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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3. 2016

키신이 피워낸 피아노 꽃

예프게니 키신 피아노 리사이틀






  ‘결재가 진행 중인 좌석이니 다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선택하는 좌석마다 같은 메시지가 뜨더군요. 그랬어요. 말 그대로 ‘클릭 전쟁’. 예상은 했지만 그 이상이었습니다. 저 역시 키신이라는 난자를 차지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헤엄치는 수십만의 정자 중 하나였던 셈이지요. 로열석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최상의 좌석은 아니었지만 예매완료까지 거의 한 시간 남짓 걸렸으니까요. 2천 5백석이 다섯 시간 만에 팔려나가는 기록을 세운 살아있는 전설 ‘예브게니 키신’을 만나는 그날입니다. 기분 좋은 기다림과 설렘이었지요.   

  

  비우고 가야만 했습니다. 키신을 만나러가는 길은, 몸도 마음도 생각도 귀도 비우고 싶었어요. 무대로 나온 키신은 가던 길을 마저 걷듯, 마시던 찻잔을 들듯 피아노에 앉자마자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새의 부리처럼 쫑긋거리는 입 매무새며 풍선처럼 흔들거리는 고수머리는 피아노의 S라인과 함께 하나의 풍경이 되었습니다. 첫 곡 프로코피에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중 '몬테규가와 카퓰렛가'는 노다메 칸타빌레를 보는 듯 유쾌했지요. 또한 전쟁 소나타라 불리는 프로코피에프 8번 소나타를 어찌 감히 논할 수 있을까요? 멍한 시선으로 일기를 쓰는 착한 자세가 될 뿐이었습니다.  



  그날은 청중들도 최고였어요. 어느 연주회서든지 들을 수 있는 악장 사이의 변주곡 같은 헛기침 소리가 없었으니까요. 오직 들을 수 있는 기능만 남아있는 화석인 양 멈춰있고 피아노의 음표들만이 홀을 날고 있었습니다. 1997년 키신이 런던의 로열 앨버트 홀에 데뷔(Evgeny Kissin The gift of music : DVD)할 때  6,000여석을 가득 메운 홀의 중앙, 스탠딩석에 서서 마네킹처럼 연주를 듣던 사람들의 모습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연주였습니다.  


  「이 지구에서 가장 높이 자란 저 먼 나라 삼나무는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데 꼬박 24일이 걸린다 한다. 나는 24일이라는 말에 그 삼나무가 그립고 하루가 아프다. 나의 하루는 쏙독새가 울고 나비가 너울너울 날고 꽃이 피는데 달이 반달을 지나 보름을 지나 그믐의 흙덩이로 서서히 되돌아가는 그 24일, 우리가 수없이 눕고 일어서고 울고 웃다 지치는 그 24일이 늙은 삼나무에게는 오롯이 하나의 小天이라니! 한 동이의 물이라니! 나는 또 하루를 천둥 치듯 벼락 내리듯 살아왔고 산 그림자를 제 몸 안에 가두어 묻으며 서서히 먼 산이 저무는데 저 먼 산에는 물 항아리 이고 산 고개를 넘어 아직도 집으로 돌아가는 샘물 같은 산골아이가 있을 것만 같다.」(문태준 아! 24일) 


  그렇습니다. 뿌리에서 잎까지 물이 올라가는데 24일이 걸린다는 삼나무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키신 인들 어렵지 않았으랴, 그인들 쉬웠으랴 했지요. 구름이 흘러간 길은 바람이 알고 있듯 그의 손가락이 거쳐 간 피아노의 건반들만은 그의 수고를 알고 있을 터입니다. 사람의 클라이맥스라고나 할까요? 피아노의 대통령, 피아노에 노벨상이 있다면 그여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쇼팽의 환상 폴로네이즈를 연주하는 손끝은 펜으로 그리는 사군자처럼 날카롭고 명징했습니다. 숨 막히는 피아니시모를 즐길 수 있는 건 실연에서의 최고 기쁨입니다. 흑백 건반은 부드러운 곡선과 담백한 수묵의 소리를 빚어냈지요. 바티칸 소성당에 있는 시스틴 천장화 같은 위대함이 묻어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4년 동안 누워서 완성한 후, 몇 달 동안 누워서 밥을 먹고 글을 읽어야만 했던 길이 36미터, 폭 13미터의 대작처럼 키신의 피아노는 컸습니다. 웃을 때 배출된다는 엔돌핀보다 4,000배나 강력하다는 호르몬 다이졸핀이 온몸을 강타하고 있었지요. 나의 귀가 감동의 레일을 계속 굴러가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쇼팽의 에튀드는 극한의 차가움이지만 화상을 입을 수 있는 드라이아이스였습니다. 구슬을 쏟아내듯 잔영만 남는 빠른 손가락은, 거대한 아르페지오 산맥이었고 촘촘한 그물이었습니다. 숨 막히는 에튀드 ‘혁명’은 청자들의 호흡조절을 필요로 했으며 마지막 곡 ‘겨울바람’은 크루즈호의 거대함으로 다가왔습니다. 


