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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Aug 04. 2022

11. 수상한 하루

Antibes에서 만난 마지막 콘서트





앙티브(Antibes)는 지중해 휴양지의 하나로 칸과 니스 사이에 있다.

그곳으로 가려면 오구스팅역에서 기차를 타야 한다.

숙소를  옮기기 위해 도시를 바꾸는 경우 대부분 테제베를 이용하게 된다.

기차표는 2개월 전에 예매하면 무척 저렴하다.(티켓을 예매할 수 있는 기간은 나라마다 다름, 보통 2~3개월 전 오픈) 유럽의 대부분이 그렇다.

일찍 예매하면 평소의 2등석보다 저렴한 금액으로 1등석을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도시의 근교로 갈 때는 역에 있는 티켓 머신을 이용하면 된다.


그날 역시 5월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태양은 매서운 기세를 떨쳤다.

티켓을 구입한 후 나무 밑 벤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기차를 기다렸다.

생 오구스틴은 작은 간이역으로 기차를 기다리는 승객도 많지 않았는데 이상하게 자꾸 신경이 쓰이는 게 있었다. 


"쟤들 뭔가 수상해, 조심해야겠어"


저 멀리 키도 몸집도 작은 여자 아이 셋이 얼쩡거리는 모습이 보인다.

열대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프랑스에선 좀처럼 마스크 쓴 사람을 보기 힘든데  두 명은  착용했고 한 명은 턱까지 내렸다.

행색이 남루한 편이고 어딘가 스인 같아 보이지 않았다.

 

'아까 티켓 머신 앞에서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도와준다면서 자꾸 옆으로 붙는 거야. 혹시나 그 아이가 볼까 봐 지갑으로 가리고 핀코드를 입력했거든. '


LJ가 말했다.

사진에 그 문제의 아이가 우연히 찍혔다.

보통 외국 사람들은, 특히 프랑스 사람들은 먼저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 한, 절대 나서거나 말 걸지 않는다.

가령 신호등이나 교차로 앞에서 꾸물대도 경적을 울리는 일이 없고, 티켓 머신 사용이 서툴러 시간이 오래 걸려도 뒷사람이 간섭하는 일은 없었다.

모르는 사람의 지나친 친절은 뭔가 수상한 게 있다.


"아까 트램을 탔을 때도 어떤 여자가 내 가방에 손을 대다가 들켰거든.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자기는  아무 짓도 안 했다며 손사래를 치면서 급히 내렸었어..."

"어머, 그럼 거기서 여기까지 우릴 따라온 거야?"

"쟤들은 아니고 한 스무 살쯤 되는 멋쟁이 여자였어."


순간 긴장감이 돌았다.


'카메라도 가방에 넣고 백팩은 앞으로 메고 조심하자고...'


멀리서 기차가 역사를 향해 들어옴과 동시에 수상한 아이들도 재빠르게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연결된 객차가 많은데 그들은 가까운 곳을 놔두고 굳이 우리가  줄 서있는 쪽으로 다가오는 게 아닌가?

우려가 현실로 나타난 순간이었다.


그들이 우리 틈에 끼어 서는 사이 기차에 먼저 올라나는 채로 그들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LJ가 기차에 오르고 뒤따라 올라탄 아이 한 명이 검정 백 뒤로 손을 가리는 척하면서 잽싸게 LJ가방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순간 나는 소리를 빽 지르며 위협적으로 다가섰다.


"헤이!"


그 순간 흠칫 놀란 그 아이와 일행은 후다닥 기차에서 뛰어내렸다.

천천히 움직이는 기차 차창 너머로 그들의 씁쓸한 표정이 보였다.

무척 당돌하고 위협적인 행동이었다.

우리가 미리 낌새를 알아챈 덕에 다행히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았다.



Gare de st. augustin
Ticket Machine
티켓팅 하는 LJ 옆의 마스크를 착용한 여자 아이
세 명의 여자 아이들이 각각 흩어져 역 근처를 어슬렁거리고 있다.
NICE st augustin



니스에서 렌터카를 사용하지 않기로 한 이유는 대중교통으로도 충분히 여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은 일을 겪고 나니 매번 두리번거리며 긴장을 늦추지 않게 되었다.


앙티브 역 또한 소박했다.

우리의 목적지인 피카소 미술관까지는 약 1km, 걸어가기 적당한 거리다.


