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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18. 2023

불가능한 콘서트

19. Nicolas de Staël







1955년 3월 14일 프랑스 앙티브의 한 아틀리에,

화가는 가로 6m, 세로 3.5m의 거대한 캔버스에 붓질을 시작합니다.  

단순화된 배경은 온통 피처럼 붉습니다.

검은 꼬리를 가진 피아노의 건반은  악보들을 토해내고 현이 없는 콘트라베이스는 상처 입은 동물처럼 외롭게 서 있습니다.

연주자 없는 콘서트를 사흘 동안 작업하던 화가는

홀연히 붓을 놓았습니다.

그리고 문장 하나를 썼지요.

'나는 나를 위해 필요하다'

그리고 아틀리에 테라스로 올라가 허공을 흔들며 떨어졌습니다.

존재감이 없는 공간, 시간이 흐르는 공간에서 음악을 선보여야 하는 그의 콘서트는 그렇게 불가능하게 끝이 났지요.

이 사람은 화가 니콜라 드 스탈(Nicolas de staël 1914, 상트페테르부르크-1955, 앙티브)입니다.




니콜라스 드 스탈, 1954




2022년 5월 프랑스 앙티브에 있는 피카소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을 처음 보았습니다.

위의 그림 <콘서트>의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절대 잊을 수 없었지요.

아니 잊을 수 없다기보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더 적합합니다.

그 후 화가에 대한 정보를 좀 찾아보았습니다.

러시아 출신이지만 프랑스로 귀화했고 자살로 마흔한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기치 않게 파리에서 다시 그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그의 전시 사상 역대급으로 큰 대규모의 전시를 말이죠.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은 무료로 운영하기에 예약이 필요 없습니다.

파리에 도착해서 열흘쯤 지났을 때 그곳에 어떤 작품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홈페이지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특별전을 알게 되었지요.

어찌나 반갑던지요.

당장 보러 가고 싶더군요.

특별전은 티켓 구매는 물론이고 시간 예약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가까운 날짜는 모두 매진, 약 열흘 후인 11월 3일예약했습니다.



메트로를 타고 알마 다리에서 내려 센강을 따라 걸어갔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첫 타임으로 예약을 했고 일찍 도착한 터에 미술관 앞에는 아무도 없더군요.

그날따라 바람이 매섭게 불었습니다.

계단에는 수북하게 떨어진 나뭇잎들이 센 강을 바라보는 관객처럼 앉아있습니다.

미술관 유리창 한편에 노숙자의 이불보따리가 놓여 있는데 계단 청소를 하는 사람은 그것을 그대로 놔두더군요.

오픈 시간이 5분 남짓 남았는데도 미술관 앞에는 여전히 나 혼자입니다.

 '이상하다 왜 사람들이 하나도 없지?'

그때 건물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나오더니 내게 말했습니다.




근대 시립 미술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니콜라 드 스탈의 그림을 보러 왔는데요.'

'여기는 출구예요.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입구가 따로 있습니다.'   

'아,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남자가 말한 곳으로 돌아가니 약 20~30명의 사람들이 문이 열리길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연일 매진인 전시회에 사람이 없을 리가 없지 싶더군요.

특별전 티켓이 있는 줄과 무료 전시실을 이용할 사람들의 줄이 나뉘어 있습니다.

드디어 문이 열리고 서둘러 전시실로 향했지요.





 

시립 근대 미술관




니콜라 드 스탈의 전시는 2003년 퐁피두 센터에서 주최한 이후 20년 만입니다.

이번 전시는 시기적으로 구분을 해놓아서 1940년대 그의 첫 번째 구상 단계인 어두운 캔버스부터 1955년 요절 직전까지 그림이 변하는 모습을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191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부총재 남작이었고 슬라브계 어머니는 부유한 집안의 딸입니다.

그림과 피아노에 대한 열정이 있는 그녀는 아들에게 그림 그리기를 장려했지요.

호화로운 표트르파블롭스크 요새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중 혁명이 일어나 그의 가족은 에스토니아와 폴란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그 기간에 부모 모두 사망했습니다.

모든 걸 다 갖고 있던 아이는 한순간에 모든 걸 잃었고 그 충격과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습니다.

고아가 된 그는 브뤼셀의 한 부부에게 누이들과 함께 입양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양부모 역시 부유하고 교양이 있는 사람들로 그들 남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며 사랑을 주었습니다.

그리스 비극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그는 프랑스어를 배웠고 펜싱, 테니스, 수영을 즐겼습니다.

또한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골동품 그림과 회화를 공부했습니다.

그는 유럽의 여러 나라를 여행한 후 알게 되었습니다.


'내겐 그림과 여행밖에 없어'


네덜란드를 여행하는 동안 렘브란트와 베르메르를 존경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에서 벨라스케스 그림을 모사했고 세잔, 마티스, 브라크, 수틴의 작품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친구와 자전거를 타고 스페인을 여행하면서 엘 그레코의 그림에 심취했지요.


모로코를 여행하던 중 마라케시의 한 카페에서 여인을 만났습니다.

두 아들과 남편이 있던 잔느는 남편을 버리고 스탈과 함께 모로코를 떠났습니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의 나폴리, 폼페이, 카프리 등을 여행하다가 돈이 떨어졌습니다.

