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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14. 2023

왜 죽은 생선이나 양파 따위를 그려야 해?

17. Marie Laurencin






부드러운 분홍색, 옅은 파란색, 비둘기 깃털 같은 회색, 흰색의 음영 등 파스텔컬러가 지배적인 팔레트.

묽고 옅은 색감으로 인해 수채화 같은 가벼운 분위기.

사슴 같은 얼굴형, 아몬드를 닮은 눈, 종종 흐려지는 코

순정 만화의 주인공 같기도 한 이 화가의 그림은 한 번만 봐도 기억에 남기 마련입니다.

화가는 주로 어둡고 우울한 눈을 가진 여성과 꽃과 새, 개, 그리고 기타를 그렸습니다.

누가 봐도 그 이름을 떠올릴 수 있는 작품 스타일,

그러나 호불호가 분명할 거라 생각합니다.


화가는 그림뿐만 아니라 발레의 의상과 세트 등의 디자인도 했는데요.

코코 샤넬(1883-1971) 역시 같은 회사의 오페레타 의상을 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돈과 명예를 거머쥔 샤넬은 사교계 여성들에게 인기가 있다는 이 화가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습니다.


샤넬은 오른팔에 머리를 얹고 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하얗고 투명한 얼굴에 한쪽 어깨를 드러내고 드레스를 입었지요.

그린, 블루, 핑크 컬러의 부드러운 조화는 모델의 목선을 타고 내려오는 스카프의 긴 블랙 라인으로 더욱 강조됩니다.

모델의 무릎 위에 앉아 있는 하얀 푸들, 비둘기를 향해 짓고 있는 개 한 마리 등은 화가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소재입니다.

가느다란 몸으로 아래를 지긋하게 내려다보는 시선이 매우 외로워 보입니다.

무릎에 앉아 있는 개의 표정은 우울함을 더합니다.



샤넬은 <코코 샤넬 초상>을 본 후 되돌려 보냈습니다.

그림 값도 지불하지 않았습니다.

자신과 닮지 않았다는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화가는 샤넬의 초상화를 수정하지도 새로 그리지 않고 원본 대로 놔두었습니다.

이 화가는 샤넬(1883-1971)과 동갑내기인 마리 로랑생((1883~1956)입니다.



    

Portrait de Mademoiselle Chanel - Marie Laurencin Musée de l'Orangerie




오랑주리, 오르세, 쁘디 팔레,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로랑생의 그림이 있습니다.

파스텔 톤의 수채화 같이 맑은 색채와 유려한 선, 단순화된 형태, 특히 보라색과 분홍색, 청색 계열이 주조를 이루는 특유의 몽환적인 분위기는 프랑스적 감성을 가장 훌륭하게 구현한 화가로 인정받고 있지요.


동시대의 모리트 베레조와 비교하면 그녀는 그림 판매 운이 좋았습니다.

1907년, 24세의 화가는 몽마르트르의 갤러리 클로비스 사고(Gallery Clovis Sagot)에서 열린 살롱 데 앙데팡당에서 데뷔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검은색과 흰색을 주로 사용한 아래 그림은 바로 판매되었습니다.

그녀의 첫 작품입니다.




<아티스트 그룹, 1908>



1908년 파리는 가장 총명하고 야성적인 작가와 예술가들이 출연하는 인기 있는 연속극이었고, 마리 로랑생은 이 그림에서 그 이야기를 완벽하게 전달합니다.


왼쪽의 파란색 정장을 입은 피카소는 그의 원시주의적 추상에 고개를 끄덕이는 표정을 짓고 있고, 그림의 오른쪽에는 피카소의 애인이자 모델인 페르낭드 올리비에가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중앙에 책을 들고 서있는 남자는 당시 화가의 애인이었던 기욤 아폴리네르, 그리고 그림을 그린 화가는 장미꽃을 들고 모호한 표정으로 그들의 곁에 서 있습니다.

그녀의 첫 작품인 이 그림은 미국의 영향력 있는 미술 수집가이자 작가인 거트루드 스타인(Gertrude Stein, 1874-1946)이 구입했습니다.

그 후 그녀와 거트루드 스타인의 친분은 계속 이어집니다.


'죽은 생선, 양파, 맥주잔을 왜 그려야 하나요? 여자가 훨씬 예쁜데 말이죠.'


마리 로랑생은 최초의 바이섹슈얼을 인정한 여성 화가이며 그녀의 행보는 거침없고 드라마틱합니다.

앞서 소개한 베르트 모리조(1841-1895)의 우아하고 품위 있는 그림과 많은 차이가 있지요.