1946년 피카소는 파리를 떠나 7년 전 우연히 잠시 머물렀던 프랑스 남부의 작은 항구마을 앙티브로 내려와 살았다.

그는 지중해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고성에 작업실을 차리고 불과 2개월에 불과했지만 끝없이 펼쳐지는 지중해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림, 판화, 드로잉, 도자기 등 3백여 점에 가까운 많은 작품을 만들어 내었다.


앙티브의 피카소 미술관은 피카소가 작업장으로 삼았던 건물로 미술관으로 개조되기 전까지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유서 깊은 건물이었다.

그리스 시대에 건축되어 로마 시대에 성채로 사용되었으며 1385년 그라말디 가문이 성으로 축조했고 앙리 4세와 쉴리 등이 이 성을 구입하기도 했었다.

1925년 프랑스 정부에서 이 건물을 8만 프랑에 매입하며 국가 소유가 되었고 1946년 앙티브 시에서 피카소에게 이곳을 거처이자 작업실로 내주게 되면서 앙티브와 피카소의 인연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피카소 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아티스트 피카소를 위한 첫 미술관으로 오픈하게 되었다.



역을 벗어나 200m쯤 걸었을까?

수없이 많은 요트들이 정박해있는 해안 도로가 나타났다.

유럽은 요트를 즐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해안도시 어디나 요트들이 즐비하다.

한 달 정박료만 해도 수백만 원이 든다던데 소득이 높긴 한가보다.


햇살 가득 꽂힌 바닷물은 보석처럼 반짝이고 키 큰 종려나무는 도시를 평온하게 내려다보고 있다.

잔디밭엔 희거나 노란 자잘한 꽃들, 일찍 떨어진 낙엽들이 초록 잔디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룬다.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미술관에 갔다가 식사를 하기 애매하여 점심을 먼저 먹기로 했다.

해안도로에는 몇 개의 레스토랑이 있었는데 그중 우리의 선택은 비스트로 마고(Margaux)였다.

여왕 마고, 피의 결혼식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는 건 이름 때문이리라.


슈니첼을 주문했는데 고기의 어마어마한 사이즈에 놀라고, 고기의 퍽퍽함에 두 번째 놀라고, 디저트로 나온 초코 무스의 양에 또 한 번 놀랐다.


 

Gare de Antibes
마고의 샐러드, 슈니첼, 디저트 초코 무스




항구를 따라 쭉 걷다 보면 17세기의 요새였던 성 하우메 성벽이 보인다.

성벽을 따라 걸어가면

'여기 이런 것이?'

의문이 들게 만드는 설치 조형물이 뜬금없이 나타난다.


스페인 출신의 하우메 플렌자(Jaume Plensa)가 만든 유목민(Nomade)이라는 제목의 작품으로 피카소 미술관 소장품이다.

하우메 플렌자는 레터링을 이용한 작품을 만드는 공공 미술 조각가로 유명한데 우리나라의 롯데 월드에 설치된 그의 작품에는 한글도 들어있다.

마세나 광장에 설치된 '니스의 대화'라는 제목으로 일곱 명의 남자가 앉아 있는 작품을 만든 바로 그 사람이다.

앙티브에 만들어진 작품을 앞에서 보면 남자가 무릎을 감싸 안고 있는데  뻥 뚫려있는 가슴이 하트 모양이다.



Jaume Plensa 작품 Nomade
Antibes 해안가에 설치된 스페인 작가 Jaume Plensa Nomade




롯데 월드에 설치된 Jaume Plensa 작품
'가능성들 Possibilities'- 롯데 월드 타워
앙티브의 해변



과거부터 현재까지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때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보다 많이 누리고 살다 죽은 화가는 없지 않을까 싶다.

이미 스물다섯부터 명성을 떨치기 시작한 그는 여성 편력이 심하여 소위 나쁜 남자 피카소라고 불린다.

그의 작품수는 약 3만 여점인데 그중 회화가 13500여 점, 조각 약 700여 점이 있으니 어마어마하다.


피카소 미술관으로 향하는 골목에는 역시나 현대적이고 유니크한 화랑과 샵들이 즐비했다.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줄지어 있고 내부의 관람자 수를 제한하는 듯 일정한 사람이 나기야 입장시키는 시스템이었다.

그래도 놀란 터라 그럴 심산이었는데 미술관 관계자가 백팩을 앞으로 메고 귀중품을 조심하라는 말을 전했다.

