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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15. 2023

녹아들지 않으면

6. Siracusa Ortigia



내게 있어 스마트폰은 혁명이다.

특히 여행에서 그렇다.

유용한, 아니 필수 어플들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화장실을 찾아주는 어플까지 있다.

자동차를 이용할 때는 주차장 어플이 꽤 유용하다.

목적지 근처의 랜드 마크나 주소를 입력하면 지도와 함께 근처 주차장의 목록이 주르르 나온다.

주소는 물론 주차대수와 시간당 요금까지 명시되므로 아주 유용하다.

예약이 가능한 곳도 있다.

ZTL 구역을 알려주는 어플은 현재 내가 주행하고 있는 지역이 ZTL 지역인지,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알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때때로 구글맵이 막다른 길로 안내를 하여 당황스럽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아그리젠토를 떠나면서 라구사 주차장 주소를 입력했다.

목적지가 겨우 130m 남았는데 맞닥트린 곳은 일방통행이라 진입 불가이고 바로 옆은 ZTL 구역,

하는 수 없이 차를 돌려 한 바퀴 돌아 다른 길로 들어서니 다시 부딪힌 난관.

근처까지 거의 다가갔는데 아치형 돌 문이 떡 하니 나타난 것이다.

과연 통과할 수 있을까?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방법을 찾는 것과 바를 바 없다.

차에서 내려서 살펴보아도 확신이 없었다.


'이럴 때 이태리 가이가 "짠"하고 나타나서 도와주면 좋은데.'


그 말을 끝나자마자 어딘가에서 소리치는 게 들렸다.

우리가 정차해 있는 바로 뒤, 길가에 있는 어느 집 창문에서 할아버지가 고개를 내민 채 계속 우리를 향해 뭔가를 말씀하셨다.

이탈리아어라 그게 가라는 말인지 안된다는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손으로 들어가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갈 수 있다오, 내가 여기 오래 살아서 잘 알아요. 그 차는 문제없이 지나갈 수 있으니 걱정 말고 가요.'


아마도 그런 뜻인듯했다.

할아버지에게 다가가 말은 영어로, 손짓은 들어갈 수 있냐는 제스처로 물었다.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들어갈 수 있음을 확신하는 듯했다.

그에 힘입어 아치형의 돌문을 향해 천천히 진입했고 그야말로 깻잎 한 장 차이로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

'그라찌에'

주차를 하고 나와 모퉁이를 돌아선 순간 ZTL 구역 표지판이 보였다.

구시가지를 바로 옆에 둔 주차장을 제대로 잘 찾아온 것이다.

이번 여행은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또는 뭔가 바라는 걸 말하면 그대로 척척 이루어지곤 했다.







산 조르지오 두오모



라구사의 구시가 지역은 라구사 이블라라고 불린다.

산 조르지오 두오모의 왼쪽 계단을 통해 올라가면 중세풍의 이블라의 낡은 지붕들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고풍스러운 집들과 성당이 어우러져있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샵들이 많았다.

신전의 계곡을 바라보며 올리브밭 농가주택에서 행복했던 시간은 그새 잊은 듯 갑자기 라구사에 홀딱 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비가 오락가락하는 그날, 친구들은 라피아 모자와 모던한 선글라스를 구입했다.


점심식사는 전설로 내려오는 무어인의 화분과 시칠리아스럽게 장식이 화려한 레스토랑 'That's a Moro.

식전빵이 어찌나 맛있는지 피자가 나오기도 전에 다 먹었다.

이탈리아에서는 기본인 마르게리타 피자가 7~8유로, 저렴하지만 어디나 맛있어서 부담 없이 즐기기에 좋다.

깔라마리와 앤초비가 메인인 생선 모둠튀김, 구운 채소, 특히 오렌지와 팬넬로 만든 샐러드와 케이퍼와 바질이 들어있는 샬롯 토마토 샐러드는 처음 먹어보는데 깔끔하고 상큼하여 고소하지만 살짝 느끼한 튀김을 잡아주어 잘 어울렸다.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의 태도나 말은 참 중요하다.

