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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11. 2023

날이 맑아서

15. Monmartre






'맑다'

이 말이 이렇게나 좋은지 모르고 살았습니다.


눈이 맑다

미소가 맑다

공기가 맑다

물이 맑다

소리가 맑다

그리고

날이 맑다


온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거나 파란 하늘이 잠깐 보였다가 이내 스프레이 같은 비가 내리기도 했습니다.

비를 좋아합니다만 여행지에서 매일 만나는 비는 뭔가 한쪽 어깨를 쳐지게 만들었지요.

우산은 필수로 가지고 다녀야 했고 어떤 날은 아예 레인 코트를 입고 나가기도 했습니다.  

파리에 도착한 지 14일째 되던 날, 처음으로 맑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날이 맑으니 몽 마르트르에 올라가 보자.'


‘몽(Mont)은 '산', 마르트르(martre)는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그곳은 파리의 유일한 산으로 높이가 131m밖에 안 돼서 산이라는 말이 무색한 작은 언덕입니다.

두세 번 가보았지만 그때마다 놓친 곳이 있었어요.

지도를 보고 동선이 꼬이지 않게 순서대로 스마트폰에 메모를 했습니다.


1. 사랑의 벽 The Wall of Love    

2. 세탁선 bateau lavoir

3. 물랭 드 라 갈라트 moulin de la galette

4. 벽을 뚫는 남자 le passe muraille

5. 라 메종 로즈 la maison rose

6. 몽마르트르 박물관 musee de montmartre

7. 카페 르누아르 cafe Renoir

8. 테르트르광장 place de Tertre

9. 사크레쾨르 성당 basilique due sacre coeur

10. 물랭루주 Moulin Rouge



메트로 12호 아르누보 건축의 걸작으로 불리는 Abbesses 아베스역 입구



'가는 날이 장날이다' 라더니 <사랑의 벽>은 임시 휴업으로 문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 벽에는 312가지의 표현으로 사랑하는 말이 쓰여 있는데요.

UN에 등재되어 있는 196개의 나라 언어가 모두 있다고 합니다.

프러포즈나 웨딩 촬영 장소로도 유명해요.

멀리서나마 한글로 써진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글씨를 찾았습니다.

그 벽을 만들기 위해 수 백명의 사람들을 방문하며 가장 낭만적인 단어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또 여라 나라의 글씨를 수집하였다는 어떤 사람의 이야기가 있지만 생략하겠습니다.




철문 사이로 폰을 집어넣어 찍은 사랑 해 벽



몽마르트르의 예술가들에 대한 책이나 자료들을 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 '세탁선 (Bateau-Lavoir)',

그곳은 몽마르트르 중턱에 있는 허름한 목조 주택입니다.

당시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브라크, 모딜리아니 등 가난한 예술가들이 그림을 그리며 함께 살았습니다.

피카소는 그곳에서 여러 작품을 그렸는데 <아비뇽의 처녀> (1907년)가 대표적입니다.

어둡고 더러운 이 집은 폭풍우가 치는 날이면 흔들리고 삐걱거리는 소리가 더 심하게 들렸답니다.

그것은 마치 센 강에서 빨래를 해주는 배처럼 시끄럽고 흔들거리는 것 같다고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곳에선 여전히 제2의 피카소를 꿈꾸는 예술가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해요.


거의 매일 비가 내리니 행여나 젖을까 묵직한 카메라 꽁꽁 싸고 지퍼백에 넣은 후 백팩에 메고 다녔습니다.

꺼내보지도 못하고 들어오는 날이 허다했지요.

그런 날 집에 들어오면 어깨가 더 아픈 것 같아 백팩을 침대위에 내동댕이치곤 했습니다.

벤치에 앉아 주섬주섬 카메라를 꺼내는데 약간의 흥분이 되었지요.

그건 바로 어른거리는 그림자 때문입니다.

멋있지도 예쁘지도 특이하지도 않은 작은 건물 유리창에는 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림자가 있었어요.

햇빛이 없는 거리를 거닐다 보니 하찮게 여길 수 있는 그 그림자가 너무도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세탁선



《 아비뇽의 처녀들 》( Les Demoiselles d'Avignon 피카소
데미안 엘위스 그림 피카소의 바토 라부아르 스튜디오 , 2008




모네가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따라 그림을 그렸던 심정이 이런 걸까 싶습니다.

오랜만에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서 빛과 그림자를 보니 공진단을 먹은 것처럼 힘이 났지요.

내가 바라던 것은 바로 그 사소한 그림자가 있는 피사체였습니다.

그림자라는 단어 또한 맑음 만큼 아름답습니다.

맑음 같은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으니까요.


네덜란드에서 온 가난한 고흐, 부잣집 도련님 로트렉, 르누아르, 피사로 등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춤과 수다를 즐기던 물랭 드 라 갈레트( Moulin de la Galette)에 왔습니다.

그들은 풍차로 갈아낸 밀가루나 메밀가루로 만든 갈레트( galette)와 와인, 또는 압생트를 즐기며 그림을 그렸지요.

