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고흐의 'Someday'
Auvers-sur-Oise
'언젠가'라는 말은 막연합니다.
이루어지길 소망하나 뭔가 불확실하지요.
그러므로 나는 '언젠가'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고흐는 이렇게 소망했습니다.
"Someday or other, I believe I will find a way to have my own exhibition in a café."
"나는 언젠가 카페에서 나만의 전시회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라고 믿어요."
반 고흐가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온 지 두 달이 조금 넘은 1890년 7월 27일,
밀밭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검은 까마귀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지요.
그렇게 고흐의 'someday'는 이루어지지 못한 채 끝이 났습니다.
1890년 5월 20일, 빈센트 반 고흐는 생래미를 떠나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라부 여인숙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하루 숙식비 3.5프랑,
그가 묵었던 방은 4평이 채 안 되는 5호실 다락방에는 작은 천창이 있었습니다.
라부 여인숙(Auberge Ravoux)은 1876년부터 와인 가게이자 레스토랑으로 운영해온 곳입니다.
부엌에서는 늘 맛있는 냄새가 풍겨오고 열 개의 밀랍으로 만든 떡갈나무 식탁에는 붉은색과 흰색의 린넨 식탁보가 덮여 있습니다.
구석엔 빈 와인병을 담아둔 나무 상자가 있고, 구식 바에서는 사람들의 부드러운 잡음이 들려오곤 했지요.
고흐가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그곳 오베르로 이주한 이유는 동생 테오의 생각이었습니다.
오베르에는 아마추어 화가이며 신경장애를 전문으로 하는 닥터 가셰가 있었고 그가 형 빈센트를 잘 돌봐주리라 여긴 것입니다.
실제로 닥터 가셰의 보살핌 덕분에, 반 고흐는 오베르에서 <까마귀가 있는 밀밭>, <닥터 가셰>의 초상화와 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1890년 7월 28일 새벽 1:30분, 전갈을 받고 급히 달려온 테오는 그곳에서 형의 마지막 순간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후 집주인은 그 방을 임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자살한 아티스트의 영적인 우주가 스며들어 있다는 이유라고 합니다.
"볼 것은 없지만… 느낄 것은 모두"라는 그 방은 손대지 않은 채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지친 몸뚱이, 낡은 외투와 구두, 화구들만으로도 가득 찰 작은 방은 비어 있고 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습니다.
그저 그의 존재를 느끼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고흐의 작은 다락방 고흐의 방에 걸려있는 친필 글씨
지금의 라부 여관은 1987년 벨기에 출신 사업가가 구입해서 반 고흐의 기억을 보존하는 데 전념해 왔다고 합니다.
이 연구소의 주요 목표는 이 화가의 마지막 소원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고흐의 방에 걸려있는 액자의 내용은
'빈센트에 의해 그려진 캔버스 중 하나가 마침내 그것을 말리기 위해 보관되었던 바로 그 방으로 돌아올 것이다. 7평방미터의 전시공간을 갖춘 반 고흐 하우스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박물관이 될 것이고, 다락방은 '전망이 보이는 방'이 될 것이다.'
우리는 아티스트들의 '기억의 장소'이자 '삶과 죽음의 장소'들을 찾아다닙니다.
고흐가 단 70일 동안 머물렀던 그 집과 방,
그림을 그렸던 여기저기,
그리고 동생과 나란히 묻힌 묘지,
오늘 찾아갈 곳은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입니다.
비가 부슬부슬 내렸어요.
오베르 쉬르 우아즈는 파리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지만 북역까지 가서 발몽두아로 가는 기차를 타거나 버스를 이용해야 합니다.
우버를 검색해보니 셋이 이용하기에 꽤 합리적인 금액이더군요.
숙소에서 우버를 불러 타고 곧장 출발했지요.
그 덕에 시간도 절약하고 편하게 도착했습니다.
기차역 앞에 내렸는데 그렇게 한가할 수가 없어요.
