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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12. 2023

제비꽃 여인 베르트 모리조

16. Musée Marmottan Monet







여행을 시작하기 전 예약이 필요한 미술관들의 리스트를 작성했습니다.

그중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 있었어요.

게다가 그곳은 뮤지엄 패스가 적용되지 않는 곳이었습니다.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

모네 이름이 붙어 있으니 가봐야겠군 하며 홈페이지를 찾아 들어가서 깜짝 놀랐지요.


그곳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모네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인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계기의 그림 <일출> 내가 좋아하는 <생 라자르 역> <루앙 대성당> < 아르장퇴유의 풍경> 등 300개가 넘는 인상파 및 후기 인상파 그림이 포함되어 있었지요.



그게 다가 아닙니다.

내가 파리에 머무는 기간 동안  베르트 모리조와 18세기 아트(Berthe Morisot and the Art of the 18th Century)라는 타이틀의 특별전이 열릴 예정이더군요.(2023년 10월 18일부터 2024년 3월 3일까지)

최초의 여성 인상파 화가인 베르트 모리조(1841-1895)의 작품 중 프랑스 및 국제 박물관에 소장된 65점의 예술 작품과 개인 소장품이 처음으로 그곳에 전시된다는 거였습니다.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을 많이 접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화풍은 알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좋아하는 여성 화가였죠.

마네가 그린 그녀의 초상화도 여러 작품 알고 있고 특히 영화 '마네의 제비꽃 여인,베르트 모리조''을 통해 두 사람의 관계를 알 수 있었습니다.

모네도 모네지만 베르트 모리조니까 당연히 가야 합니다.

티켓은 16유로, 특별전이 열리는 첫 날 첫 타임으로 예약했습니다.



이 박물관은 클로드 모네의 둘째 아들이자 유일한 상속자인 미셸 모네(Michel Monet)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을 기부한 결과입니다.(1966년)

그러면 이름이 왜 마르모탕 모네인지 궁금했지요.

   

10월 18일, 그날도 역시나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습니다.

불로뉴 숲(Bois de Boulogne)을 따라 걸어가는 길이 아름다웠습니다.

인적은 드물었는데 왠지 부자는 아니지만 고상한 지성인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길 가장자리에 있는 건물에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이 그려진 현수막이 걸려있는 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우산을 받쳐든 사람들이 대여섯 명 줄을 서 있더군요.

가까이 가서 보니 모두 나보다 노인들입니다.



라넬라 Ranelagh 정원의 La Fontaine 동상
볼로뉴 숲의 라넬라 정원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11월 9일, 두 번째 방문)



어느 미술관을 가나 그림을 보러 오는 이들은 젊은 여행자들 빼고는 대부분 노인들이었습니다.

미술관에 따라 연간 회원권을 구입하면 1년 내내 아무 때나 미술관에 갈 수 있는 시스템이 있어요.

오르세 미술관은 40유로, 루브르 박물관은 60유로로 연간 회원권의 값이 비싸지 않았습니다.

노인들이 좋아하는 그림 앞에 앉아 여유를 즐기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마로모탕 모네 미술관이 생기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이 건물은 원래는 프랑수아 크리스토프 에드몽 켈러만 공작의 사냥 별장이었습니다

공작이 죽은 후 별장을 유지할 여유가 없었던 부인과 딸은 1882년 쥴 마르모탕에게 팔았습니다.

쥴 마르모탕은 변호사와 시장을 역임하면서 모은 재산을 예술품을 수집하는데 쏟았고, 자신의 외아들인 폴 마르모탕에게 이 저택과 자신의 컬렉션을 물려줬지요.      

폴 마르모탕 역시 아버지를 능가하는 예술애호가인 데다가 부인과는 자식 없이 이혼했기 때문에 고독한 여생을  역사와 예술을 연구하는데 대부분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사망 후 저택과 저택 내부를 꾸미고 있는 모든 작품들과 소장품을 보자르 아카데미에 기증했습니다.     