 

 







미술관에서 단박에 나를 사로잡은 그림은 피카소 작품이 아니었다.

바로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ël 1914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 1955 프랑스 앙티브)의 ‘콘서트’라는 작품이다.

전시실의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빨간색 배경에 노란색 콘트라베이스와 검정 피아노앞쪽으로 악보가 쏟아져내린 듯한 형상이다.

밝고 아름다웠지만 어딘가 미완의 느낌이 있었다.

또한 색조는 마티스를 닮았지만 터치와 구성은 영 다른 화풍이었다.


알고 보니 그 그림은 그가 생애 마지막으로 접했던 콘서트에서 얻은 영감으로 그린 작품이라고 한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1955년 3월, 니콜라 드 스탈이 죽기 몇 시간 전까지 그리고 있던 미완성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콘서트가 끝나면 다른 악기와 달리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같이 큰 악기는 스테이지에 그대로 놔두는 것처럼 아마도 인생이라는 콘서트의 마지막을 암시하는 듯하다.

그림은 단순하지만 그의 격정적인 심리 상태가 마치 콘서트의 열기처럼 강렬하게 뿜어져 나온다.





니콜라 드 스탈 '콘서트'



니콜라 드 스탈은 러시아 출신의 화가로 프랑스와 미국 등에서 활동했다.

어려서 조국에서 일어난 혁명 때문에 불가피하게 폴란드로 이주했으며 부모를 잃는 바람에 벨기에에 사는 러시아인 가정에서 어렵게 성장했다.

이후 벨기에 왕립학교에서 잠시 미술수업을 받고 그 후로는 모로코, 네덜란드, 스페인, 알제리 등을 방랑하며 여러 대가들의 그림에 영향을 받는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에 프랑스 외인부대에 자원입대해 튀니지에서 자원 복무하기도 했다. 세잔과 브라크 등의 영향을 받기도 했으며 이후에는 놀랍게도 구상화와 추상화의 경계에서 균형을 완벽히 이루어내었다는 찬사를 받으며 프랑스의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로 등장했었다.



Nicolas de Staël 아틀리에



하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프랑스 화단의 중심으로 떠오르자 비평가들과 미술평론가들은 그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결국 1954년 극심한 우울증을 앓으며 동료와 친지들과의 연락을 일절 끊고 프로방스의 앙티브에 새로 마련한 아틀리에로 자리를 옮겨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그림으로 불태웠다.

그리고 이듬해 41세의 나이로 가야 할 길을 잃었다는 메시지와 함께 그리다 만 그림 '콘서트'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격정적인 레드로 표현된 그의 슬픔은 고스란히 블루의 잔잔한 바다와 대비를 이뤄 관람자들의 마음속에 더욱 깊이 전달된다. (출처 : Arts & Culture)



니콜라 드 스탈 유작 '누워있는 푸른 누드'
Nicolas de Staël – Amateur d'art               lemonde


Nicolas de Staël, "Parc des Princes"



"나는 매 순간 그림과의 결합을 잃었다가 다시 찾고, 그리고 잃는다.

우연을 믿기 때문이다."

 

니콜라 드 스탈을 만나게 된 앙티브는 나에게는 커다란 선물이었지만 그에게는 눈물방울인 곳임을 생각하니 씁쓸하다.

피카소 미술관에서 작품 사진을 찍은 것은 우연히도 죄다 니콜라 드 스탈의 그림이었다.

그에 대해 알지 못했었다.

그저 그림이 맘에 들어 촬영한 것뿐이다.

그렇게 그는 나의 리스트에 들어왔다.



이틀 후 개인적인 가정사와 일이 있는 친구 셋은 여행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그러자면 48시간 이내에 PCR 검사를 받고 음성 판정이 나와야 귀국하는 비행기를 탑승할 수 있다.

그 셋은 PCR 검사를 받으러 니스 공항으로 가고 남은 셋은 까뉴 쉬르 메르(Cagnes sur mer)라는 작은 마을을 돌아보고 가기로 했다.

앙티브 역에서 같은 기차를 타고 가다가 우리는 먼저 까뉴 쉬르 메르에서 내리고 셋은 니스 빌 까지 가면 된다.


그런데 앙티브 역에서 수상한 아이들이 또 포착되었다.

