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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4. 2016

郞朗風(랑랑풍) 피아노

랑랑 피아노 리사이틀






  며칠 전 지인에게 보낸 편지 말미에 ‘多言數窮 不如守中, 즉 말이 많으면 궁해져 가슴 깊이 묻어두는 것만 못하니, 떨어지는 은행잎 같은 말 이만 접겠습니다.’ 했지요. 하지만 전 오늘만큼은 많은 말을 하고 싶습니다. “郞朗”(사내랑, 밝을랑), 이름만큼 밝고 활기찬 청년을 만났거든요. 랑랑을 공연장에서 처음 만난 건 3년 전 시카고에서였습니다.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로 시카고 심포니와 버르토크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지요. 그가 무대로 등장하자 청중들은 박수보다 더 큰 환호성을 내질렀죠. 그가 피아노 앞에 앉기도 전인데 말입니다.  



  첫 곡, 맑은 화음과 간결한 멜로디를 가진 모차르트 소나타 10번, 1악장을 듣는 순간 아~, 깜짝 놀랐습니다. 밋밋함은 없었죠. 소리가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기도 하고 퐁당퐁당 뛰어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모차르트와 랑랑은 닮아 있었습니다. 과하다 싶을 정도의 심한 강약과 섬세한 페달링은 퓨전 또는 일종의 환상곡이라 해도 좋을 듯이요. '내게 있어 죽음은 곧 모차르트를 못 듣는 일이다' 말했던 아인슈타인이 랑랑의 연주를 들었다면 그 말은 바뀌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쉽게 풀 수 없는 숙제 중의 하나가 피아노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피아노 이상의 그 무엇을 만들고 있더군요. 가장 단시간에 아주 화려한 이력을 가지게 된 그는 작곡가가 만들어 놓은 뼈대를 스스로 각색했습니다. 그건 마치 “어망에 끼었던 파도도 빠져나오고 수문에 갇혔던 바다도 빠져나오고 갈매기가 물어갔던 바다도 빠져나오고 하루살이 하루 산 몫의 바다도 빠져나와 한자리에 모인 살결이 희다… ”의 이생진 풍, 그리운 바다 성산포처럼 랑랑풍 피아노란 말을 떠올리게 되었지요. 



  두 번째 곡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 그러나 빛의 곡선 속에 조르쥬 상드와 피아노에서 길을 잃는 쇼팽 소나타 3번이 주인공이었습니다. 흑백의 피아노 건반에선 세상의 모든 빛깔이 화수분처럼 쏟아져 나왔고 그 소리와 함께라면 무덤까지라도 갈 수 있을 듯했습니다. 우치다 미츠코와 예프게니 키신의 연주로 랑랑을 예습했지만 너무나 다르게 들리는 건 역시 그의 독특한 해석에 의한 자유로운 연주 방법 때문이었죠. 


  슈만의 어린이의 정경 13곡은 각각의 특색을 확실한 다른 빛깔로 정과 동을 표현했습니다. 호로비츠의 트로이메라이 연주를 들으며 눈물을 글썽이던 러시아의 중년 아저씨 얼굴이 오버랩되면서 저 역시 눈물이 맺히더군요. 마지막 곡, 시인의 이야기에서 랑랑은 오래도록 건반에서 손을 떼지 못하여 격해진 관객의 감정을 잠시 진정시키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두 개의 라흐마니노프 프렐류드는 부드러운 뼈를 느낄 수 있었는데 일체의 수식어가 필요 없는 강한 타건은 타악기를 두드리는 것 같았고 무아지경의 표정과 리드미컬한 율동이 혼연일체로 다가왔죠. 손가락에도 속도계를 붙여야 할 듯 과속이 느껴졌습니다. 완벽한 건 흔치 않습니다. 그러나 연주는 완벽했지요. 리스트 곡 세 개의 페트로르카의 소네트는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연주에 갇힐 뿐이었습니다. 마지막 헝가리안 랩소디 2번은 호로비츠의 편곡 본이었는데 연주는 현대음악으로 리메이크한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신묘하기까지 한 테크닉이 연속적으로 펼쳐졌지만 그건 분명 랑랑화 한 것임이 명백했죠. 


  음악은 드라마 같다던 바그너의 말에 동의하기에 한 가지 색을 추구하지 않고 게임을 하듯 다양한 색과 분위기를 즐긴다는 그는 청중들을 귀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첫 번째 앙코르곡 슈만의 ‘헌정’은 기립박수와 괴성에 가까운 환호를 보내며 흥분된 청중을 진정시키기에 좋은 선택이었습니다. 청중들은 랑랑에게, 그리고 랑랑은 두 시간 동안 그의 놀이터며 장난감이 되었던 피아노에게 공을 돌린다는 듯 박수를 쳐주었죠. 여전히 환호성이 줄어들지 않았는데 갑자기 벌 한 마리가 무대 위를 날기 시작했습니다. 두 번째 앙코르곡, 림스키 코르샤코프의 ‘왕벌의 비행’ 이었죠. 그 또한 그의 편곡인 듯 판이했습니다. 

2 Cellos & Lang Lang, Live and Let Die


  사인을 받기 위한 사람들이 몇 백 미터나 줄을 선 콘서트홀 로비를 나왔습니다. 랑랑풍의 음악에 너무 진하게 취해선지 맥이 빠지더군요. 갈 데 없는 사람처럼 예당 벤치에 앉았지요. 붉은 이파리의 감나무는 까만 도화지 같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서 있고 음악분수 조차 시네마 파라디소를 랑랑 랑랑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2008.12.22 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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