보자르 아카데미는 1934년 마르모탕 미술관으로 이 저택을 대중에게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1966년 클로드 모네의 유일한 상속자였던 막내아들 미셸 모네가 가지고 있던 아버지 작품을 마르모탕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그 이름이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여러 기증자들을 통해 인상파 컬렉션은 더욱 풍성해지고 0층 한쪽에 베르트 모리조 전시실이 작게 만들어지게 되었지요.




미술관 입구(왼쪽, 폴 마르모탕, 오른 쪽, 줄 마르모탕))



소지품 검사를 마치고 들어가 레인 코트를 백팩에 넣어 락커룸에 보관하고 들어갔습니다.

처음에 들어간 곳은 베르트 모리조의 특별전시실이 있는 0층이었습니다.

베르트의 작품을 다 둘러보면 자연스럽게 지하 1층으로 연결되더군요.

지하 1층을 다 보고 나서 다시 0층으로 올라오면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 줄과 폴의 소장품, 모네의 자녀들이 어렸을 때 그려진 초상화들이 있는 공간을 둘러보게 됩니다.

그리고 계단을 따라 1층으로 올라가면 쥴과 폴의 컬렉션이 있는 방과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 있는 방, 가장 안쪽에는 마르모탕이 소장하고 있는 베르트 모리조의 작품이 몇 점이 걸려있는 방이 있었습니다.



베르트 모리조 특별전시실은 이 한 장의 그림과 두 개의 부채가 걸린 작은 방에서 시작합니다.



Au bal (무도회에서) 1875년
그림 속 여인이 들고 있는 부채



1875년에 그려진 Au bal(무도회에서)라는 작품입니다.

그녀는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며 장갑을 낀 왼손에 부채를 쥐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떤 파티를 위해 화려하게 옷을 입고 있으며 아마도 나가기 전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깨를 드러낸 숄더 드레스와 머리와 가슴의 장식이 절제되고 화려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러나 그림을 본 순간 얼어붙듯 압도적이었던 것은 그녀의 시선입니다.

첫 그림에 발이 묶여 한동안 서있었습니다.




부지발 정원 Garden in Bougival 1884
장미정원 The roses in the garden 1884
 Jeune Femme a sa toilette 1875
Young girl in a ball gown, 1879
La Fable 1883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1841년 1월 14일~1895년 3월 2일)는 프랑스 부르주에서 태어났고 그녀가 12세 때 파리로 이주해서 죽을 때까지 살았습니다.

숙련된 건축가인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국립 감사원에서 고위 행정관으로 일을 하게 되어 파리로 이주하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 역시 좋은 가문의 딸로 모리조는 부족할 것 없이 부유한 환경에서 부모님의 관심과 사랑, 격려 속에서 자랐습니다.



베르트와 자매들은 최고의 교사들로부터 상류 부르주아 여성들에게 적합한 완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 시대에 태어난 여성들은 직업을 위해서가 아니라 좋은 결혼을 할 수 있는 덕목을 배운 것이죠.

그들이 받은 교육은 피아노와 그림 수업 등이었습니다.

개인 교사와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 카피리스트로 등록을 하고 명화를 보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지요.

심지어 딸들이 편하게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집에 스튜디오를 마련해주기도 했습니다.


그때 모리조는 풍경화가인 코로를 비롯한 다른 예술가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고작 23세인 1863년, 파리 살롱은 그녀의 풍경화 두 점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젊은 여성으로서는 처음 있는 성취였습니다.

그 후 그녀의 그림은 몇 년 동안 살롱에 계속 전시되었고 지속적인 호평을 받았습니다.



Winter aka Woman with a Muff 1895
자화상 Self Portrait, 1885




1868년 스물여덟 살의 모리조는 파리 아방가르드 회화의 강력한 지도자인 서른여섯 살의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를 만났습니다.