이쯤 되면 우리가 무슨 CIA라도 된 것 같다.

키나 몸집, 나이가 생 오구스팅에서 보았던 아이들과 비슷해 보이는데 여자 둘에 남자 하나이다.

기차역 간이 의자에 앉아 그들을 유심히 그러나 티 나지 않게 살펴보았다.

처음에 셋은 따로따로 떨어져 있었는데 남녀 커플이 손을 잡고 걸어가거나 셋이 모여 있거나 하며 역 주변을 배회하는 모습이 영락없이 요주의 대상으로 보였다.


'왜 우리가 타깃이 될까?'

'이유는 간단하지.'

'누가 봐도 어디로 봐도 아시아에서 온 여행자들이고 나이도 웬만하게 들어 보이니 만만하게 본 것 아닐까?'

'게다가 긴 시간 동안 코로나로 여행자들의 발이 끊어져서 생계유지에 타격이 있었을 테니 이렇게 한적한 간이역에서 대담하게 일을 벌이려는 거겠지.'


이번엔 남자아이가 끼어 있으니 긴장감이 더욱 팽배했다.


'칼이라도 들이대면 어떡하지?'

'쟤들은 엄청 잽싸게 움직일 것 같아'


아무 잘못도 없이 그 조무래기들로 인하여 벌벌 떨고 있는 우리 모습이 기가 막혔다.

온갖 불행의 가상 시나리오를 쓰면서 머리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대책을 마련하기로 했다.



앙티브 역



우선 카메라는 백팩에 넣었다.

그리고 어깨의 가방은 크로스로 메거나 앞으로 둘러맨 다음 그 위에 겉옷을 입었다.

임산부처럼 배가 불룩 튀어나왔지만 가방에 손이 들어오거나 채갈 수는 없을 터였다.

이윽고 기차가 들어왔다.

아니나 다를까.

갔나? 하고 한동안 모습이 보이지 않던 그들이 나타났다.

우리가 기차를 타려고 하는 승강구 쪽으로 오더니 우리 뒤에 섰다.

가슴이 콩닥콩닥 떨렸다.

곧 무슨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순간

'저쪽으로 가자'를 외치고는 다른 승강구 쪽으로 달려갔다.

잽싸게 방향을 바꾸어 앞 쪽 객차에 승차했고 우리의 돌발 행동에 그들은 얼떨결에 타이밍을 놓쳐버렸다.

기차에 오르려던 걸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며 아쉬움의 욕설을 내뱉었다.

그렇게 아찔한 순간이 하루에 세 번이나 있었다.






카뉴 쉬르 메르는 르누아르 (Pierre-Auguste Renoir,1841-1919)가 삶을 마무리 한 곳이다.

우리가 그곳에 가기로 한 날은 르누아르 아틀리에가 휴관하는 화요일이라 처음부터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는 말년에 류머티즘 관절염으로 온몸에 마비가 오는 고통을 겪었는데 손가락을 쓸 수 없게 되자 붓을 팔에 묶어 그림을 그렸다.

르누아르의 친구가 왜 그리 고통스러워하면서까지 그림을 그리냐는 물음에,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기 때문이네."라고 답했다고 한다.


백 년 이상 된 올리브 나무가 있는 그의 아틀리에는 가지 못하지만 지중해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마을은 꼭 가보고 싶었다.



Renoir Museum
르누아르가 말년에 사용하던 휠체어와 이젤



M과 LJ 그리고 나는 카뉴 쉬르 메르 역에서 먼저 내리고 친구 셋은 니스 빌로 향했다.

역 앞은 공사 중이라 뭔가 불안정해 보이는 것이 어수선하고 도무지 오래된 중세 마을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없다.

카뉴 쉬르 메르는 구시가지인 오뜨 드 카뉴(Haut de Cagnes)와 항구 근처의 크로 드 카뉴(Cros de Cagnes)로 나뉜다.

앙티브의 항구를 다녀오는 길이니 오뜨 드 카뉴로 가보기로 했다.


그때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Haut가 고지대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을...

유럽은 어딜 가나 부자나 귀족들은 주로 높은 지역에 살았고 일반 평민들은 낮은 지역에 살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오뜨(Haut)가 '높은'이라는 뜻도 알고 있었는데 오뜨 드 카뉴를 그냥 하나의 지명으로 소홀히 여긴 것이다.