저마다의 인생은 한 권의 소설이요, 각본 없는 드라마입니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어쩌면 그렇게 다를까요?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 찰리 채플린

'인생은 온갖 것이 섞여있다, 희극과 비극은 동행한다.' -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가 모여 시대의 역사가 됩니다.

그러므로 역사는 사람이 주인공인 셈이죠.



국회의원의 혼외자로 태어나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은 외동딸 로랑생은 말이 적고 냉담하며 권위주의적인 어머니를 두려워했습니다.

어머니는 노르망디 출신의 크리올 혈통입니다.

곱슬머리, 도톰한 입술, 아몬드형 눈 등 어머니를 똑 닮은 그녀는 키가 크고 말랐습니다.

 

1913년, 로랑생은 첫사랑인 바람둥이 아폴리네르에게서 자유로워졌습니다.

교사가 되길 바랐던 어머니는 그녀의 그림을 부숴버리기 일쑤였지요.

그랬던 어머니 마저 세상을 떠났으니 마침내 그녀의 삶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두 사람에게서도 자유로워져진 것이죠.




자화상, 마리 로랑생, 1928
백합꽃병, 1920년대



아폴리네르와 어머니와 헤어진 다음 해, 로랑생은 독일인 오토 폰 와트젠 남작과 결혼했습니다.

프랑스와 독일 간의 전쟁이 임박했기 때문에 독일 국민과 결혼하기에는 가장 부적절한 시기였습니다.

와트젠은 훌륭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왔습니다.

전쟁이 발발하자 그들은 남쪽의 보르도로 도망갔다가 스페인으로 도망갔고 그곳에서 거의 5년 동안 살았습니다.

그곳에서 고야의 작품을 공부할 수 있었고 이 기간 동안 그녀의 특징적이고 성숙한 스타일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로랑생의 전후 그림 중 일부에는 무용수들의 그룹 장면에 검은 숄을 두른 스페인풍의 어린 소녀 모습이 포함되어 있는 건 이때의 영향입니다.




Femmes au Chien (1924-25)
Les Biches(오랑주리)




전쟁이 끝나자 두 사람은 독일로 갔지만 그녀는 여전히 국외 거주자였으며 여전히 파리를 그리워하고 있었습니다.     

1921년, 로랑생은 파리로 돌아와 이혼 절차를 시작했습니다.

사실 와트젠은 알코올 중독자였고 결혼 생활은 파탄이 났습니다.

독일에 있는 와트젠의 가족은 전쟁으로 인해 모든 재산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이혼 후에도 로랑생은 지속적으로 돈을 보내 그들을 도왔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1942년, 와트만이 사망할 때까지 친분을 이어갔지요.     



자유 부인으로 돌아온 마리 로랑생은 파블로 피카소의 작업실이자 전 세계에서 몰려든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세탁선 'Bateau Lavoir '을 드나들며 앙리 루소, 모딜리아니와 어울리며 작업을 했습니다.

로랑생은 남성이 지배하는 몽마르트르에서 인정을 받은 극소수의 여성 중 한 명으로 독립 여성 예술가로서 빠르게 명성을 얻었습니다.

미술 교육관인 아카데미 엄베르 (Academie Humbert)에서 입체파( 큐비즘)의 창시자로 불리는 조르주 브라크 ( Georges Braque)에게서 재능을 인정받으며 '입체파의 소녀', '몽마르트르의 뮤즈'로 불립니다.  



그녀는 재혼은 하지 않았지만 남자 친구와 연인은 많았습니다.

로랑생은 극작가이자 자칭 레즈비언 살롱을 운영하는 나탈리 클리포드 바니 Natalie Clifford Barney (1876–1972)와 그녀의 파트너인 예술가 로메인 브룩스  Romaine Brooks (1874~1970)와 함께 20세기 파리의 레즈비언 반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로랑생은 바니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로랑생은 남성과 여성 모두와 연애 관계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여성을 선호한다'라고 언급했지요.  

그곳에서 로랑생은 자신의  작품을 구입했던 전설적인 레즈비언 거트루드 스타인의 후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헤밍웨이가 거트루트에게 주인공 질의 작품을 읽어봐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거트루드는 당시 파리 예술계와 화류계를 휘어잡던 여장부이며 파워있는 마담이었지요.

또한 헤밍웨이 아들의 대모가 될 정도로 친분이 두터웠습니다. 

로랑생에게 그녀는 천군만마였고 그 덕에 빠르게 그들의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 파리의 신흥 동성애자 사회에서 활동한 그녀는 세르주 디아길레프, 장 콕토, 프란시스 풀랑크 등 그 계통에서 다양하게 활동하던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했습니다.

