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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3. 2016

말러 9번 교향곡, 침묵의 5악장

서울 시향, 정명훈






  믿음이란 얼마나 든든한 재산인가요? 누굴 만나는 일이 늘 즐겁고 행복한 건 그 믿음에서 기인한 일일 거라 생각합니다. 정명훈, 그를 만나는 일이 그렇습니다. 브람스나 베토벤, 이번처럼 모차르트나 말러라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익숙한 곡이면 익숙한 대로 생소하고 어려우면 그 나름대로 몰입할 수 있는 게 음악회의 강점입니다.



  김선욱과 손열음을 키워낸 김대진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연주했습니다. ‘청출어람’이란 말을 듣는다는 것은 결코 기분이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의 연주는 결코 제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호연이었죠. 30여 년 전, 처음으로 미국에 다녀오시던 아버지께서 제게 사다주신 LP 두장 중 한 장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이었습니다. 그리고 CD가 처음 발매되던 시점에서 역시 미국여행에서 사다주신 CD가 공교롭게도 같은 연주자의 같은 곡이었죠. 그래서 더 각별한 애정이 담긴 곡이기도 합니다. 특히 2악장은 단순하지만 아름다운 선율이 특히 맘에 들어 피아노를 치기도 했구요. 하지만 악보대로 건반을 짚어나갈 뿐 아름다운 느낌을 싣지 못한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아다지오라는 빠르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같은 곡이라도 연주자에 따라 그 빠르기는 모두 다르죠. 하지만 김대진이 연주하는 23번의 2악장 아다지오는 제가 생각하는 느림과 같았습니다. 모차르트의 화음과 리듬은 단조롭기 때문에 표현하기 더욱 힘들다고 합니다. 얼마 전 펜화기행이란 책을 보았습니다. 펜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작품집인데 한 작품에 50만 번 이상 펜을 사용한다고 하더군요. 여러 색을 써야만 좋은 그림이 완성되는 건 아닌 것처럼 김대진은 모차르트를 단순한 아름다움으로 풀어냈습니다. 슬퍼도 눈물이 나고 기뻐도 눈물이 납니다. 그러나 아름다움에 취해 흘리는 눈물이니 만큼 행복했습니다.


  좋은 연주만큼 중요한 건 청중들의 태도입니다. 많은 음악회를 다녔지만 그날의 청중들은 잊을 수 없을 듯합니다. 4악장까지 있는 말러의 9번 교향곡에 침묵의 5악장을 덧쓰고 있었으니까요. 기분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마지막 비트가 끝나고 지휘봉은 수십 초 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오금이 저린다고 할까요? 온 몸의 긴장이 팽배할 대로 늘어난 그 시간이 참으로 초조했습니다. 혹시나 지휘봉이 내려오기 전에 박수가 터져 나오면 어쩌나, 90여분의 공든 탑이 무너지면 어쩌나, 숨도 쉴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긴 시간이 지나고 정명훈의 지휘봉은 내려왔지만 청중들은 침묵하고 기다렸습니다. 누구도 선뜻 박수를 치지 못했죠. 마치 침묵의 5악장이 새로 생겨난 것처럼 말입니다.

Mahler Symphony no.5 1st 서울시향, 정명훈


  삶의 테두리는 해본 것 보다 해보지 못한 게 더 많은 법입니다. 그 자리에 있던 2천여 명의 청중들은 정명훈을 통해 말러의 환영을 만난 거라 믿고 싶습니다. 치밀하고 정교한 3악장의 다이내믹한 질주는 과한 음량과 대편성의 연주임에도 불구하고 뭉개지지 않았습니다. 4악장은 저음의 지속에 활들이 눕는 횟수가 많았지만 박하사탕의 화한 느낌을 가져다주었죠. 한 겨울 노천탕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하늘에 총총 뜬 별들을 바라보는 코끝의 시원한 느낌이었습니다. 말러를 우리 연주자들의 힘으로 그만하게 그린다는 건 참으로 경이로웠습니다. 더 이상은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지요. 말러의 교향곡은 어느 파트도 여유롭지 않습니다. 이를테면 2:3:7비율의 리듬이나 명명할 수 없는 색채의 음감, 때때로 더 이상 뽑아낼 수 없을 정도의 가느다란 실이 되어 하늘로 올라가듯 포르테로 뿜어지는 유니슨의 힘들은 그의 음악에서만 경험할 수 있음입니다.




  1시간 30분은 영화 한 편의 상영시간과 비슷합니다. 중편소설 한 권 읽는 시간이기도 하구요. 그 기나긴 시간 속에서 연주자와 청중들은 청각과 시각을 통한 오감의 교감을 주고받았지요. 참으로 아름다운 만남이었고 기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교향곡 9번은 말러가 무의식중에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도록 사의 찬미 같은 그림자가 느껴졌습니다. 초연도 듣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말러가 객석 어디에선가 보이지 않게 미소를 머금고 있으리라 믿고 싶었지요. 작가 조정래씨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자신이 쓴 육필 원고를 필사해보도록 권유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습니다. 바흐는 달빛을 조명으로 악보를 베꼈지만 저는 그의 음악을 빛 삼아 총보를 필사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말러를 온 몸 깊숙이 느끼게 해 준 서울시향과 지휘자 정명훈, 그리고 침묵의 5악장을 쓰며 숨죽인 청중들에게 다시 한 번 박수를 보냅니다.  (2008.2.17 예술의 전당) *

2008년 2월 17일 서울 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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