갈레트는 쉽게 말해 프랑스식 크레페나 팬케이크입니다.

얇게 부친 전병 안에 햄이나 치즈, 달걀 등을 넣어서 만드는데 간편하게 먹기 좋아요.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갈레트>도 그때 그려진 그림입니다.


 


물랭 드 라 갈레트(반 고흐, 1886 베를린 미술관)
물랭 드 라 갈레트
물랭 드 라 갈레트(르누아르 1876, 오르세 미술관)




돌담에 반쯤 갇힌 남자가 있습니다.

'벽을 통과하는 사람(Le Passe-Muraille)'은 프랑스 작가 마르셀 에메의 소설에 등장하는 벽에 갇힌 남자를 표현한 독특한 조각입니다.


소설 '벽을 통과하는 사람'의 주인공 뒤티일은 소심하고 겸손한 사무원입니다.

그는 직장 동료와 상사로부터 늘 핀잔과 놀림을 받지요.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벽을 통과하고 통과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뒤티일은 그 힘으로 직장 동료와 상사로부터 받은 굴욕에 복수를 하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이 조각처럼 그들을 벽에 가두는 거지요.

그 소설 속 주인공을 모티브로 만든 조각이라는 설명이 벽면에 붙어 있습니다.



벽을 통과하는 사람(Le Passe-Muraille)
1989년 2월 25일,  Marcel Aymé 소설  Jean Marais 조각



물랭 드 라 갈레트 앞에 있을 때 한 무리의 단체 관광객이 다가오기에 서둘러 그곳을 떠났지요.

그리고 벽을 통과하는 사람 앞에서 사진을 찍는데 또다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다짜고짜 사진을 찍고 있는 나를 무시한 채 조각을 점령하고 손을 잡거나 포즈를 잡으며 사진을 찍습니다.

디테일하게 찍어보고 싶었지만 서둘러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티켓은 프랑스어이고 프랑스에 왔으면 최소한의 에티켓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지요.

같은 나라 사람으로 민망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이드를 대동한 여행자들이 따라오는 걸 보면 내가 계획한 코스가 나쁘지는 않은가 보다 싶었습니다.



핑크색의 소박하고 작은 집이 보입니다.

그냥 예쁜 카페려니 하며 지나치기 쉬운 이 집은 르누아르, 툴르즈 로트렉, 드가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이 살았던 라 메종 로즈(La Maison Rose)입니다.

그녀 역시 화가이고 그녀의 아들 위트릴로 역시 화가인데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았지요.

수잔 발라동에게는 수없이 많은 화가 애인들이 있었기에 아버지가 누군지 불분명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위트릴로의 그림을 보면 분명 재능 있는 화가의 피를 물려받았지 싶습니다.

이번 여행에서 새삼 위트릴로의 여백이 많으며 단순하고 차분한 그의 그림이 좋아졌답니다.



 

몽마르트르(모리스 위트릴로, 1937)
라 메종 로즈(La Maison Rose) 현재는 레스토랑으로 운영 중
라 메종 로즈(La Maison Rose)
몽마르트르(모리스 위트릴로)



높은 돌담 위로 무성한 담쟁이덩굴이 뒤덮인 집 옆으로 조약돌이 깔린 언덕을 올라갑니다.

한때 르누아르가 작업했던 주택과 정원이 있으며 이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전시해 놓은 몽마르트르 박물관 이 보입니다.

Steinlen의 특별 전시회가 있더군요.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었습니다.

티켓을 구입하기 전에 화풍이 어떤지 검색을 해보았지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아르누보 화가이자 판화 제작자로 우리에게 친숙한 검은 고양이 등 포스터를 그린 화가였어요.

별로 내키지 않아 들어가지 않기로 했습니다.




몽마르트르 언덕
몽마르트르 언덕
몽마르트르 언덕
몽마르트르 박물관, Steinlen의 캣츠



몽마르트르의 하이라이트 광장은 테르트르(Place du Tertre)입니다.     

이곳은 언덕에서 가장 높은 곳(tertre)이라는 뜻처럼 몽 마르트르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한 광장으로 늘 붐비는 곳이지요.

'반 고흐', '피카소'와 같은 세계적인 화가들이 이름을 알리기 전에 주로 작업했던 곳이며, 현재도 약 150여 명의 무명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후기인상파 화가 '에두아르 레옹 코르테스'의 작품 '테르트르 광장'의 배경이 된 곳으로, 명화 속에서만 봐왔던 광장 풍경과 골목 곳곳에 남아있는 그들의 흔적을 찾아보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합니다.

초상화의 모델이 되어 앉아있는 어린아이와 백발이 성성한 화가의 분주한 손놀림을 구경하는 것도 재밌습니다.

오늘은 특히나 햇살이 맑아서 모델이나 화가의 마음도 가볍겠지요.

     



Edouard Léon Cortès 테르트르 광장
테르트르 광장(Place du Tertre) 위트릴로







맘껏 찍었습니다.

여행 중의 사진 촬영은 나의 큰 기쁨입니다.

