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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8. 2016

음악은 햇빛이요, 공기며 물이다

쿠르트 마주어 & 사라 장,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뚜벅뚜벅 

밤새 어디로 저렇게 걸어가는 걸까요? 

시계 추 말입니다. 

창밖을 보니 밤에서 새벽으로 넘어가는 도둑이 보여요. 

안개 기둥입니다. 

오늘 낮도 그들이 뿌려 놓은 햇살 가루가 명랑하겠지요.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 일부입니다.

무엇을 해도 좋을 계절이지요.

그렇다면 ‘좋다’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대상의 성질이나 내용 따위가 훌륭하여 만족할 만하다”

하지만 ‘좋다’ 그 이상의 단어가 필요한 하루였습니다.     

도로는 새벽안개가 뿌려놓은 투명한 햇살로 가득했습니다.

드문드문 물든 나뭇잎은 강한 햇살에 조금은 빛깔을 빼앗겼지요.

기다린 만큼 마음이 급하여 연주 시작 시각보다 2시간 일찍 도착했습니다.

주차를 하곤 한국 현대 미술 초대전 passions을 관람했어요.

의례히 여유 있는 도착을 하면 미술관을 들리게 되거든요.

최만린과 전수천 씨의 작품이 인상적이었답니다.     

티켓을 찾고, 오페라 하우스 지하에 있는 Up Town Dinner 에 들어갔습니다.

클래식하며 모던한 세련미가 돋보이는 곳이더군요.

창가 자리에 앉아 책을 보는데 낯익은 얼굴이 지나갑니다.

사라 장이었죠.

마가렛 같은 표정으로 그녀의 愛器인 과르네리 델 제수를 들고 말이죠.

이어 백발의 흰 수염이 트레이드인 노장 쿠르트 마주어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지나가더군요. 가까이서 그들을 볼 수 있는 것도 행운이라 느껴지더이다.

아트 센터답게 메뉴 이름도 흥미롭게 앙상블, 콘서트, 콘체르토...

디저트 접시엔 갖가지 색의 시럽으로 오선지와 높은 음자리표를 그려놓은 것이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뻤어요.     




드디어 런던 필과 만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첫 곡은 베토벤의 ‘프로메테우스의 창조물’ 서곡이 시작되었습니다.

78세의 노장 쿠르트 마주어는 바통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발끝부터 손끝까지 온몸을 바통으로 지휘하더군요.

어느 석학이, 어느 과학자가 78세에 그렇듯 신비한 힘과 녹슬지 않은 머리로 분출할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지랴? 하는 의문을 갖게 했습니다.

제우스의 뜻을 어겨 불복종의 대가로 카우 소스 산의 바위에 쇠사슬에 묶여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는 형벌을 받게 되는 프로메테우스의 영웅적인 저항의 찬미하는 작품이지요. 

따뜻한 기운을 머금은 오보에와 호른의 명상적인 호흡이 전개되며 서곡을 연주했습니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적절함이었죠.     

영산홍 드레스에 검은 나비 한 마리 앉은 듯한 부채 모양 주름이 잡힌 드레스를 입은 사라가 무대에 나왔습니다.

얼마나 환히 웃던지 박수가 아니었다면 ‘까르륵’ 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지요.

스물다섯의 청춘이 어찌나 빛나고 예뻤는지 모른답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읽었던 것처럼 무대에서 연주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하다는 그 당당함이 여실히 느껴졌어요.

긴장이나 불안한 옷은 어디에도 걸쳐져 있지 않더군요.     



  그녀가 선택한 곡은 쇼스타코비치 바이올린 협주곡 1번 op.99    

오늘을 위해 그동안 들으며 제 귀를 훈련시켰던 연주는 다비드 오히스트라흐의 음반이었습니다. 이 곡을 초연했던 사람도 바로 오히스트라흐 죠.

‘쇼스타코비치’ 결코 쉽지 않은 구조의 음악입니다. 그게 수직적인 화음이건 수평적인 리듬이건 간에 말이에요.

매우 음울하고 침체된 선율이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아!

그건 음반에서 듣던 거완 확연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죠.

오히스트라흐가 살아 돌아와 사라의 연주를 듣는다면? 

사람의 한계는 어디까지일까?...

알 수 없는 의문이 끝없이 꼬리를 물더군요.

2악장 중반엔 쇼스타코비치 첼로 협주곡 1번 1악장과 비슷한 리듬과 화성이 나옵니다.

글을 쓰는 작가에게 특별한 視覺이 있듯이 화가에겐 각자의 畵風이 있는 법이죠.

작곡가 역시 그렇습니다.

모차르트, 바흐, 비발디, 베토벤, 슈베르트, 차이코프스키가 그러하듯이 쇼스타코비치도 예외는 아니지요.

허리를 활대처럼 휘돌리며 뿜어내는 음색은 폭풍이고 신 들림이었습니다.

3악장 카덴짜부터 4악장 마지막 한 음까지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았지요.

이럴 때 기가 막히다는 표현을 써야 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 2번째 열에 앉은 덕에 독주 악기의 소리는 너무나 명징하게 들려왔지요.

귀로 잡아낼 수 없을 만큼의 하이 포지션까지 깔끔합니다.

매 악장 몇 줄씩 끊어지는 활모는 그녀의 광풍을 짐작케 하였습니다.

그런데 음반으론 왜 그리 힘들게 들렸는지 정말 모를 일입니다.