마네와 모리조는 곧바로 친해졌고, 서로의 작업에 대해 피드백을 주고받기 시작했습니다.

두 사람은 연인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으나 마네는 그들이 만났을 때 이미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마네의 아내가 된 사람은 마네와 그의 동생 외젠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도록 고용된 피아노 교사 수잔(Suzanne Leenhoff 1829-1906)입니다.

수잔은 마네보다 세 살 연상으로 마네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863년에 결혼했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그 시대의 플레이보이였으며 미혼의 여성들과 교제를 나눈 것은 물론이요, 매춘부들과의 관계도 이어갔습니다.

그러므로 마네와 모리조가 열정적인 관계를 가졌는지의 정확한 진위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네는 모리조를 모델로 자주 그림을 그렸고 모리조의 편지를 통해 그녀가 마네를 깊이 사랑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네와 수잔 마네, 드가 1868
피아노를 치는 마네 부인 madame manet au piano 1892
Portrait de Berthe Morisot étendue 마네, 1873
Berthe Morisot au Bouque de Violettes , 마네 1872.
The Balcony 마네, 1868




1874년, 모리조는 당시로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3세에 결혼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이 된 사람은 에두아르 마네의 남동생 외젠 마네(Eugène Manet)입니다.

그러니까 마네는 모리조에게는 아주버님이 되었고, 마네에게는 모리조가 제수씨가 된 것이죠.

모리조는 이미 유부남인 마네와 결혼할 수 없으므로 그 차선책으로 동생을 선택한 거라는 주변의 수군거림도 없지 않았습니다.

마네는 모리조가 외젠과 결혼한 후에는 그녀의 그림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에드가 드가는 두 사람의 결혼 선물로 외젠의 초상화를 선물했습니다.




드가가 결혼 선물로 그려준 외젠 마네 초상화



외젠 역시 화가였지만 아내 베르트를 돕기 위해 자신의 경력을 포기하고 그녀를 적극 뒷바라지 했습니다.

게다가 그녀가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도록 결혼한 후에도 남편의 성으로 바꾸지 않고 베르트 모리조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도록 해주었지요.

하지만 상류층 여성으로서의 베르트 모리조는 프로 예술가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그 시대의 다른 여성들처럼 그녀도 단지 하나의 여가 활동을 하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미술 평론가이자 수집가인 테오도르 뒤레는 모리조의 상류층 계급이 그녀의 예술적 재능을 가렸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실력을 잘 알고 있었지만 여전히 아마추어로 비치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했습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최고의 미술 교육 기관인 에콜 데 보자르(École des Beaux-Arts)로의 입학도 불허되었습니다.


1874년 12월 결혼식을 올린 다음 여름,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와 남편 외젠 마네는 와이트 섬으로 휴가를 떠났습니다.     

베르트는 남편 외젠 마네의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이 그림에서 베르트는 전통적인 장면을 뒤집었습니다.

그녀는 실내에서 창밖으로 항구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와 여자와 그녀의 아이가 밖으로 산책하는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와이트 섬의 외젠 마네




마네와 모리조는 1878년에 딸 줄리 마네(Juli Manet)를 낳았습니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4년 후에 얻는 귀한 딸이었지요.

그리고 딸 줄리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모델이 되었습니다.

모리조는 줄리가 열두 살이 될 때까지 거의 50개의 캔버스에 외동딸 줄리를 그렸고 그녀의 경력 중 가장 광범위한 프로젝트를 구성합니다.

마치 사진으로 성장 앨범을 만들듯 그녀가 커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넘겼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정원에서 놀고 있는 모습,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 악기를 연습하는 모습 등은 모리조가 딸에 대해 가졌던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또한 모리조는 줄리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홈 스쿨링을 했습니다.

딸의 지적, 창의적 발전을 직접 감독했으며, 피아노와 바이올린 교사를 고용하고,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에게 문학을 가르쳤습니다.