그렇게 로랑생은 당시 파리의 셀럽 그룹에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거트루드 스타인과 앨리스 B. 토클라스
거트루드 스타인의 살롱(벽에 피카소가 그린 거트루트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거트루트의 초상화, 피카소
나탈리 클리포드 바니
로메인 브룩스
왼쪽 마리 로랑생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 이후인 1791년에 동성애 행위가 비범죄화되었습니다.

물론 비범죄화일 뿐 합법적인 것은 아니어서 사회의 시선이 크게 바뀌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파리의 문화 및 예술 발전으로 유명한 벨 에포크 시대의 동성애자들은 더 이상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몽마르트르 등 파리의 보헤미안 지역을 그린 것으로 알려진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은 자신이 만난 사람들, 특히 자신이 방문한 매춘업소의 성노동자들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두 친구(The Two Friends)라고 불리는 이 이미지는 두 여성이 서로를 꼭 붙잡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어 명백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두 친구(Les Deux Amies) 1894, 로트렉



당시 서점은 파리의 문학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의 셰익스피어 컴퍼니를 운영하던 아드리엔 모니에 역시 로랑생의 친구였지요.

모니에의 초상화를 그리려고 했지만 모니에는 그림에 자신의 코를 그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로랑생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종종 "코가 없는" 것으로 보였으니까요.

로랑생은 그녀에게 "당신은 코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라고 말했고 이에 모니에는 초상화를 거부하여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의 커플 Sylvia Beach and Adrienne Monnier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젊은 여성을 그리는 것을 선호한 로랑생은 개인적인 친구였던 소설가 윌리엄 서머스 모옴을 제외한 남성들의 초상화는 두 배의 비용을 청구했습니다.

또한 그녀는 금발 머리를 선호했기 때문에 갈색 머리의 초상화는 값을 더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녀의 창의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로랑생은 사교계의 초상화가로서, 그리고 무용과 극장계의 무대미술과 의상 디자이너로서 명성을 얻었고, 경제적으로도 성공을 했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1937년 로랑생에게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하고 그녀의 그림 <리허설>을 구입했고 그 그림은 현재 파리 국립현대미술관에 걸려 있어요.



Marie Laurencin, The Rehearsal, 1936




호화로운 저택을 사 들였고 남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로랑생은 남 모를 우울증과 기타 건강 문제로 고통받았습니다.

그녀는 1925년부터 가정부였던 수잔 모로(Suzanne Moreau)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리고 로랑생은 죽기 2년 전인 1954년 당시 49세였던 모로를 그녀의 딸로 입양했는데요.

이는 당시 자신의 재산을 상속하고 동성애 파트너의 자산을 법적으로 보호하려는 일반적인 관행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녀의 이름은 수잔 모로 로랑생이 되었습니다.




Suzanne Moreau, 1840



로랑생은 1956년에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하얀 드레스를 입은 채 자신의 유언에 따라 페르라셰즈에 묻혔습니다.   


 '한 손엔 장미, 한 손엔 나의 연인 아폴리네르의 편지를'


입양녀인 수잔 모로는 유언에 따라 로랑생의 그림을 한 점도 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로가 죽은 후부터 그녀의 그림은 수집의 대상이 되었지요.

로랑생은 파스텔 색조의 현실도피적 이미지를 선호하면서 자신만의 미학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장식적이면서 여성적인 비유를 수용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남성 예술가들과의 공식적인 관계에도 불구하고 로랑생은 평생 동안 여성들과 몇 가지 로맨틱하고 성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그녀의 기묘한 관점은 그녀의 모든 예술 작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초기에 그녀는 다양한 방식으로 관능미를 표현하는 여성의 부드럽고 영묘한 이미지를 그렸습니다.


그녀의 후기 작품은 더욱 에로틱하게 노골적으로 변해 종종 여성들이 함께 키스하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Les-Desguises
Kiss,1927
우아한 무도회
두 여인, 1930



그녀는 이렇게 시를 썼지요.

그녀는 누구에게서 잊힌 게 슬펐을까요?


죽은 것보다 더 슬픈 것은 잊힌 여자가 되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닙니다.

화려한 셀럽의 삶을 살았지만 그녀의 삶은 늘 외로웠지요.

우울해보이는 그녀의 그림에서 이 시가 생각납니다.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정호승 시, 수선화에게 중>                                                    


초상화 (마리 로랑생, 세실리아 데 마드라조와 그녀의 개 코코) 1915
비둘기와 연인들
자화상, 1912
폴 기욤 부인의 초상, 오랑주리
Marie Laurencin, Selbstportrait,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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