진짜 시간이 멈춰버린 듯 전통적인 프랑스 시골 마을의 느낌이 물씬 풍겼습니다.
게다가 이슬비가 스프레이처럼 뿌리니 운치가 더했지요.
빛바랜 라임색 집,
바질 페스토를 발라놓은 듯 초록으로 부풀고 있는 가로수,
고양이의 발걸음처럼 느긋한 사람들의 움직임.
알 수 없는 고요가 마을 전체에 조용하게 머무는 것 같았습니다.
오베르 역사의 벽에는 고흐의 그림과 함께 주요 장소를 친절하게 알려주는 안내도가 붙어 있습니다.
기차는 타지 않았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고흐의 그림이 벽면 가득 걸려있더군요.
밖으로 나와 오베르 성당 쪽으로 올라갔습니다.
길가에 핀 꽃들이 먹이를 기다리는 아기새 입처럼 예뻐서 발걸음을 떼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내가 그림 속의 프레임 속을 걷고 있는 것 같았어요.
우산도 접은 채 비옷에 달린 후드를 쓰고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비가 많이 내릴지 몰라 카메라를 두고 왔더니 세상 가볍고 편하더군요.
역 앞 풍경
숲길로 이어지는 나무 아래 생소하지만 한눈에 고흐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그림 한 점과 설명이 쓰여 있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고흐가 자신에게 스스로 총을 쏘기 전, 그러니까 1890년 7월 27일에 그린 마지막 작품인 <Roots>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는 내용이었어요.
2년 전, 그러니까 2020년 7월 28일 오벨 쉬르 우아즈의 마을 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바우터 반 데르 빈'은 반 고흐가 이 그림이 작별의 의미로 그려졌다는 증거가 밝혀졌다고 발표했습니다.
그는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박물관>에서 동료 큐레이터와 수년간의 연구와 교차 점검을 하여 자살을 시도하기 불과 몇 시간 전에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확실시했다고 합니다.
길가에 붙어있는 고흐의 마지막 그림 <뿌리>에 대한 안내문
'여기네~ '
이미 그림으로 보아왔기에 눈에 익숙한 그 성당이 보였습니다.
'Auvers Sur Oise Church, Eglise Notre Dame'
성당 안에는 아무도 없고 소박한 교회 안에 고흐의 그림 두 점이 걸려 있었습니다.
성당 내부에 걸려있는 해바라기
어느새 비가 그쳤습니다.
자잘한 꽃 무더기 옆의 벤치에 앉았지요.
김밥으로 만들어온 도시락을 먹을 참입니다.
마트에서 산 일본산 초밥용 쌀로 밥을 짓고, 달걀지단 만들고, 당근 오이 볶아 넣고 시금치도 데쳐서 무쳤지요.
단무지가 빠졌지만 고소하고 맛있는 김밥이었습니다.
새콤달콤한 청포도는 훌륭한 디저트였습니다.
성당 옆으로 이어지는 소로 한쪽에 이 교회의 유래가 적혀 있었습니다.
11세기 루이 6세는 이곳에 별장까지 만들고 사냥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런데 1131년 어느 날 사냥을 따라왔던 왕세자 필리프가 말에서 떨어져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후 그 아들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 바로 오늘날의 오베르 교회라고 하네요.
반 고흐는 그곳에 머무는 70일 동안 80여 개의 작품을 남겼고 그곳 공동묘지에 묻히고 테오도 그 곁에 묻혀 영원히 함께 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깊은 슬픔에 차 있던 동생 테오는 몽마르트르로 돌아가 형을 위한 추모식을 열었고, 시름시름 앓다가 형이 세상을 뜬지 6개월 만인 1891년 1월 25일,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에 고향인 네덜란드에서 사망했습니다.