Julie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었습니다.'


모리조는 1890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나는 여자를 동등하게 대하는 남자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내가 요구한 전부입니다. 나는 그들만큼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La fable 1853
Little girl in a blue dress, 1886
Children at the Basin, 1886
Girl Playing the Mandolin, 1890
Bois de Boulogne 1893
 Femme en gris debout,
Young Woman Watering a Shrub
Au bord du lac



폴 베를렌, 아르튀르 랭보와 더불어 19세기 후반 프랑스 시단을 주도했던 말라르메는 모리조의 친구였습니다.

모리조가 전문 화가로 인정받지 못함을 늘 안타깝게 여기던 말라르메는 그녀를 위해 그녀의 작품을 홍보했습니다.

1894년, 그는 정부 관리들에게 베르트의 그림이 유망하니 구입하라는 제안 합니다.

그 덕분에 모리조는 뤽상부르 박물관에 작품을 전시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19세기 초 파리의 뤽상부르 박물관은 그 시대에 활동하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전시했습니다.

저명한 학자들은 박물관에 전시할 수 있는 예술가를 선택할 수 있는 자격이 있었지요.

그곳은 그녀의 재능을 인정받는 이정표가 되었고 그녀를 포함한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지요. 그렇게 모리조는 대중의 눈앞에 설 수 있는 진정한 예술가가 되었습니다.



모리조는 풍경, 해변, 정원도 그렸지만 그녀의 가장 유쾌한 그림 소재는 소녀와 젊은 여성입니다.

그림 속의 주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들지요.

그녀는 지루하까?

그녀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녀는 포즈를 취하는 것을 멈추고 밖으로 나가기를 바라는 걸까?

느슨하고 빠른 붓놀림으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 임신과 모성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단계에서 여성을 묘사했습니다.     


모리조의 작품은 생전에 호평을 받았고 지금도 미술 애호가들을 기쁘게 하고 있습니다.

모두 242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대중의 취향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 결과 생애 동안에도 꽤 잘 팔렸다고 하네요.

줄리가 열세 살 때 그녀의 아버지 외젠이 세상을 떠났고, 엄마 모리조는 줄리가 열여섯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녀의 그림은 언뜻 보면 수채화처럼 맑은데 거의 유화입니다.

그리고 파스텔로 그린 그림이 몇 점 남아있습니다.



paule gobillard 1887
Orange Tree Branches
Eugène Manet et sa fille dans le jardin de Bougival
haystacks at  bougival 1883
베르트 모리조와 줄리 마네 모녀(르누아르)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요람(Cradle)입니다.

이 그림은 모리조의 언니 에드마가 얇은 베일 뒤의 요람에서 자고 있는 딸 블랑쉬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모리조의 초기 작품으로 모성이라는 주제를 다룬 첫 번째 예입니다.

1874년 인상파 전시회에서 The Cradle을 선보였는데, 이는 여성 작품으로는 최초의 전시였습니다.

비평가들이 그림의 우아함에 대해 호평했지만 판매되지 않았습니다. 그 후 베르트 모리조는 이 작품을 전시에서 철회했고 1930년 루브르 박물관에서 구입할 때까지 가족이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The Cradle 1872 오르세 미술관 2023.10.17
The Cradle 1872 사진 출처 :구글



마네의 그림 중에 거의 전시되지 않은 작품이 있습니다.

그가 모리조에게 선물로 준 제비꽃(Le bouquet de Violettes)입니다.

1872년 그려진 이 그림은 가로 27, 세로 22cm의 아주 작습니다.

마네가 모리조에게 선물로 준 작품으로 개인 소장품인데요.

줄리는 죽을 때까지 그 그림을 간직했다고 합니다.     


영화 '베르트 모리조 제비꽃 여인'에서는 제비꽃 그림에 작은 글씨가 쓰여있는데 마네가 모리조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으로 묘사되었습니다.