느림-빠름-느림-빠름의 4악장이 끝이 났어요. 

살아있다는 생각을 잊고 있었나 봅니다.

박수를 치기 시작한 건 잠시 후였으니까요.        

아쉬울 것도, 아까울 것도 없는 연주였습니다.


20일 전 한국 바이올린의 대모라고 할 수 있는 정경화의 연주를 들었지요.

러시아의 키로프 오케스트라와 발레리 게르기예프의 지휘와 함께 말입니다.

이제 정경화는 듬직한 대녀 사라가 있음에 참으로 행복하리라는 생각입니다.     



세 가지의 빨간색이 트레이드로 유명한 런, 

빨간 공중전화박스, 빨간 우체통, 빨간 2층 버스

그 모두를 하나의 프레임에 들어가게 구도를 잡고 사진을 찍었던 그 런던 거리가 생각납니다.

이제 쿠르트 마주어와 런던필입니다.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게르기에프와 키로프 오케스트라로 6번을 들었는데 오늘 런던필은 4번입니다.

물론 6개 심포니 중 저는 단연 4,5,6을 꼽습니다.

좋아하는 순서를 매기라고 해도 역시 4,5,6이죠.

인생의 전환기? 아님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 해에 만들어진 4번,

그 때문인지 감정의 기복이 매우 광폭한 곡입니다.

‘운명’과 같은 주제 리듬이 호른과 바순이 격렬하게 울립니다

그러나 화음은 베토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절망감을 가져다줘요.

무릇 연주가 건강하다는 느낌입니다.

어느 한 부분이 비만하거나 왜소하지 않았지요.

현과 목관, 금관과 퍼커션의 코디네이션이 참으로 적절하였습니다.

왜 베를린 필이고 빈 필이며, 뉴욕 필, 런던 필인지 알 것 같은 순간순간이 다가왔어요.

소리가 감정을 그려냅니다.

보이지도 않는 오롯 소리일 뿐인데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경험이지요.


과거는 얇을수록 좋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이코프스키가 그랬거든요.

그는 결코, 시종 어둡고 우울하지만은 않아요.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함께 데리고 다니는 선율이죠.

그래서 더욱 좋습니다.

이 가을에 듣기가 말이죠.

3악장은 올 피치카토, 

하지만 피치카토 폴카 같은 느낌은 아닙니다.

슬라브 무곡풍인 선율이 어김없이 나오는데 참으로 몽환적이에요.

단원 모두는 아예 활을 무릎에 모두 내려놓았습니다.

현을 튕기는 모습은 춤사위 같지만 생김새 다르듯 모두 다릅니다.

크레셴도와 디크레센도를 오가는 음량이 마치 파도의 이불자락 같아요.

명랑 쾌활한 시냇가 같기도 하고요.

피날레입니다.

6번 비창은 3악장이 피날레 같지만 4번은 4악장이 피날레답습니다.

질풍노도 같은 합주가 러시아 민요 ‘들에 서 있는 자작나무’의 나른한 주제 선율과 교대를 합니다. 론도니까요.

런던 필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것 같아요.

시끌벅적하던 동네가 순식간 절간 같이 변하고 수다쟁이 아주머니가 잠자는 아기로 변하니까요. 물론 거긴 노장의 마에스트로가 있었지요.

브라스의 짱짱함, 깐깐함이 무기인 오보에의 소프트한 힘, 거기다 듬직한 바순과 순한 클라리넷, 그들을 적절하게 반죽하는 노련한 손놀림, 몸놀림으로 수십 개의 바퀴를 굴려가는 지휘자 쿠르트 마주어.

온몸과 손가락 끝, 그리고 눈빛과 표정에서 나오는 전율은 LPO를 아우르기에 충분했습니다. 


London Symphony 'Eye of the Tiger'


저는 완벽한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잘 어울리는 걸 좋아하지요.

오늘 그들이 그랬습니다.

화려한 듯 소박하게, 세련된 듯 고풍스럽게, 무거운 듯 발랄하게...

건강한 몸에 품위 있는 盛裝을 한, 게다가 적절한 지식까지 겸비한 사람처럼 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날, 쿠르트 마주어의 부음을 듣게 되겠지요.

그럼 전 오늘의 그를 불러드릴 겁니다.

다시 차이코프스키의 심포니 4번을 연주하고, 그렇게 그를 내 마음속에 부활시키기로 약속했습니다.

마흔다섯 번째 맞는 가을입니다.


오늘 또 행복했어요.

도로를 휘감는 안개와 서리를 헤치며 달리는 차 안엔 슈베르트가 가득합니다.

내일은 나무들이 조금 또 다른 옷으로 갈아입을 테지요.

그다음 내일 또한 다를 테고요.

그렇게 우리 사람도 나무 따라 변합니다.

하나 비발디에서 쇼스타코비치까지

음악은 그러지 않을 걸 압니다.

제가 음악은 햇빛이요, 공기며 물이라고 정의했으니까요.    

(2005년 10월 19일 성남 아트센터, 11년 전, 썼던 글이네요.)


* 독일이 낳은 위대한 지휘자이며  통독 당시 동독정부의 무력진압을 막아 독일 통일에도 기여했던 쿠르트 마주어가 2015년 12월 19일(현지시간) 미국 코네티컷주 그리니치의 한 병원에서 파킨슨씨 병 후유증으로 숨을 거두었다고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발표했다. 

쿠르트 마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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