처음엔 테오는 다른 곳에 안치했었는데 두 사람이 주고받은 서간집이 출간된 1914년에 테오의 유해를 형의 곁으로 옮겨 안치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를 서간집으로 엮어 출판한 것도, 형제의 시신을 한 곳으로 안치하도록 도운 것도 모두 테오의 부인이 이룬 업적입니다.
오베르 성당과 고흐 형제의 무덤에 대한 안내문 테오와 빈센트의 묘지를 가리키는 표지 빈센트와 테오, 이곳에 있다. 빈센트와 테오의 무덤, 누군가 두고 간 장미와 해바라기가 비에 촉촉히 젖어 있다.
끝도 없이 펼쳐진 5월의 밀밭은 그림에서처럼 누렇지도 않고 까마귀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피해 극한의 외로움을 견디며 홀로 마을 곳곳을 걸어 다녔을...
낡은 이젤을 펼치고 정신적 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그림을 그렸을...
가슴이 먹먹하더군요.
청보리도 구경하기 힘든 우리나라는 흔히 볼 수 있는 것은 논입니다.
흐린 하늘 아래 끝도 없이 펼쳐진 초록빛 밀의 일렁임은 그야말로 장관이었어요.
밀밭을 따라 걸어가는 길은 한가롭고 조용하고 평화로웠습니다.
저 멀리 세 갈래길이 보이고 그림을 붙여놓은 표지판이 보입니다.
다가가서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 Wheatfield with Crows>이 분명합니다.
가셰 박사는 치료의 일환으로 반 고흐에게 그림에 몰입할 것을 권했다.
반 고흐는 가셰 박사의 초상이나 인근의 밀밭과 화가 도비니의 정원 같은 주변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 다시 발작이 도질까 걱정하면서도 반 고흐는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즐겼다.
반 고흐는 아를에 머물 때부터 밀밭을 그려왔고, 생레미의 요양원에 있을 때는 창 밖으로 보이는 밀밭 풍경에서 영감을 얻어 연작을 그리기도 했다.
반 고흐에게 밀밭의 노란색은 빛에서 파생된 것이었고, 이에 매료되어 강렬한 필치로 그렸다.
그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도 밀밭을 주제로 한 풍경화를 여러 점 제작했는데, 모두 이 그림처럼 가로로 긴 캔버스에 그려 밀밭의 광활함을 강조한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반 고흐가 자살하기 직전인 1890년 7월에 그려졌고,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하나다.
표면에서 요동치는 빠른 필치로 거칠게 그려진 어둡고 낮은 하늘과 불길한 까마귀 떼,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전경의 세 갈래의 갈림길은 자살 직전 그의 절망감을 강하게 상징하는 듯하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는 성난 하늘 아래의 거대한 밀밭을 묘사한 것이고, 나는 그 안에 있는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다."라고 썼다.
하지만 이 편지 구절이 정확히 이 그림을 지칭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출처 네이버 지식 백과
<까마귀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세 갈래길
크기 50.5 x 103 cm , 소장처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오베르 계단
한참 동안 밀밭을 거닐다가 내려오다가 고흐가 묵었던 라부 여인숙이 보입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은 휴관이라 문이 굳게 닫혀 있었지요.
그의 방을 볼 수는 없었지만 외부에 자세한 사진들이 부착되어 있습니다.
유리창 사이로 철문 사이로 고개를 쑥 빼고 기웃거립니다.
70일 동안 그곳을 들락날락했을 고흐를 상상하면서요.
라부 여인숙(지붕에 작은 창이 보이는데 그 방이 고흐가 묵었던 다락방) 1870년대의 라부 여인숙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린 그림들 당시 사진
이렇다 하게 근사한 카페도 레스토랑도 없었어요.
라부 여인숙이 문을 닫는 요일엔 여행자들이 드물고 그에 따라 레스토랑이나 카페도 영업을 하지 않는가 싶더군요.
프랑스에도 우리나라 구멍가게 같은 곳이 있습니다.