Édouard Manet <Bouquet de violettes>




1900년 5월 31일 파시에서 거행된 모리조의 딸 줄리 마네(왼쪽)와 어니스트 루아르(Ernest Rouart)와 그의 사촌 폴 고 빌라드(오른쪽)와의 이중 결혼식의 사진



le double marriage
베르트 모리조



지하층으로 내려가니 제일 먼저 모네의 일출이 보입니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1840~1926)는 19세기 인상주의 미술의 선구자로 프랑스 화가입니다.

파리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지요.

18세 때 화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을 만나 야외 그림을 소개했는데 모네가 남은 생애 동안 계속했던 방법이었습니다.

모네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사실적인 스타일에서 다소 느슨한 접근 방식으로 바뀌었는데요.

붓놀림이 더욱 눈에 띄고 색상 팔레트의 제약이 덜해졌습니다.

그러다가 1872년에 모네는 자신의 고향인 르아브르의 항구를 묘사한 작품을 ' 인상주의, 일출'이라는 제목으로 그렸습니다.

그리고 이 상징적인 그림은 인상주의를 탄생시켰을 뿐만 아니라 중요한 회화의 장르가 된 것입니다.



클로드 모네
sunrise impression <모네, 1872>



미술관에 갈 때마다 아쉬움이 있는데요.

그날도 그랬습니다.

그것은 액자에 끼워진 유리에 반사되는 빛,

에르미타주 미술관 같은 경우는 자연광이 너무 강해서 불편했는데요.

마르모탕은 모네의 전시실이 지하라서 그런지 불빛이 유리에 반사되어 그림이 어른어른했습니다.

물론 사람들의 그림자가 그림에 비치게 되는 경우도 있었지요.


그리고 일출 옆에는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생 라자레역도 걸려 있어요.

모네만큼 연작(시리즈) 작품이 많은 화가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수련을 비롯해 루앙 대성당, 생 라자레역, 건초더미, 포플러 나무 등이 있습니다.



Le Pont de l'Europe, gare Saint-Lazare




생 라자레 역 12개의 그림은 모두 1877년에 그려졌습니다.

다양한 대기 조건과 다양한 관점에서 연기가 자욱한 기차역 내부를 묘사했지요.

그림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면 증기를 뿜어내는 기차 소리와 주변 사람들의 소음까지 느껴지면서 그 시대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12개 중 오르세, 시카고, 런던 내셔널에 있는 세 작품을 보았는데 한 작품이 더 늘었네요.



La Gare Saint-Lazare, 오르세 미술관


La Gare Saint-Lazare, arrivée d'un train, 영국
La Gare Saint-Lazare, le train de Normandie 시카고
La Gare Saint-Lazare 내셔널 갤러리
Extérieur de la gare Saint-Lazare, effet de soleil, 개인 소장
Extérieur de la gare Saint-Lazare, arrivée d'un train, 개인 소장
Les Voies à la sortie de la gare Saint-Lazare
La Gare Saint-Lazare, vue extérieure, 개인 소장
La Gare Saint-Lazare, vue extérieure, 개인 소장
La Gare Saint-Lazare, les signaux, 하노버
La Tranchée des Batignolles, 로마




어느 날, 모네는 이웃의 농장에 쌓아둔 건초 더미를 보고 흥미를 느꼈습니다.

지금은 흔히 건초더미라고 부르지만 실제는 나중에 사용하기 위해 저장해 두었던 밀이나 보리 다발이었습니다.

모네는 야외에 자리를 잡고 그림을 그렸습니다.

두 장의 캔버스만 완성하려고 했으나, 두 장만으로는 빛의 변화를 포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는 딸에게 더 많은 캔버스를 수레에 싣고 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루가 끝나면 작업실로 돌아와 캔버스를 손질했습니다.

1890년 9월이나 10월쯤이었습니다.

