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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06. 2023

'싶음', 선택의 여지란 없다.

11.Moret sur loing, Alfred Sisley






밀레의 아틀리에가 있는 바르비종에서 다시 21번 버스를 타고 퐁텐블로 아봉(Fontainebleau-Avon) 역으로 갔습니다.

거리서 몽트뢰로 가는 기차를 타고 모레 베누 레 사블롱(moret veneux les sablons)까지는 두 정류장, 10분이 채 걸리지 않더군요.

시골 간이역 그대로의 모습입니다.



moret veneux les sablons역



모레 쉬르 루앙까지는 약 2km,

모네, 시슬리, 르누아르의 초상화로 벽을 장식한 레스토랑이 있더군요.

낙엽이 떨어진 길은 한적했습니다.

모레 쉬르 루앙은 파리에서 약 65km 떨어진 작은 중세 도시입니다.     

중세의 구시가지는 센 강과 합류되는 로잉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곳이었어요.

그곳을 찾아간 이유는 화가 알프레드 시슬리 때문입니다.

이번에 방문했던 오랑주리 미술관, 오르세 미술관, 쁘띠 팔레에서 그의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전에도 봤던 그림들인데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유난히 더 아름다워 보였지요.

그러므로 그가 마지막에 20년을 살았던 모레 쉬르 루앙에 찾아오게 된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오길 잘했다'입니다.

그곳은 그림 속의 풍경과 다르지 않았으니까요.

소박한 거리의 집과 루앙 강 주변의 다리 등이 모두 거의 그림 속의 모습 그대로 평화로웠습니다.




화가들의 초상화가 걸린 레스토랑



모레 쉬르 루앙은 프랑스와 부르고뉴 공국 사이의 국경을 구성하던 곳으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모레 쉬르 루앙의 입구인 포르트 드 사모아(Porte de Samois)로 들어가니 관광 안내소가 있습니다.         

이 건물에는 도시의 역사에 대한 개요를 제공하는 작은 시립 박물관이 있는데 금요일에서 토요일 오후에만 문을 열더군요.

그날은 화요일이라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역시 그곳의 대표 인물인 시슬리의 동상이 세워져 있어요.    




 

사모아 문
시슬리 동상




사모아 문으로 들어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슬리의 친구'라는 간판이 걸린 집이 보였어요.

집 앞에는 나폴레옹 사진과 그곳에 대한 일화가 쓰여있었습니다.


1815년 유배지였던 엘바섬 (Elbe)을 탈출한 나폴레옹 1세가 파리 튈르리 궁전으로 가기 전에 그곳에서 하룻밤을 묵었는데 그때 권력을 되찾았다고 해요.

쉽게 말해 나폴레옹의 백일천하 기간(1815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엘바 섬에서 빠져나와 파리에 도착한 1815년 3월 20일부터 루이 18세가 복위된 7월 8일까지의 기간과 그동안의 사건)이 시작되기 하루 전 날을 그곳에서 지낸 것입니다.

단 하루지만 큰 의미를 갖고 셈이지요.

그가 묵었던 방의 창문 아래에 1815년 3월 19일부터 3월 20일까지 묵었던 방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이 묵었던 집에 대한 설명


1815년 3월 19일-3월 20일 나폴레옹이 이 방에 있었다.




12세기에 건축된 모레 쉬르 루앙 노트르담 교회가 보입니다.

성당에 들어가면 꼭 눈여겨보는 것이 파이프 오르간입니다.

이곳에는 모양과 컬러가 다른 곳과는 달라 보이는 파이프 오르간이 있는데요.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르네상스 오르간이며 1840년에 역사적인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오르간의 아래 동물 모양의 나무 조각의 명칭과 설명이 써진 안내문도 있더군요.


고흐가 죽기 전에 살았던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성당이 생각납니다.

고흐가 그곳 성당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요.

쁘띠 팔레에 피사로의 모레 쉬르 루앙 성당이

바로 그곳이었습니다.




시슬리 <모레 쉬르 루앙 성당>
고흐 <오베르 쉬르 우아즈 성당>
파이프 오르간
조각의 설명



로마네스크 양식의 인상적인 정사각형 타워가 보였는데요.     

모레 쉬르 루앙 동종이라는 이름의 이곳은 프랑스의 왕들이 퐁텐블로에 정착하기 전인 1150년경에 지어진 마지막 중세 성이었습니다.

약 300년 동안 주립 교도소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사유 재산이 되었다고 합니다.



Le Donjon





사실 나는 시슬리가 살았던 집을 찾는 중입니다.

