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팬데믹으로 발이 묶여 집콕살이하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 것처럼 어디나 인산인해이다.
아를 역시 유명한 관광지니 인파가 더 많이 몰릴 것이라 예상하고 바꾸기로 한 것이다.
그날 벌어진 사태는 순전히 내 불찰이다.
나는 아를까지의 거리와 소요 시간, 그리고 주차장의 위치, 꼭 찾아가 봐야 할 곳 등만 검색했다.
프랑스 고속도로 주행 시 유의점, 또는 하이패스가 없는 차량의 톨게이트 진입 방법이나 지불 방식 등을 간과한 것이다.
우리나라 고속도로에서는 하위 차선에서 추월하는 차량과 계속 1차선으로 달리는 차량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럽의 고속도로는 주행선과 추월선을 철저하게 지킨다.
즉 추월선은 그야말로 추월할 때만 들어서야 한다.
A7 유료도로의 제한 속도는 시속 130km,
추월 차선은 비어 있을 때가 많았고 자동차들의 행렬은 매끄럽게 이어지고 있었다.
고속도로에 진입할 때 통행 티켓은 무사히 뽑았다.
문제가 발생한 곳은 출구이다.
일종의 하이패스 구간으로 잘못 진입한 것이다.
현금이나 카드로 통행료를 지불하려면 녹색 화살표와 주황색 t표시가 있는 구간으로 진입했어야 했다.
A7도로에서 ARLES로 나가는 도로 A54
France Tollgate
현금이나 카드로 통행료를 지불할 경우 들어서야 하는 진입로
차단기 앞에 멈춘 후 비상등을 켰으므로 우리가 정차해있는 게이트로는 차들이 들어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게 문제였다.
누군가 사람을 만나야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움을 요청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옆 차로 역시 하이패스 구간이라 멈춤 없이 쌩쌩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일단 차에서 내려 주변 상황을 살폈다.
자동차들이 수없이 달려와 각자의 게이트를 스르르 통과해 나갔다.
나는 별 수 없이 톨게이트 쪽으로 달려오는 차를 향해 양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차단기 앞에 비상등을 켠 밴이 보이고 웬 외국인 여자가 손을 흔들고 있으면 뭔가 이상하다고 여길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 생각은 주효했다.
차 한 대가 우리 뒤로 스스로 다가오더니 멈춰 섰다.
그리고 운전자가 내려 우리에게 다가왔다.
우리의 사정 이야기를 들은 운전자는 본인의 차를 후진해서 공간을 만들 테니 그 사이로 빠져서 현금을 낼 수 있는 오른쪽 게이트로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차를 후진한 후 내려서는 우리 차가 그곳을 빠져나와 다른 게이트로 안전하게 들어갈 갈 때까지 수신호를 해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 덕에 우리는 위험천만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까스로 차선을 바꿔서 들어간 게이트에서
통행권을 티켓 투입구에 넣었는데 통행료가 얼마라는 표시가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나 넣어야 하는지 모르니 일단 신용 카드를 투입하기로 했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일?
투입구로 들어간 카드가 나오질 않는 거다.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다.
기계 오른쪽의 빨간색 버튼(assistance)을 눌렀다.
프랑스어 특유의 비음과 굴러가는 억양이 들려왔다.
우리는 당연히 영어로 이야기했다.
'카드가 나오지 않는다고요'
그러나 빨간 벨 속의 여자는 계속 불어로 응답하니 소통이 될 리가 없다.
그때 옆 게이트에 차량이 도착했고 탑승자와 눈이 마주쳤다.
'우리를 도와주시겠어요?
한 사람이 차에서 내려 우리에게 다가왔다.
세 명의 외국인들이 고속도로 출구 티켓 머신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으리라.
남자는 빨간 벨 속의 여직원에게 유창하게 말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신용카드가 뿅 하고 기계 속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가 알려준 금액의 동전을 집어넣고서야 드디어 고속도로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고속도로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신용 카드일 경우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천사들이 우리를 따라다니고 있음이 분명하다.
티켓 정산기
아찔한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신기할 정도로 해결이 되곤 한다.
이 또한 좋은 추억일 거라며 하하호호하다 보니 아를에 도착했다.
공영 주차장을 검색하고 떠난 덕에 주차는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아를 중앙 주차장
1888년 2월 19일 일요일 오후 9시 40분,
고흐는 파리에서 마르세유까지 가는 급행열차를 탔다.