오갈 데 없는 두 사람은 프랑스에 살고 있는 잔느의 부모님 집에서 한동안 살았습니다.

그러나 1946년 사랑하는 잔이 세상을 떠나고 그녀의 죽음은 그의 캔버스에 고뇌로 남게 되지요.

하지만 프랑수아즈 샤푸통과의 결혼으로 안정감을 되찾아 그림의 색상은 가벼워지고 형태는 확대되었습니다.

1948년에 자녀가 태어나면서 그의 삶은 좀 더 평온해져 보였습니다.





Large Blue Composition(1951)
deux composition Paris 1951
composition Paris 1951
composition Paris 1951
Fleurs Paris 1952



Etude de paysage 1952
L'orchestra paris 1953


오케스트라
Bouquet




1953년 시칠리를 여행하는 동안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아그리젠토와 시라쿠사의 고대 유적을 방문하여 펠트펜으로 스케치를 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프랑스의 프로방스 작업실로 돌아왔을 때 그의 그림은 시칠리아의 영향이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그는 몇 달 동안 강렬한 빛으로 눈부신 섬의 풍경을 그렸습니다.

1953년 시칠리아 여행은 그의 색채를 급진화시켰습니다

멀리서 봐도 노랑과 주황의 밝고 빛나는 색채가 눈에 띄게 다름을 느꼈습니다.




Agrigento 1954
Agrigento 1954
Agrigento 1954
Pasage Menerbres 1954
Sicily
Braques 1954-1954
Pasage Menerbres 1954




그리고 1954년 9월, 앙티브로 이사를 하여 바다를 마주한 작업장에서 수많은 정물화와 풍경화를 제작했습니다.

1955년 6월과 7월에 예정된 앙티브의 전시회를 위해서였지요.

그 누구도 그가 자살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는 그림에 몰두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항상 평론가들로부터 따뜻한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우울증을 겪으며 그의 작품들을 파괴했고 결국 41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했습니다.




Menerbes
칼라이스의 해변
 at Le Havre
blue nude




개인적으로 그의 후기 작품 중 색채를 절제한 정물화들이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단순한 프레임과 컬러의 조화가 차분하면서 자꾸 바라보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정물을 그린 작품은 거의 크기가 작고 무채색이 많은데요.

마치 명상음악처럼 그림으로 하는 명상이랄까?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Giorgio morandi,1890-1964)의 정물화가 떠오르기도 했지요.

모란디는 꽃병이나 빈병, 접시, 꽃과 같은 단순한 주제를 미묘한 색조로 그리기로 유명한 화가입니다.





조르지오 모란디(1948)
조르지오 모란디(1955)
pears
nature morte en gris
검은 병
항아리 병
샐러드 그릇


선반


작은 배




1942년 니스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작가인 그의 딸 앤 드 스탈(Anne de Staël)은 아버지가 자살했을 때 13세였습니다.

81세가 된 그녀는 아버지의 회고전이 열리는 동안 '선에서 색까지(Trait à la couleur의 Nicolas de Staël) '를 출판했는데요.

아버지를 많이 닮았네요.

다음은 프랑스의 한 매체와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입니다.




앤 드 스탈
앤 드 스탈


가로 10미터, 세로 10미터의 작업장에서 느꼈던 긴장감과 극도의 중력이 기억납니다.


침묵이 원칙이었고, 아버지는 극도의 집중력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의 팔레트는 폭풍우가 치는 바다였고, 색상과 색조가 혼합되어 있었고 그는 그 바다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가 그림을 그릴 때 우리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작업장을 청소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고, 오직 그가 청소를 했습니다.

그는 토요일도 일요일도 없이 항상 일하는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쉬지 않았고 동시에 여러 그림을 그릴 수 있었습니다.

그림이 완성되지 않은 경우에도 그는 자신이 무엇을 그릴 수 있는지 계속해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끝났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서 그림도 없애지 않았습니다.

나의 아버지는 그의 그림에 놀라울 정도로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출처:구글)




니콜라 드 스탈은 죽기 일주일 전 파리의 마기니 콘서트홀에서 베베른과 쇤베르크의 음악을 들었습니다.

그 후 한동안 음악의 감정으로 가득 차 있었지요.

음악을 시각적인 형태, 즉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 감정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 또한 음악을 글로 표현하려고 한동안 애를 썼던 적이 있거든요.

 

참고로 말하자면 안톤 베베른과 아놀드 쇤베르크는 근대 음악의 선구자입니다.

쉽게 말해서 그들의 작품은 추상화와 비슷합니다.

조성과 박자가 일정하지 않고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호불호가 명백한 작곡가지요.


아마도 그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던 우울증과 그 음악이 만나면서 그의 삶이 마감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시작된 작품 콘서트(Le Concert)는 그의 작품 중 가장 큰 사이즈였고 미완으로 남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에 전시회 포스터를 살까 하다가 도록 하나를 사 갖고 나왔습니다.


"나의 삶은 불확실한 바다 위에서 계속되는 여행이었던 것을 안다." -니콜라 드 스탈





전시회장에 걸린 그의 작업장 사진들
니콜라 드 스탈의 생애 다큐(출처:Youtube)


Le Concert (2022년 5월 프랑스 앙티브 피카소 미술관 촬영) 피카소 미술관 영구 소장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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