  예정된 시간이 두려운 경우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맞기 싫은 까닭이고 다른 하나는 맞이하기 아까운 이유지요. 그 두 가지 모두 해당하는 마지막 곡이 끝났습니다. 그는 우레와 같은 박수가 송구하다는 듯 9시 2분 정도로 기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습니다. 평소 얼굴에서 감정을 읽을 수 없는 그는 동요되지 않는 표정과 감사의 말을 입으로 내지 않았고 흔한 손 키스를 날리는 제스추어도 없었어요. 그저 너도 바람 꽃 같은 작은 미소가 전부였습니다. 나이에 걸맞지 않는 순수함과 명성에 어울리지 않는 겸손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수식으로도 부족한 빛남이 있었습니다.

 

 

 드디어 모두가 예견하고 기대한 앙코르 아닌 앙코르가 시작되었습니다. 9회말 2아웃부터 라는 야구 이상의 감동이 포문을 열었던 거죠. 그의 손끝이 부려놓은 소리들은 청중들을 붙잡았고 청중의 박수는 그를 놔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토해내는 아름다움은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는 시였고 날물이 갯벌에 새겨놓은 무늬였어요. 첫 번째 앙코르곡 쇼팽 녹턴 op.27 No.2는 빨랫줄에서 나부끼는 천연 염색의 옥양목이었고 두 번째 곡 프로코피에프 op.4 no.4의 ‘악마적 암시’는 우레를 피해 비를 첨벙이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즉흥 환상곡’은 듣는 이의 맥박수를 늘리며 나비효과로 듣는 이들의 세계를 흔들었지요.  


1997년(16세), 런던 로열 앨버트 홀   리스트-라 캄파넬라

 

 ‘위대한 음악은 우리 모두에 대한 선물이죠. 이건 제 선물이 아니에요. 작곡가가 준 것이죠. 저는 작곡가가 준 선물을 청중과 나누고 싶을 뿐이에요. 그래도 제 선물이라고 생각하신다면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어떤 이유로 음악을 좋아하는지는 앞으로도 영원히 대답할 수 없기를 원하며 음악을 좋아하는 이유는 사랑에 빠지는 이유와 함께 영원히 비밀스러운 것으로 남았으면 한다는 그의 말 또한 어록에 남으리라 짐작했습니다. 


  음악을 좋아하더라도 연주자에 대한 호불호는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그날 키신과 함께 한 사람들 모두는 외통수 언덕길 위에 서있었을 걸 짐작했습니다. 예술은 사랑과 같이 항상 배고픈 것이라고 했던가요? 프로그램처럼 앙코르 모두 역시 쇼팽과 프로코피에프로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열 번째 앙코르는 모차르트였습니다. 마지막일 거라는 짐작을 했지요. 모차르트의 터키 행진곡까지 3부 프로그램처럼 이어진 1시간 30분의 보너스를 받고도 그칠 줄 모르는 천중들의 불꽃 박수는 객석에 불이 켜짐으로 겨우 식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비엔 어느새 사인을 받기 위한 팬들의 줄이 구절양장이더군요. 


  음악의 밖으로 나왔지만 저는 여전히 음악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유치환의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의 행복과 같음이었지요. 키신이 날짜를 바꿀 무렵 제 몸에 뿌려진 음표의 홀씨가 청보라의 자운영 부케를 만들더군요. 그래요, 꽃다발이 되어 걸어가던 그 순간 저는 정녕 소리 나는 꽃이었을 겁니다.   

                                                                                                                              (2009. 4. 3  예술의 전당)                                                                                                                                                                                                             




2009.4.2 서울 예술의 전당2009.4.2 서울 예술의 전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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