갑작스럽게 폭설이 내렸고 16시간 만에 겨우 도착한 곳은 마르세유가 아닌 아를이었다.
해가 짧은 겨울 한 복판의 낯 선 아를은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고흐는 구시가지에 있는 한 호텔에서 첫날밤을 지새웠다.
폭설로 인하여 운명처럼 만나게 된 아를.
고흐는 론 강과 로마 유적, 그리고 소박한 분위기에 만족했다.
그는 그렇게 마르세유로 가는 걸 포기했고 아를에 머물게 되었다.
자신이 꿈꾸던 유토피아가 아를이 될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을까?
그는 1888년 2월 20일부터 1889년 5월 8일까지 아를에 머무는 동안 <노란 집> <포럼 광장의 카페테라스> <아를 요양원의 정원> <아를의 반 고흐의 방> <론강 위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원형 경기장> <아를의 랑그루아 다리> <해바라기> 등 유화 200점과 드로잉과 수채화 100점 등 약 300여 점의 그림을 그렸다.
아를의 노란 집
주차장에서 머지않은 곳에 시청 광장이 있다.
그 옆에는 생 프로핌 교회가 있고 길을 따라가다 보니 한눈에 아~여기구나 하는 노란 벽이 보였다.
고흐의 그림 '밤의 테라스(terrasse du cafe la nuit)'의 배경이 된 카페 반 고흐이다.
여행자들이 몰려들기 전인 이른 아침에 도착해서 카페에는 사람이 없었다.
다만 CAFE VAN GOGH라는 글씨가 써진 센터 좌석에 노부부가 앉아 있었는데 우리가 들어서는 걸 보고는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커피 잔은 비어 있었지만 우리를 위해 자리를 양보해준 것 같아 고마웠다.
terrasse du cafe la nuit
Cafe Van Gogh
old car
아를에는 예쁘고 아기자기한 소품을 판매하는 샵들이 많았다.
프랑스다운 색감이 발길을 사로잡았고 몇 가지 쇼핑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도시가 크지 않고 유적들이 모여 있어 걸어 다니는 게 어렵지 않았다.
세련되고 과감한 컬러들이 즐비한 샵
The shadows of the shadows
마른 꽃
낡은 포스터
벽에 무심히 붙여놓은 아이들의 사진 한 장
아를의 고대 극장(프랑스어: Théâtre antique d'Arles)은 기원전 1세기 말에 건축된 로마 극장의 유적으로 원형 극장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는 거대한 건축물이다.
현재는 도시의 다른 로마 유적 등과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 유산에 등록되어 있다.
원형극장 등과는 달리 극장에서 관객들에게 선보인 것은 연극이었다.
고대 그리스 식이나 고대 로마식 희극, 비극 등이 사람들에게 제공되고 있었다.
축제 때 주로 신들에게 바치기 위한 놀이의 경우 관람은 무료였다.
현재는 계단 좌석 흔적밖에 남아 있지 않다.
오케스트라는 아폴론에게 바쳐진 제단의 벽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또한 무대를 꾸민 기둥이 두 개나 남아 있다.
출처-위키 백과
공연 준비 중인지 조명이 설치되어 있는 고대 극장
따로 또 같이 생각에 잠긴 노부부
여행을 떠나기 전 프랑스의 5월 평균 날씨와 기온을 검색한 결과 비 내리는 날이 약 13일에 해당했다.
비가 오면 생각보다 쌀쌀하다는 정보들을 여기저기서 볼 수 있었고 다들 방수가 되는 웨더 코트를 준비했다.
그러나 햇살은 선글라스도 통과할 정도로 강렬했다.
니스를 떠나는 날까지 15일 동안 비는 단 하루도 내리지 않았다.
점심은 프랑스식 크레페인 갈레트로 정했다.
Galette는 프랑스 요리에서 평평하고 둥글게 얇은 크레페에 다양한 종류의 재료를 넣어 만드는 음식이다.
우리가 주문한 것은 브루통 갈레트(Breton galette)로 메밀가루로 만든 팬케이크였다.
팬 케이크 안에 들어가는 재료는 감자, 햄, 버섯, 치즈, 달걀, 양파 등 다양한데 누텔라나 사과 잼 등을 듬뿍 넣기도 한다.
