었다. 

소설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고부터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쿠바에서 보낸 셈이다. 

쿠바 최고의 수출품은 체(Che) 게바라와 헤밍웨이다. 

사르트르로는 체를 일컬어 ‘20세기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20세기 인물들 중에서 사진이 가장 많이 복제된 인물이 됐다. 살아서는 쿠바의 혁명을 이끌었고, 죽어서는 쿠바를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살아서는 쿠바에 매료되어 쿠바에서 남은 생을 보내기로 했지만, ‘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30여 년 간 정들었던 쿠바에서 쫓겨난 남자 헤밍웨이다. 

재미있는 건 두 사람 모두 쿠바 태생이 아니라는 점이다.



떠날 수 있는 결단, 머무르는 시간에 대한 사랑과 돌아올 수 있는 용기.

그 세 가지만 있다면 언제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곳, 쿠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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