그 성에서 아주 가까운 거리에 그가 살았던 집이 보였습니다.

지금은 누군가의 집이 되었기에 방문을 할 수는 없고 그저 그가 그곳에서 살았다는 안내문만 쓰여있을 뿐이에요.

그리고 근처 골목에는 그가 그렸던 그곳의 풍경화 한 점을 발견했습니다.


 


시슬리사 죽을 때까지 살던 집
인상파 화가 시슬리가 이 집에 살다가 1899년 1월 29일 사망했다.
시슬리가 1872년, 1892년 그린 골목 풍경화
그림이 그려진 골목(2023년 10월 16일)



모레 수르 루앙은 작은 마을이라 조금 걷다 보니 부르고뉴 성문이 보였습니다.

성문 밖으로 나가니 드디어 시슬리의 풍경화가 펼쳐집니다.

루앙강에는 백조들이 여러 마리 있습니다.

그곳을 배경으로 한 그림 안내문이 있었어요.



부르고뉴 성문
부르고뉴 성문
그림의 배경이 된 길거리 모습




시슬리는 영국인 부모 사이에서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당시 프랑스는 출생한 국가의 국적이 부여되는 방식을 따르지 않았는가 봅니다.

시슬리는 프랑스에서 계속 살았지만 죽을 때까지 영국 국적을 유지했다고 해요.

평생 동안 여러 차례 프랑스 국적을 신청했지만 매번 거절당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아버지 윌리엄 시슬리는 실크 사업을 하는 경영자였고, 그의 어머니는 교양 있고 품위가 넘치는 음악 감정가였다고 합니다.

요즘 하는 말로 금수저로 태어난 거죠.

그의 부친은 시슬리가 경영과 영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런던으로 보냈습니다.

시슬리는 런던의 내셔널 갤러리를 방문한 후 아마추어로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시슬리는 부유한 아버지의 재정적 지원을 받으며 예술가의 길을 갈 수 있었지요.

그는 1862년부터 그는 인상파 운동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해나갔습니다.


1866년에 시슬리는 모델이었던 외젠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그녀를 탐착지 않게 여겼지요.

그 무렵 그의 어머니가 사망했습니다.

부모의 반대로 결혼식을 하지 못한 두 사람은 동거를 하여 1867년에 아들, 1869년에 딸을 낳았습니다.




시슬리와 그의 아내(르누아르, 188년)



아버지의 지원으로 근근이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지만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870년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전쟁이 시작되고 부친의 사업은 망해버렸지요.

당시 파리 외곽에 있는 그의 집은 프로이센 군대에 의해 점거되어 약탈당했고 그의 초기 그림 수백 점이 도난을 당했습니다.

시슬리는 이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그림을 팔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좀처럼 팔리지 않았지요.

고흐가 생전에 딱 한 점의 그림을 팔았던 것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대부분의 인상주의 동료들과 달리 돈벌이가 되는 인물화를 거의 그리지 않았습니다.




알프레드 시슬리(르누아르)



간신히 생계를 이어가던 그들은 더 이상 파리에 살 여유가 없었지요.

물가가 더 저렴한 시골 마을을 찾아 2년마다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 1882년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작업하던 퐁텐블로(Fontainebleau) 숲 인근의 모레 수르 루앙에 장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를 둘러싼 풍경, 즉 교회, 다리, 강, 들판, 다양한 계절과 나무를 그렸지요.     

인상주의 철학에 대한 시슬리의 헌신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인상주의 전시회와 살롱에 자신의 그림을 출품했지만 미술 평론가들은 그의 그림을 경멸했고 그의 작품을 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시대 인상파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고 그의 재능을 인정했습니다.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와 같은 인상파 동료들에게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시슬리의 그림은 항상 예외적이었지요.     

시슬리가 간과된 것에 대한 한 가지 이론은 그가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가 아닌 영국인으로 취급받았다는 겁니다.

       

1897년 58세의 시슬리는 오래도록 미루었던 아내와 결혼식을 올렸고 1년 뒤인 1898년,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다시 1년 후인 1899년 1월, 시슬레 역시 인후암에 걸렸습니다.

친구였던 모네에게 자신이 죽은 뒤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세상을 떠났지요.     

모네는 시슬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화상 조르주 프티(Georges Petit)에게 시슬리의 작품 경매를 열도록 독려했습니다.

그가 죽은 지 불과 1년 후인 이 경매에서 '포트 말리의 홍수'가 43,000프랑에 팔렸습니다.