모네는 매일 오전 3시 30분쯤에 일어나 캔버스와 물감을 챙겨 들고 현장으로 갔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특유의 느슨한 붓놀림을 사용하여 빠르게 작업하여 한 번에 약 10점의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건초 더미 시리즈는 수련 및 루앙 성당과 같은 다른 프로젝트와 번갈아 작업하였습니다.

하나의 캔버스가 마르는 동안 다른 캔버스에 그림을 계속 그렸던 것이죠.

이 과정은 모네가 빛과 색상의 폭에 만족감을 느꼈던 1891년 여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건초더미를 그린 주된 이유는 빛을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모네와 다른 인상파 화가들의 관심을 크게 끌었던 주제였습니다.           

건초더미는 반복을 활용하여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약간의 변화를 연구하는 그의 초기 프로젝트 중 하나였습니다.

1891년, 거의 1년에 걸쳐 제작되었고 이러한 반복을 통해 모네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주제에 대한 빛, 날씨 및 계절의 영향을 연구하여 그의 인상적인 작품에 어울리는 매혹적인 캔버스 컬렉션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건초 더미(여름의 끝)
건초 더미(안갯속의 태양)
건초 더미(일몰)
건초 더미(아침 눈 효과)
해 질 녘의 건초 더미, 서리가 내린 날씨
건초 더미(하얀 서리 효과)



1891년 여름과 가을에 그린 포플러 나무 시리즈도 있습니다.

모네는 지베르니의 집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엡테강 둑의 습지에 늘어서있는 포플러 나무들을 그렸는데 그림이 완성되기도 전에 모두 팔렸다고 합니다.



태양 속의 포플러, 1887
지베르니의 포플러, 일출
포플러 (가을)
포플러(가을)
회색 날씨의 세 그루의 나무
엡테 강의 포플러
엡테 강의 포플러
태양 속의 포플러
Portrait of Jean Monet, 1880(모네의 아들 장)
Portrait of Michel Monet(모네의 아들 미셸)
View Of The Tuileries Gardens
지베르니 센강의 지류
secret garden
지베르니 근처의 센강 지류 해돋이
Claude Monet Nympheas 1915






지하 1층 모네의 전시실에서 0층으로 올라가면 커다란 응접실과 유명한 인상파 작품들이 걸려 있습니다.




Sisley  dintorni di Moret-sur-Loing
Camille Pissarro - Les boulevards extérieurs effet de neige,1872
Auguste Renoir - Portrait de Julie Manet, 1894
Gustave Caillebotte - Rue de Paris. Temps de pluie, 1877
1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Eugune boudin Cow at Pasture
Sisley The loing canal in spring,1892
Jean Baptiste Camille Corot, The pont at Ville-d'Avray through the trees,1871

 


다시 보고 싶은 그림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베르트 리조와 모네의 그림이었지요.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을 다시 가봐야겠다 싶더군요.

파리를 떠나기 이틀 전인 11월 9일에 예약을 하고 다시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특별전이 시작되던 10월 18일보다는 관람객의 숫자가 훨씬 적었습니다.

베르트 모리조의 그림이 있는 전시실과 모네의 생 라자르 역의 그림을 보고 또 보고 했습니다.

진심으로 그런 그림 한 장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가길 잘했습니다.


비록 프린트된 그림이지만 부지발 정원 (Garden in Bougival)과 무도회에서 (Au bal)와 베르트 모리조의 도록을 한 권 샀지요.

행여나 비에 젖을까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던 지퍼백에 넣은 후 백팩을 가슴에 안고 미술관을 나섰습니다.

별장과 그들의 소장품을 내어준 마르모탕 부자, 그리고  유산으로 받은 모네의 그림을 선뜻 기증한 미셸 모네에게 감사합니다.


파리 여행하시면 이곳에 가보시길 권합니다.




The lesson in the garden, 1886
Woman and Child in the Garden 18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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