역 앞 버스 정류장에는 우리가 타야 할 로컬 버스 번호와 운행 시간표가 표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다른 번호의 버스가 세 대나 지나가도록 우리가 탈 버스는 오지 않았다.

택시도 없고 우버도 없는 상황이라 어째야 하나?

하는 바로 그때 버스가 왔다.


버스에서 내려서 오트 드 카뉴를 향하는 길을 보니 경사가 45도는 되는 고지대였다.

큰 일이다.

이미 애송이 소매치기단들에게 기가 빠져서 에너지는 고갈되었고 버스를 기다리느라 지쳐버린 것이다.


'저 위에 기 막힌 풍경이 우리를 기다릴 거야. 천천히 올라가 보자.'


M의 말에 발걸음을 옮겨 보지만 한 발자국 떼어놓는데 2초는 걸리는 것 같다.

하지만 마을 꼭대기까지의 실질적인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오가는 사람 하나 없는 조용하다.

마을을 아우르는 전체적인 색감이 너무 맘에 들었다.

그냥 하나의 작품으로 여겨도 좋을 만큼 조화롭다.

언덕을 오르는 동안 새롭게 이어지는 오래된 집과 갖가지 꽃과 닳고 닳은 표지석, 예배당, 우물을 바라보는 즐거움으로 인해 생각보다 쉽게 오를 수 있었다.  















오뜨 드 카뉴에는 그곳 영주였던 그리말디 가문에 의해 1309년에 세워진 그리말디 성(Château-Musée Grimaldi)이 있었다. 

현재는 올리브 박물관(Musée de l’olivier)과 프랑스 가수 수지 솔리도르(Suzy Solidor)의 기증품이 전시된 솔리도르 기증 박물관(Donation Solidor)으로 운영되고 있다는데 이미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광장에는 그리말디라는 이름의 레스토랑과 카페가 영업 중인데 테이블과 의자들은 텅텅 비어있었다.

레모네이드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그런데 마드모아젤이 들고 온 컵에는 레모네이드는 ㄹ만큼의 노랑도 보이지 않는 그냥 투명한 물처럼 보였다.

맛을 본 M이 포기한 듯 말했다.


'그냥 스프라이트 맛이야.'



   

오뜨 드 카뉴
그리말디 성
그리말디 광장



'올라오긴 했는데 이제 어떻게 내려가지

다리가 후들후들 할 텐데...'


그런데 아까 언덕을 올라올 때 미니 버스가 내려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

승용차도 오르기 힘들 정도로 좁고 가파르며 구불구불한 소로였기 때문이다.

'그 버스는 뭘까?

하는데 그리말디 성 옆으로 버스 정류장으로 추측되는 팻말이 있고 44번이 쓰여있었다.

'드문드문하긴 해도 버스가 다닐지 모르니까 그쪽으로 가보자.'

그리고 카페를 나와 발걸음을 옮겨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아까 보았던 그 미니버스가 궁둥이를 보이며 서있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냅다 뛰었다.

그리도 물어볼 것도 없이 버스에 올라탔다.

길은 내리막 길 하나뿐이니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버스에는 나이가 지긋하신 어르신 서너 분이 타고 계셨다.

난데없이 동양 여인 셋이 버스에 올라타니 좀 의아한 표정이다.


M이 기사에게 요금을 묻자 Free라고 한다.

친구가 우릴 바라보며 뭐지? 하는 표정으로 기사에게 재차 물었다.

'Free라고요?'

그러자 버스에 타고 계시던 분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단체로

'Yeah It's Free'하며 흐뭇하게 웃으신다.

이유는 모르지만 불어를 모르니 묻기도 뭐하고 그냥 우리 역시 웃으며 재차

'메르씨, 메르씨 보꾸'를 거듭했다.


그렇게 높은 동네 오뜨 드 카뉴를 내려와 뒤뚱거리듯 천천히 떠나는 44번 버스의 모습을 찍었다.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일을 경험했다.

세상은 악한 사람보다 선한 사람이 더 많았다.


'고통은 지나가지만 아름다움은 남는다'는 르누아르의 말이 맞았다.

그렇게 수상한 하루가 아름답게 지나갔다.



44번 버스


Free shuttle (n° 44) Free service from city centre and the Haut-de-Cagnes



* 돌아와 검색해보니 시내 중심가에서 오트 드 카뉴까지 운행하는 44번 버스는 무료로 운행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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