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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15. 2023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7. Siracusa, Noto





사람 많고 번잡한 곳을 헤치고 지나거나, 시끄러운 분위기를 견디며 다녀야 하는 일,

그게 가장 어렵다.

그래서 새벽 산책을 한다.

싫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 남짓 걸었다.

청소하는 사람, 개와 산책하는 사람, 건축 노동자들이 아침을 연다.

유일하게 문을 연 곳은 빵집,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싶은데 돈이 없다.

생각 없이 카메라만 챙긴 것이다.


아직 햇빛이 도달하지 못해 그늘진 좁은 골목을 걸었다.

그곳에는 유난히 고양이들이 많았다.

길목 한 귀퉁이에 놓인 밥그릇에 밥을 주고 있는 사람들도 간간히 볼 수 있었다.

2층 아파트처럼 칸칸이 고양이 집을 만들어 놓은 곳도 있었다.

알고 보니 시라쿠사 시에서 운영하는 고양이 급식소가 있다는 것이다.

그곳 고양이들은 대접받고 사는구나 싶었다.

 

며칠에 한 번 나가는 새벽 산책은 별다를 게 없다.

단지 침묵이 주는 편안함을 즐길 뿐이다.

 

   












이탈리아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보유국 1위이다. 

오르티지아 역시 섬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탈리아의 여배우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한 영화 '말레나'의 배경인 두오모가 있는 곳이 대표 광장이다.

시네마 파라디소의 주세페 토르나토레가 감독하고 그와 콤비인 엔리오 모리코네가 음악을 만들어진 말레나는 영상이 아름다웠던 기억이 있다.


시라쿠사 대성당, 시칠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도리아식 신전인 아폴로 신전, 바다 옆 민물 샘인 아레투사의 샘, 물리학자 아르키메데스 광장등이 있다.     

사실 아르키메데스가 그리스인이 아니라 시칠리아의 시라쿠사가 고향이라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시라쿠사 두오모 광장이 배경인 영화 말레나




오후 느지막이 친구들과 오르티지아의 거리를 쭉 걸었다.

고급스러움이 물씬 풍기는 상점과 세련되고 멋진 현지인들이 많다.

중앙에 다이애나(달의 여신)가 서있는 다이애나 분수는 특이하게 금빛이었다.

조각에 등장하는 말이나 남자들이 모두 인어처럼 꼬리가 달려있는 게 독특하다.





지는 햇빛이 강렬한 분수 광장에서 디저트 케이크를 곁들여 커피를 마셨다.

시칠리아는 특히 디저트가 유명하다.

포크를 갖다 대는 게 아까울 정도로 정교하고 예쁜 것들이 정말 많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은 벌써 어둑하다.

1936년에 문을 연 곳 Viola에서 먹은 피스타치오 젤라토는 눈이 번쩍 커질 정도로 깊은 맛이었다.

적당한 당도와 쫀득거리는 식감, 간간히 씹히는 피스타치오 조각 등 맛의 조화가 완벽했다.

거의 매일 피스타치오 젤라토를 먹었지만 실망스러운 곳은 없었다.





since 1936, Viola의 젤라토


숙소에서 40분 남짓한 거리의 노토로 향했다.

노토는 해마다 5월에 열리는 꽃축제로 유명하다.

곳곳에 페스티벌을 알리는 포스터들이 붙어있었다.

우리가 시칠리아를 떠난 후 예정되어 있어 아쉬움이 컸다.



5월 19일-23일까지 예정된 노토 꽃 축제
2022 노토 꽃 축제



주차를 하고 200m 남짓 걸으니 성당과 시청사가 마주 보고 있는 랜드 마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소수자들이 모여 뭔가 행사를 벌이는 모양이었다.

그들을 상징하는 무지개 깃발을 여기저기 세워 두고 있는 것으로 짐작했다.

몇몇의 사람들이 하얀 깃발에 글씨와 그림을 그리는 모습도 보인다.





무지개 깃발은 성소수자 운동의 상징이다.

LGBTQ(레즈비언·게이·바이섹슈얼·트랜스젠더·퀴어) 프라이드의 달 6월이 오면 세계 곳곳에 무지개 깃발이 나부낀다. 