특히 음식점은 더 그렇다.

서빙하는 남자의 유쾌하고 싹싹한 말투가 애피타이저처럼 입맛을 돋워주었다. 

그날 역시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손님이 먼저 사진 찍기를 자처하며 테이블의 이쪽, 저쪽을 오가며 성심껏 찍어주셨다.

커다란 파라솔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피자를 먹는 분위기도 파전에 막걸리 못지않게 좋았다.


  

레스토랑 'That's a Moro




라구사에서 인근에 있는 모디카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다.

그곳에는 100년 된 초콜릿 가게가 있다고 했다.

모디카의 주차도 만만찮고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데 시라쿠사의 공영주차장 사정을 모르니 패스하기로 결정하고 출발했다.


시라쿠사는 사실 오르티지아 섬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르티지아는 섬이지만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두 개의 짧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오르티지아 섬의 대부분이 ZTL지역에 해당하므로 오르티지아에서 내가 원하는 숙소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렇게 어렵사리 구했지만 집은 퀄리티와 위치까지 흠잡을 데 없이 완벽했다.

게다가 호스트인 안드레아의 메시지에 의하면 그의 집이 팔렸는데 다행히 우리의 예약까지는 취소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고 하니 감사한 일이다.

안드레아는 산타루치아 다리를 건너면 ZTL지역이니 그쪽으로 건너지 말고 옛 다리인 움베르토 1세 다리로 건너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생각보다 집을 찾는 건 쉬웠고 무엇보다 주차비가 저렴한 시립 주차장이 바로 집 근처에 있어 편리했다.

약 70평쯤 되는 숙소는 방 세 개가 모두 하버뷰,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을까 싶게 넓은 욕실 2개와 거실, 주방까지 완벽했다. 






한 가지 아쉬운 건, 방 세 개가 모두 킹 사이즈 침대, 4명이니 두 명은 한 침대를 사용해야 한다는 얘기다.

사진상 방 하나는 트윈 베드였는데 말이다.

안드레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저녁 8시쯤에 들러서 침대 하나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약속한 시간에 도착한 안드레아는 영화배우 뺨치는 미남이었다.

그는 거실과 주방 사이에 있는 간이 거실의 소파 베드에 가져온 하얀 베드 스프레드를 씌우기 시작했다.

능숙한 솜씨로 각을 잡아 접어 넣는 솜씨가 호텔 메이드 뺨친다.

순식간에 침대가 완성되었다.

준비한 선물을 건네며 여자 친구에게 줘도 좋을 거라고 하니


'무슨 소립니까? 당연하죠, 이 아름다운 거울은 꼭 마르티나에게 줄 겁니다.' 하며 웃었다.


장거리 이동을 하고 새로운 숙소에 도착한 첫날은 좀 더 피곤하다.

다음 날 모두들 느지막이 일어났다.

발코니로 나가보니 커다란 생선들을 실어 나르는 트럭과 상인들의 분주한 모습이 보였다.


'시장 구경하고 먹을 것 좀 사 올까?'


그런데 '맘마미아' 예기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나는 재빨리 안드레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안드레아, 변기가 막혀서 물이 안 내려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도와주세요.'

'네~ 30분 내에 가겠습니다.'


안드레아는 약속 시간 전에 핸디맨으로 보이는 젊은 청년과 함께 왔다.

하지만 그 청년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에 배관공이 장비를 갖고 올 테니 기다려달라고 했다.

거대한 배관장비가 등장하고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난 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아서 나가보니 그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욕실은 물론 말끔하게 해결이 되어있었다.

발 빠르게 대처해 준 안드레아에게 고맙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럭저럭 시간은 10시가 넘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시장 구경에 나섰다.