시슬리가 생전에 판매한 27점의 작품 총액이 약 90,000프랑이었던 감안 하면 어마어마한 가격에 팔린 것이죠. 현재 시슬리의 그림은 100억이 넘는 금액에 판매되고 있습니다.




포트 말리의 홍수(1897년)



시슬리는 약 900점의 유화를 남겼는데 그중 수 백점의 행방을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림 중 많은 부분을 집세와 식비를 지불하기 위해 모레 쉬르 루앙의 마을 사람들에게 헐값에 팔았거나 물물교환했을 수 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고 합니다.

만일 그렇다면 그의 그림이 벼룩시장에서 발견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시슬리는 모레 쉬르 루앙에서 살았던 20년 동안 루앙 강을 따라 그림을 그렸습니다.

곡선으로 구부러지는 운하와 제방에 늘어선 포플러나무들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곤 했지요.

시슬리의 그림에는 늘 하늘이 보입니다.


그는 평론가에게 말하길

“하늘은 단순한 배경이 아닙니다. 그 평면은 깊이를 주고(하늘에는 단단한 땅뿐만 아니라 평면도 있기 때문입니다), 구름의 모양은 그림에 움직임을 부여합니다. 푸른 하늘 위에 뭉게구름이 멍하니 떠다니는 여름 하늘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과연 무엇일까요? 얼마나 놀라운 움직임이고 은혜입니까! 동의하지 않나요? 그들은 바다의 파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항상 하늘부터 그리기 시작합니다”     


시슬리에 대한 문서가 거의 없고 작품에 대한 스케치북 한 권만 남겼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습니다.



The bridge at Moret(1891년)
Moret 다리











아래 사진은 이번 여행 중 미술관에서 찍은 시슬리의 그림과 모레 쉬르 루앙에 살던 시절 그려진 그림들입니다.

언제나 하늘부터 그린다는 화가의 생각을 들여다봅니다.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는 편인데 화가의 시선으로 본 하늘은 다름을 느낍니다.




시슬리 <오르세 미술관>
시슬리 <오르세 미술관>
시슬리 <오르세 미술관>
시슬리 <쁘띠 팔레>
 Les Bords du Loing 1897
 The Loing Canal at Moret, 1892
The Lane of Poplars at Moret-Sur-Loing, 1888
Countryside near Moret, 1885
Loing Dam at Saint-Mamme, 1885
Loing Canal, 1885
Banks of the Loing at Saint-Mammès, 1885
The Port of Moret-sur-Loing, 1884
A path at Les Sablons,1884
Effet de Neige a Louveciennes



시슬리가 죽기 전 1899년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은 웨일스의 레이디스 코브(Lady's Cove, Wales)입니다.

자연의 빛이 만들어내는 색감과 분위기에 각별히 신경을 쓰던 인상파의 대표 화가인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은 상상 속에서 그려졌습니다.

병중에서도 여전히 야외에서 작품을 그리던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작품이 웨일스에 있는 해안가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생 프랑스에서 영국인의 국적으로 고달프게 살아온 자신의 심경을 그린 게 아닐까 하는 상상을 해봅니다.



     

시슬리 마지막 작품 레이디스 코브, 웨일스(1899)




이제 파리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그런데 아쉽습니다.

포플러 나무가 늘어서 있는 루앙 강변, 200년 넘게 그곳을 지켜 온 건물들, 그리고 시슬리가 가장 좋아하고 중요했던 하늘을 더 바라보고 싶었습니다.

주변을 돌아보니 로터리에 허름한 타바키가 보이더군요.

중국인 부부가 주인인데 아메리카노를 잘 모르더군요.

옆에 서 있던 손님이 대신 전해줍니다.

'그랑데, 그랑데 카페'

커피잔을 들고 나와 야외 테라스의 부르고뉴 성문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지요.


우리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그림 같다'라고 합니다.

그 말은 실제 보이는 풍경보다 그림이 더 아름답다는 뜻일까요?

'바르비종과 모레 쉬르 루앙'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 속에서 보낸 아름다운 하루였습니다.


모레 베누 레 사블롱 기차역까지는 약 3km, 또 열심히 걸어야지요.

그곳에서 파리 리옹역까지 기차를 타고 가서 메트로를 두 번 타야 집에 도착합니다.

메트로 두 번, 기차 세 번, 버스 두 번 총 아홉 번의 탈 것을 이용한 일정이 녹록지 않지만 만족합니다.


'하고 싶다'

생각이 들면 특히 여행지에서는 더더욱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 그게 나니까요.



비 내리는 날의 모레 쉬르 루앙 <피사로,1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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