2015년 미국 대법원이 동성결혼을 합법화하면서 전 세계 페이스북 사용자 2500만 명 이상이 프로필 사진을 무지개로 물들였다. 백악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나이아가라폭포도 무지개 조명을 밝혔다. 나아가 무지개 깃발은 성소수자 인권 관련 시위뿐 아니라 다양성과 평화를 지지하는 집회라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세계적 상징이 됐다. 출처 : 한겨레 신문





카페에서 커피와 오렌지 주스를 사서 돌 벤치에 쪼르르 앉았다.

보르데리에서 사 갖고 온 샌드위치는 식었지만 여전히 맛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오렌지 주스가 자몽주스보다도 더 붉은 색깔이었다.

오렌지 맛이 나긴 하지만 신맛보다 좀 더 상큼하면서 베리 맛도 나는 게 매력적이다.

그것은 일명 블러드 오렌지, 시칠리아에서는 모로실(모로 오렌지)이라고 불리는 붉은 과육의 오렌지이다.

가루로 만들어진 모로실은 다이어트 식품으로 섭취한다고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블러드 오렌지
길에서 먹는 보르데리 샌드위치 (왼쪽부터 J,  LJ, D)



시청이 이렇게 아름답다고?

성당과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는 그 건물은 원래 '두체치오'라는 이름의 궁전이었다.

17세기의 프랑스 궁전에서 영감을 받아 빈센초 시나트라라는 건축가가 18세기에 지었다고 한다.

바로크 양식은 아니지만 컬러와 아치형 기둥, 그리고 대칭이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내부로 들어가면 노토 시가지와 성당의 파노라마 뷰를 볼 수 있다는 말에 티켓을 구매했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아니면 우리들의 경험치 눈높이가 너무 높은 것인지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티켓이 3유로라 그냥 용서가 되었다.




시청으로 쓰고 있는 두체치오 궁전



노토 대성당
노토 성당 내부



시칠리아는 어딜 가나 쉽게 볼 수 있는 몇 가지가 있다.

무어(Moor)인의 두상 모양으로 만들어진 도자기 화분과 솔방울 모양의 세라믹이다. 


무리쉬 헤드라고 불리는 이 화분에는 재밌고도 무서운 전설이 있다. 

11세기 시칠리아가 무어인에게 점령당하던 시절, 한 무어인 상인은 꽃을 가꾸고 있는 팔레르모 여인에게 한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열열한 구애 끝에 두 사람은 사랑을 나누며 행복하게 지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여인은 그가 떠나려고 하는 것을 눈치챘는데 알고 보니 그의 고향에는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가족이 있던 것이다.

심한 배신감도 들고 그를 돌려보내고 싶지 않았던 여인은 그가 자는 동안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그 머리에 바질을 심었더니 풍성하게 무럭무럭 잘 잤다.

그 이후로 이웃들은 바질이 심어진 화분인 무어인 상인의 머리 모양을 본떠 도자기 화분을 만들었고 유행처럼 시칠리아의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무어인의 전설에서 내려오는 머리 모양의 화분



시칠리아에서 지내게 된 숙소마다 솔방울 모양의 세라믹이 놓여 있었다.

크기와 컬러는 다르지만 모양은 모두 같았다.

집이 아니라 젤라토나 카놀리 같은 먹거리를 판매하는 상점에서도 볼 수 있다.

세라믹을 판매하는 상점에는 다양한 크기와 컬러의 상품이 진열되어 있고 종종 만드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저게 뭘까, 내내 궁금증을 갖고 있다가 알게 되었다.


이태리어로 피냐(pigna)

고대 시칠리아부터 내려오는 풍습으로 도자기 솔방울은 건강과 행운과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라고 한다.

그러므로 집 안에서 빠질 수 없는 장식품이라고 한다.

'하나 샀어야 하나?' 살짝 아쉽다.


 

디저트인 카놀리 판매점에 놓인 피냐
피냐


이제 타오르미나로 가서 에트나 화산에 오를 예정이다.

시칠리아에서의 일정이 반이 지났다.

항상 반이 지나면 체감 시간은 더 빠르게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쉬워하는 시간도 사치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오늘처럼 예쁘고 신나고 즐겁게...

그렇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러니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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