과일, 채소, 각종 잼과 향신가루, 올리브 오일, 치즈...

오르티지아의 올드 마켓에는 세계적으로 이름난 파니니(이탈리아식 샌드위치) 집이 있다. 

번호표를 뽑고 기다려야 하는 그곳의 이름은 Caseificio Borderi (카세이피쵸 보르데리)




그 가게의 스토리는 파스콸레 보르데리라는 사람은 올리브 오일을 만들어 팔았다. 

그러나 파스콸레의 아들 안드레아는 치즈에 관심이 많아 갖은 연구를 하여 치즈의 달인이 되었다.

치즈 공장(Caseificio는 이탈리아어로 치즈 공장을 의미)을 시작한 그는 치즈를 홍보하기 위한 방편으로 오르티지아의 시장에 있는 노점에서 파니니에 치즈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는데 유명세를 타게 되어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안드레아는 이제 더 이상 그곳에서 파니니를 만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 유명한 집이 숙소에서 불과 140m,

그 또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당연히 이틀 연속으로 먹었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안드레아 할아버지의 사위


무엇보다 눈에 띄게 활기찬 곳은 생선가게였다.

처음 보는 생선도 익히 잘 아는 생선들도 모두 투명하고 선명한 빛깔로 알몸을 뽐내고 있었다.

눈을 뗄 수 없이 아름다운 자연의 컬러들이 가판대 위에 놓여있었다.

생선 파는 아저씨의 걸쭉하고 우렁찬 목소리는 시장 골목을 쩌렁쩌렁 울렸다.


'살아있다는 건 이렇게 아름다운 거야'라는 메시지 같았다.


손님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환희에 찬 오페라 아리아와 같았다.

그 소리에 취한 듯 한참을 듣고 서 있었다.

왠지 모르지만 그 우렁찬 목소리에서 묘한 위로가 느껴졌다.


'녹아들지 않으면 

그럴듯하지 않고

즐겁지도 않다.'  


<녹아들다>라는 정현종의 시구가 생각났다.

녹아지면 그럴듯해지고 그럴듯해지면 즐거워진다는...


오르티지아 시장의 그 생선 장사는 내게 '녹아들다'라는 게 뭔지 알게 했다.  

'녹아들면...'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던 아저씨는 사진의 가장 오른쪽



몇 가지 과일을 샀다.

작은 오징어 몇 마리와 꽤 실한 크기의 새우들도 샀다.

초장에 넣을 작은 레몬 한 알도 샀다.


데친 오징어는 그야말로 아이스크림처럼 살살 녹았다.

솜씨 좋은 요리부 친구들이 어떤 마술을 부렸는지 구운 새우는 여태껏 먹어온 새우들의 맛을 모두 잊게 만드는 그야말로 인생 새우였다.

퍽퍽함, 질깃함, 비릿함이 전혀 없이 간이 딱 좋은 게 고소하고 부드러웠다.

아직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슐랭 3 스타 레스토랑에 가면 느낄 수 있는 맛이 아닐까 싶었다.


또한 그릴에 구운 파프리카와 아티초크도 맛나다.

파프리카는 스페인의 대파 요리 칼솟처럼 탄 껍질을 벗겨내니 천연의 단맛과 부드러운 질감이 기분 좋게 느껴진다.

아티초크는 처음 먹어봤는데 솔방울처럼 생긴 걸 하나씩 떼내어 밑부분을 먹으면 된다.

맛과 식감은 죽순과 비슷한데 크기에 비해 먹는 부분이 적긴 하지만 나름 매력 있는 채소였다.

주방이 있는 숙소에 머무는 여행자라면 오르티지아 새우를 놓치지 말 것을 권한다.



첫날, 오징어와 새우, 구운 아티초크와 파프리카
이튿날 새우



우리는 다음 날 아침, 당연히 시장을 다시 찾았다.

전날보다 많은 양의 새우를 샀다.

맛은? 

말해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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