타바코, 로또, 그리고 커피나 맥주를 간단히 서서 마실 수 있는 시스템인데 아쉬운 대로 그곳에서 커피를 샀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언제나 사랑이 되는 블랑제리,
마침 문을 연 곳이 있어서 슈케트(chouquette)와 뺑 오 쇼콜라(pain au chocolat)를 샀습니다.
슈케트는 파리 마레 지구에 나갔던 날 우연히 처음 먹어본 후 우리의 단골 간식이 되었는데요.
반죽에 녹지 않는 설탕 덩어리인 (하겔 슈가 또는 펄 슈가)을 얹어 구운 작은 빵으로 속이 비어있습니다.
바삭하면서 쫄깃하고 설탕이 씹히는 식감이 아주 최고입니다.
그곳은 반 고흐 공원(도비니 정원)으로 여행 안내소가 함께 있는 곳입니다.
화구를 챙겨 들고 길을 나서는 키 큰 고흐의 동상이 보입니다.
그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커피와 빵을 먹었습니다.
'네덜란드 사람이라 그런지 키가 크네, 너무 말랐어.'
볼이 푹 꺼지고 홀쭉한 그의 모습이 30대로 보이지 않습니다.
'세잔 동상도 슬퍼 보였는데 고흐도 마찬가지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있는 그 반 고흐의 동상은 최초의 입체파 조각가인 오시프 자킨(Ossip Zadkin)이 반 고흐를 기리며 헌정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반 고흐 동상 고흐의 또 다른 그림의 배경인 오베르 시청, The Mairie (town hall)
'지베르니에는 그렇게 사람이 많더니 여긴 왜 이렇게 썰렁하지? 고흐가 더 불쌍하게 느껴져'
'톨스토이 문학관 푸시킨 문학관에 갔던 기억나네.'
'맞아, 그러네.'
모스크바에는 톨스토이 박물관과 푸시킨 박물관이 지척에 있습니다.
부잣집 자제였던 푸시킨 박물관은 궁전처럼 의리의리 하고 화려하며 그 크기도 압도적인 반면
톨스토이 박물관은 사진과 책, 그림 몇 점이 전부였거든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보낸 하루는 완전히 힐링 데이였습니다.
흐린 날씨에 적절한 기온이 그랬고
여행자가 거의 없는 한적한 시골에서 고흐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여유로움이 큰 이유였지요.
마을 곳곳에 고흐를 상징하는 그림이나 앙증맞은 그림들이 많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역
10여 년간 천여 점의 그림을 그렸지만 그가 살아 있을 때 팔린 그림은 단 한 점이라는 사실은 유명하지요.
고흐가 1890년에 마지막으로 그린 '가셰 박사의 초상'의 첫 번째 작품은, 1990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8천250만 달러(한화로 약 900억)에 일본 다이쇼와 제지의 명예회장에게 낙찰되었습니다.
이 기록은 당시 세계 최고가 판매 기록인데 '사이토 료에이'는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소장품인 이 그림과 르누아르 작품을 함께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지요.
그러나 전 세계 미술계의 반대로 '사이토 료에이' 회장은 유언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네요.
400프랑에 팔린 고흐의 그림 <아를의 붉은 포도밭> 닥터 가셰의 초상
아쉬움에 마을 끝까지 산책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이제 우리도 떠나야겠습니다.
7분 후면 호출한 우버가 도착합니다.
'나는 언젠가 카페에서 나만의 전시회를 가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거라고 믿어요.
작은 카페에서 그만의 전시회가 열려 고흐의 바람이 이루어졌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언젠가 내 그림이 물감 값과 생활비보다 더 많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다른 사람도 알게 될 것이다.'
'언젠가 죽음은 우리를 다른 별로 데려갈 것이다.'
'인류와 예술' 두 가지 목표만 가지고 있었던 빈센트 반 고흐,
그렇게 고흐의 'someday'는 슬프게 남았습니다.
Self Portrait Vincent Van Gogh 18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