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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8. 2016

늦어도 11월에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지휘 이반 피셔,   피아노 김선욱




  11월입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달이죠. 그리스계 기타리스트 Chris Speeris의 Carino나 두모악 갤러리 바닥의 돌무더기에서 흘러나오던 인디언 로드의 바람 숭숭 듣는  음악이 제격인 계절이죠. 붉음으로 향하는 담쟁이덩굴이 돌담을 스카프처럼 감아 오르는 모습을 따라가니 파란 하늘이 눈에 가득 들어왔습니다.  


Chris Speeris의 Carino


  티켓 박스 오픈과 동시에 예매를 하면서부터 이반 피셔가 이끄는 부다페스트를 기다려왔습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이 크진 않을까 하는 생각은 애초부터 접어두었죠. 오케스트라 단원의 배치는 늘 같아야 할 건 아닙니다. 하지만 낯선 배치의 새로운 시도에서 ‘모험이다’ 보단 ‘참신하다’ 쪽에 수를 두었죠. 지휘자가 그리는 소리의 색깔이 저 안에 있을 거란 믿음이랄까요? 짐작대로 음악은 성공적이었습니다. 지휘자 코앞엔 오보에와 플륫이, 중앙의 뒤편엔 첼로와 더블 베이스가 자리하고, 대각선으론 좌청룡 우백호처럼 호른과 트럼펫이 자리했습니다. 그들이 내는 소리는 스테인드 글라스를 통과한 빛의 영롱함과 퀼트 조각보의 정교한 따스함이 배어있었죠. 지휘자 이반 피셔의 인상은 웃는 돌처럼 단단하나 부드러웠습니다.

  김선욱과의 만남, 네 번째입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4번과 라흐마니노프의 파가니니 주제에 의한 광시곡,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 그리고 쇼팽 협주곡 1번까지 그가 흔드는 다색의 깃발은 어디까지 일까요? 그날 다른 날과는 달리 분명히 느낀 게 있었습니다. 김선욱이 피아노를 치며 지휘를 함께 할 날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것, 즉 지휘봉은 잡지 않았지만 피아노를 치고 있는 김선욱의 영혼은 이미 오케스트라에 취하거나 녹아있음이 느껴졌죠. 그러면서도 한 몸처럼 손발이 맞는 오케스트라와 피아노에 만족한 이반 피셔의 얼굴은 시종 흐뭇한 미소가 떠나질 않았습니다. 리허설 몇 번에 어떻게 저런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죠. 마치 오랜 세월 이웃사촌으로 지내서 그 집 숟가락 수까지 꿰고 있는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악보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입니다. 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죠. 세상의 모든 음악은 각기 다른 악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모두는 단 하나뿐인 그림이기도 하고요. 김선욱의 피아노는 아름다운 수학에 깊이 빠져 생각하는 중이었습니다. 부분적인 테누토로 잇는 2악장 리듬 간의 간결미, 그리고 음악 분수가 보여주는 화합과 대칭처럼 쇼팽의 피아노 협주곡은 살아 있었습니다. 간혹 쇼팽의 협주곡은 오케스트레이션이 너무 단조롭고 건조하여 피아노가 돋보일 수밖에 없다는 평을 하지만 그들의 연주에선 전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다만 눈과 귀만 열어 놓고 앉아있는 게 고맙고 미안하단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죠. 


  

  두 번째 곡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4번은 5번과 6번보다 실연을 더 많이 접했습니다. 그건 제가 좋아하는 곡이라는 말과 같음이겠죠. 몇 해 전 베스트셀러였던 정민 교수의  <미쳐야 미친다> 즉 “不狂不及”이란 책이 떠올랐습니다. 차이코프스키, 그 천재의 광기에 행복한 공감을 하거든요. 어떤 음도 마다하지 않고 잘 찾아가는 현악기들의 핑거링이 자아내는 크고 작은 음악의 길, 든든한 할아버지의 너털웃음 같은 바순이 솔로로 나오는 부분의 푸근함, 3악장 피치카토의 풍성한 사운드는 그 어떤 연주에서도 들을 수 없었던 해석이었습니다. 이반 피셔의 지휘에서 지느러미의 살랑거림을 보았고 출군을 명하는 장수의 단호함도 느꼈습니다. 서두르지 않으나 결코 쳐지거나 흔들림 없는 비팅에 부다페스트의 건강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일체의 연주를 보여주었지요. 4악장까지 의자를 지키던 퍼커션 세 사람이 마침내 일어섰습니다. 심벌즈와 베이스 드럼만이 큰 소리를 내는 건 아닙니다. 트라이앵글 그 작은 삼각 스틸에서 나는 소리는 그 어떤 허리케인 사운드도 잠재울 수 있는 힘이 있었죠. 나무와 쇠가 빚어내는 소리의 색깔은 그 어느 물감으로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음악을 언어로 푼다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기막힌 연주회라 하더라도 끝나기 마련이죠. 그날도 두 시간 동안 꾸었던 음악의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 어김없이 찾아오더군요. 그리곤 잊히죠. 그러므로 음악의 감흥을 문자라는 매체로 남기려는 노력을 할 뿐입니다. 



  다한 것 같으나 아직 남은 무엇이 있는 11월의 코끝 알싸한 싸늘함을 사랑합니다. 한 소설가가 출판기념회에서 만난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죠. "당신과 함께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스 에리히 노삭의 소설 ‘늦어도 11월에는’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책 제목이 의미하는 바는 쓰고 있던 작품을 그때까지는 꼭 끝낸다는 말이었죠. 그래요. 마지막인 듯한 12월보단 한결 여유가 있어 좋은 11월입니다. 12월처럼 뼛속까지 찬 바람이 숭숭 파고들진 않아 좋은 11월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마무리 지어야 하나 짚어보며 마디게 보내야 할 11월입니다. 한껏 성장을 하고 음악회에 가는 건 어떨까요?   (2007년 10월 9일 서울 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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