나는 강렬함보다 담백함을 좋아하기에 햄과 달걀이 들어간 것을 먹었는데 짭조름하면서 겉은 바삭하고 안은 쫄깃한 식감이 좋았다.
Chez man Goz(갈레트로 식사를 한 식당, 고대 극장 주변에 있다)
Breton galette
고흐의 흔적을 찾아오는 관광객을 위해 그림과 동일하게 색을 칠한 오래된 아를의 병원 에스파스 반 고흐에 들어섰다.
남프랑스의 화가 공동체를 꿈꾸던 고흐는파리의 동료들에게 아를에 오라는 편지를 보냈지만답장을 해준 친구는 고갱 한 명뿐이었다.
고갱이 온다는 소식에 설레던 고흐는 여러 가지 그림으로 고갱의 방을 꾸몄는데, 그중 하나가 그 유명한 해바라기라고 한다
하지만 1888년 12월 고흐는 아를의 '노란 집'에서 고갱과 크게 싸운 후 발작하여 자신의 귀 일부를 면도칼로 잘랐다.
그 후 고갱이 아를을 떠나고 그와 함께 아를에서 유토피아적인 공동체를 만들려고 했던 꿈이 산산조각 난 것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좌절감과 슬픔에 휩싸인 고흐를 위험인물로 지목하여 정신 병원에 가둬달라는 탄원까지 이어졌다고 하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짐작할 수 있다.
결국 강제로 그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지고 그곳에서 1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현재는 에스파스 반 고흐라는 문화센터로 이용되고 있지만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회랑 한편에 놓여있는 그의 흉상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세잔이 그랬던 것처럼 고흐의 눈도 슬퍼 보였던 것은 그의 삶의 질곡과 무늬를 알기 때문이겠지 싶었다.
Sun flower
Van Gogh
Espace Van Gogh
Espace Van Gogh <아를 요양원의 정원>
에스파스에서 나오니 바로 앞에 젤라토 집이 있다.
아이스크림은 늘 친구 D가 사곤 했다.
눈이 질끈 감기는 신맛이지만 하얀색의 레몬 맛은 포기할 수 없다.
Merci~ D
에스파세 반 고흐 샵
기념품 샵
사진전 안내문이 보였다.
궁금하여 들어가 볼까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기웃거리다가 마음을 접었다.
그러니까 그냥 일반적인 사진 스튜디오 같지는 않아 보였는데 알고 보니 아를은 사진으로도 유명한 도시였다.
아를에서는 매년 여름, 유럽에서 가장 큰 국제 사진 축제 <Les Rencontres de la photographie>가 열린다고 한다. 그 기간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프로 포토그래퍼와 아마추어 포토그래퍼들로 북적인다니 살짝 궁금하다.
사진전 안내문
2021년과 2022년 아를 국제 사진전 포스터
로마제국 시대인 BC.90년,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건설된 아를의 원형 경기장은 이 도시에서 가장 큰 건축물이다.
영화 글레디에이터에서 처럼 검투사들이 동물이나사람과 결투를 하던 곳이다.
완만한 타원형으로 지어진 웅장한 경기장의 수용 인원은 2만 5천 명에 달했을 정도라고 한다.
원형 경기장의 용도는 고대 로마 시대에는 검투사가 맹수 사냥을 하는 구경거리가 열린 곳이었지만 중세 시대 때에는 아를의 요새와 거주지로, 1852년에는 다시 정비되어 현재는 콘서트장 여름 축제 기간에는 투우 경기가 열리는 장소로 쓰이고 있다.
티켓을 사서 안으로 들어가니 원형 경기장에서 운동을 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로마 시대 경기장에서 체육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색다르게 보였다.
검투사 복장으로 한 사람들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은 붉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리고 또 달렸다.
고흐가 폭설로 인해 아를에 갇히지 않았더라면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오지 않았겠지 싶었다.
삶이 나아가는 방향이나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을 알 수 없기에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오늘의 모든 시간과 만났던 사람과 보았던 모든 사물들에 감사하다.
아를에서 엑스로 돌아가는 길은 녹색 화살표와 주황색 t표시가 있는 구간으로 무사히 진입할 수 있었다.
그 후 우리는 거리와 시간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한 유료도로를 제외시킨 경로를 택해서 다니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