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릭 사티, 벡사시옹
고흐처럼 압생트를 즐겨 마시던 그는 간경화로 죽을 때까지 평생 ‘무슈 포브르’(가난뱅이 씨)로 불렸다. 화가였던 친구 위트릴로의 어머니, 쉬잔 발라동과 단 한 번의 연애(6개월)를 끝으로 독신이었다. 하루에도 서너 차례 옷을 갈아입는 앙드레 김은 흰옷만 고집하지만 그는 늘 회색 벨벳 양복을 입고 다녔다. 하지만 12벌의 양복 중 여섯 벌은 끝내 입어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우산이 젖는 게 아까워 장대비가 내리는데도 태연히 비를 맞으며 걸어 다니던 그의 방에서 사후 수십 개의 우산이 발견되었듯 참으로 기이한 사람이었다. <관료적인 소나티네>, <차가운 소곡집>, <엉성한 진짜 변주곡-개를 위하여>, <말의 옷차림으로>, <바싹 마른 태아>, <배 모양을 한 세 개의 곡>, <지나가버린 한 때>, <기분 나쁜 자의 왈츠>, <스포츠와 기분 전환>, <별난 미녀>등 유별난 표제와 함께 연주자들에게 요구하는 주석 또한 <혀끝으로>, <잠시 홀로 되기>, <마음을 열라>등 묘하기 짝이 없다. 이쯤이면 그가 맥락 없는 얼치기 음악가가 아님을 짐작할 수 있지 않나 싶다. 커피 속에 풀어지는 크림처럼, 봄날 아지랑이와 신기루 같은 몽롱함, 아침 이슬처럼 투명하여 온 몸이 화선지가 되어 스며들 것 같아 영화음악으로도 자주 쓰이는 3개의 짐노페디와 6개의 그로시엔느로 유명한 그는 바로 프랑스의 에릭 사티(1866-1925)다.
에릭 사티가 만든 음악 중 ‘벡사시옹’(괴롭힘이라는 뜻)의 악보는 단 한 페이진데 흔히 ‘짜증’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 악보의 맨 마지막에 840번 반복하라는 지시가 되어있기 때문이다. ‘지루함은 신비하면서도 매우 심오한 것이다’라는 말을 남긴 사티는 미니멀리즘 음악의 대표 작곡가이다. 그의 지시대로 메트로놈에 맞춰 연주하면 13시간 40분이 걸린다. 반복 없이 단일 곡으로 연주 시간이 가장 긴 음악은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다. 나흘 동안 약 16시간 연주를 해야 되지만 네 가지의 이야기로 구분되어있는 음악극으로 같은 멜로디를 840번 반복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서 4분 33초 동안 앉아만 있다가 퇴장하는 곡인 우연성 음악 4분 33초를 작곡했던 존 케이지가 네 명의 동료들과 함께 초연했다.
그 악보를 입수한 건 사티가 죽은 지 24년 후였는데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은 케이지가 그로부터 15년이 지나서야 연주를 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선 서울대학교 학생식당에서 40명의 음대생이 초연했고 일본에선 왕복 10시간을 달리는 야간 기차에서 연주했다. 500번 이상 연주하면 환각 증세가 오면서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는 이 곡을 꽤 이름이 난 피아니스트 세 명이 연주회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로그램에 연주 곡명이나 연주 시간은 명시하지 않았다. 잘못했다간 청중이 하나도 없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워낙 명성이 높은 피아니스트들의 연주회였기 때문에 청중들은 만석이었다. 이윽고 연주가 시작되었다. 약 30분이 지나자 머리 긁는 사람, 코 후비는 사람, 팔짱 끼는 사람, 조는 사람, 하품하는 사람 등 인간이 지루할 때 나타나는 갖가지 양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2시간이 지나자 사회자와 다른 연주자가 무대로 나왔다. 드디어 끝났구나 하며 박수를 치려는데 사회자가 말했다. ‘휴식 시간 없이 연주자만 교체됩니다’ 이에 인내심에 한계를 느낀 청중들이 하나 둘 자리를 뜨고 이미 객석은 반 이상 비었다. 남아있는 사람도 꾸벅꾸벅 조는 게 대부분이었고 나중에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는 몇 사람과 비평가, 지인들만이 눈을 부릅뜨고 자리를 지켰다. 드디어 장마 같이 지루한 연주가 끝나는 마지막 음을 누르고 피아니스트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세 명의 연주자들이 모두 나와 인사를 하자 남아있던 사람들이 결국 끝까지 버텼다는 자신들의 인내심에 우레와 같은 박수를 쳤다. 이에 잠이 들어 미쳐 나가지 않았던 뚱뚱보 청중 한 사람이 얼떨결에 일어나 박수를 쳤다. 그리고는 힘차게 외쳤다. 앙코~~ 르! 앙코~~ 르! 순간 자신과 싸워 이겨낸 사람들이 맛보던 감동의 희열은 경악으로 변해버렸다.
사티 악보엔 종종 마디 줄이 없다. 벡사시옹도, 그로시엔느도 선율의 흐름이 규칙적인 마디의 테두리에 익숙하지 않음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가 개념적으로 사용한 건 거실에 있는 안락의자처럼 연주자의 기분 여하에 의해 취할 수도, 말 수도 있는 가구 음악 같은 것이다. 제목에 비해 지극히 투명하고 들리는 듯 들리지 않는 음악인 것이다. 새 해는 결코 큰 소리로 외치지 않지만 강한 울림이 있는 그의 음악처럼 살아보는 것도 좋겠다는 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