주로 낡은 벽과 창문 같은 걸 즐겨 찍지만 오늘은 그림자만 봐도 기분이 좋습니다.

검은 고양이와 아코디언을 가슴에 안고 있는 악사의 눈빛이 슬퍼 보입니다.

에디트 피아프의 장밋빛 인생이 가슴을 후벼 파듯 처절하게 들려요.

저 악사의 삶도 여기 머물던 가난한 화가들의 생과 비슷하겠지 싶습니다.

동전 하나를 던져주고 사진을 몇 장 찍는 동안 그는 끝내 멍한 시선을 바꾸지 않았지요.













1793년에 오픈한 라 메르 카트린(La Mere Catherine)’이라는 레스토랑이 보입니다.

1814년 프랑스가 러시아의 침공을 받았을 때 이 레스토랑을 즐겨 찾던 러시아 병사들이 이렇게 외쳤답니다.

‘비스트로, 비스트로’, 러시아어로 비스트로는 '빨리'라는 뜻인데요.

오늘날 레스토랑을 뜻하는 프랑스어는 그렇게 시작되었답니다.



1793년 오픈한 라 메르 카트린(La Mere Catherine)
1793년 오픈한 라 메르 카트린(La Mere Catherine)




그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카바레 '오 라팽 아질(Au Lapin Agile)'이 있습니다.

화가 앙드레 질이 1880년에 간판에 그린 토끼가 이곳의 이름이자 마스코트가 되었는데요.

냄비에서 막 튀어나오는 토끼는 붉은 나비넥타이를 매고 술병을 들고 있으며 금방이라도 테이블로 술병을 나를 듯합니다.

라팽은 토끼라는 뜻이며 아질은 그림을 그린 앙드레 질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라펭 아질 간판
라팽 아질(피카소)
라팽 아질




파리의 가장 높은 곳에 세워진 사크레쾨르 성당(Basilica of Sacre-Coeur de Montmartre),

전과 달리 성당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의 줄이 너무 길어서 포기했습니다.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프랑스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뒤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고양시킬 목적으로 모금한 돈으로 만들어진 성당입니다.

대부분 성당보다는 그 앞 계단에 앉아 파리 전경을 즐기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죠.

버스킹의 명소이기도 하며 장미를 주거나 손목에 실 팔찌를 친근하게 걸어주고 돈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유명합니다.

파리는 2024년 하계 올림픽 준비로 한창입니다.

파리 경찰청장은 '범죄에 맞서 싸우고 말썽꾼들을 해산시키기 위해 현장을 포화시킬 것'이라고 발표했고 소매치기, 무단 노점상, 공연자를 단속하기 위한 경찰 인력을 늘렸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지요.     




몽 마르트르 사크레쾨르 성당(위트릴로)
몽마르트르의 벽화(르누아르, 고흐)
몸마라트르의 벽화(모네, 위트릴로, 피카소, 툴루즈 로트렉)












아몬드 볶음 판대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는 노점상
사크레쾨르 성당
푸니쿨라를 타고 내려갈 수 있지만 계단으로 내려감
사크레쾨르 성당
물랭 루주



파리의 빅맘마 그룹의 레스토랑 중 하나인 핑크맘마는 몽마르트르와 가깝습니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실내 장식이 예쁘다고 소문이 난 곳이지요.

가격도 나쁘지 않고 음식도 맛있다는 평을 본 적이 있어서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역시 대기줄이 길더군요.

하지만 혼자인 나는 금방 안내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곳은 1,2,3층 모두 레스토랑으로 운영하는데 3층이 가장 아름답다고 해요,

하지만 내가 안내를 받은 자리는 1층 카운터석입니다.

예약을 하고 가더라도 1인은 영락없이 카운터석입니다.

카운터석은 둥그런 바 스탠드나 별도의 공간에 마련된 기다란 테이블에 높은 의자에 걸터앉아야 합니다.

습관이 되지 않아 처음에는 불편했으나 몇 번 다니다 보니 적응이 되더군요.


파리의 레스토랑은 따로 메뉴를 준비하지 않는 곳이 많았습니다

테이블에 있는 QR코드를 스캔해서 선택하고 결재까지 스마트폰으로 하는 경우도 있더군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카드 수수료가 부과되기에 그냥 현금 결제를 했습니다.

큼지막한 트러플이 올려진 파스타는 꾸덕하니 맛은 있었으나 조금 식은 상태에서 서브가 되어 아쉬웠습니다.


식사를 끝내고 3층까지 올라가 봤습니다.

계단에는 오래된 사진이 빼곡하게 걸려있고 2층과 3층은 인테리어가 사뭇 다르더군요.

밖으로 나오니 대기하는 사람들의 줄이 무척 길었습니다.


이게 얼마 만에 만난 맑음인데 벌써 집으로 갈 수는 없지요.

내친김에 트로카데로로 가보자며 메트로를 타러 갑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밖에서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습니다.

후드득후드득 ///////


 


카운터 석(QR코드를 스캔하여 메뉴를 보라는 안내문이 있다)
트러플 파스타
핑크 마마 2,3층과 계단 장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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