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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20. 2023

프랑스는 그의 80세 생일을 임시공휴일로 정했다

20. Masion de Victor Hugo






보주를 안 보고 마레지구를 산책하는 것은 개선문을 보지 않고 샹젤리제를 산책하는 것과 같습니다.

보주 광장은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광장으로 보 독일과 룩셈부르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지역인데 프랑스의 새 정부가 부과한 세금을 가장 먼저 납부했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졌다고 합니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에는 고급 아케이드와 레스토랑, 호텔들이 있어요.

광장은 튈르리만큼 크지는 않지만 준비해 온 음식과 와인을 잔디밭에 펼쳐놓고 소풍을 즐기는 시민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나도 잠시 그들과 같이 벤치에 앉았지요.

보온병에 들어있던 둥글레 차와 집에서 만들어온 바게트 샌드위치를 꺼내 먹었습니다.

모처럼 파란 하늘과 잔잔한 구름이 적절하게 펼쳐져있어 마음이 편안했어요.




보주 광장
호텔 Pavillon de la Reine
소풍을 즐기는 가족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고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루이 13세 기마상
팔각형 분수



마레 지구에서 공짜로 방문할 수 있는 곳 중 가장 하이라이트 라고 할만한 빅토르 위고의 집(Maison de Victor Hugo)이 바로 보주광장에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 것은 그곳에서 빅토르 위고가 죽을 때까지 살았다고 알고 있는 건데요.

사실 그 집은 빅토르 위고가 1832년부터 1848년까지 살았던 집입니다.(빅토르 위고는 1885년 사망)

그가 죽을 때까지 살던 집은 따로 있는데 그 이야기는 아래에서 다시 하겠습니다.




이 건물의 모퉁이 2층(빅토르 위고가 살던 집)
메종 드 빅토르 위고 입구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그리고 빅토르 위고, (Victor hugo1802-1885)는 영국, 독일,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입니다.


괴테와 위고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건축에 관심이 높았으며 83세까지 장수했다는 것이 비슷하지요.

두 사람은 또한 와인을 무척 즐겨 마셨는데요.


괴테가 '나쁜 와인을 마시면서 살기에 인생은 너무 짧다'라고 말했고

이에 질세라 위고는

'신은 물을 창조했을 뿐이지만, 인간은 와인을 만들었다'라고 했습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1564-1616)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빅토르 위고, (Victor hugo1802-1885)



제목에서 시사한 바와 같이 빅토르 위고는 그의 80세 생일인 1882년 2월 26일이 임시 공휴일로 지정되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예수님, 부처님 탄생일이 공휴일인 걸 감안하면 그는 거의 신과 동급이었던 것이죠.

게다가 살아있는 사람의 생일이 임시 공휴일이 되었다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황제 나폴레옹도 못 누린 호사지요.

그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무려 60만 명의 사람이 그의 집 근처로 찾아와 생일을 축하했고 그는 2층 집 창문 앞에서 운집한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했다고 합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마인드는 다르군 싶습니다.




80세 생일을 축하하는 시민들과 2층에서 손을 흔들며 화답하는 위고 (니엘 우라비에타 비에르주, 목판화)


   

젊어서는 시를 썼고 평생 수 천 점의 그림을 그렸고 가구의 조각을 즐기던 빅토르 위고는 프랑스의 저명한 작가이면서, 뚜렷한 사회의식을 지닌 지성인이자 거침없는 언변으로 유명한 정치가이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연애 박사이기도 했지요.

     

스물세 살에 작가로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왕실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기사 훈장을 받았고

서른아홉 살에는 대망의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흔아홉에는 나폴레옹 3세의 쿠데타에 반발하여 국외로 추방을 당했는데 아마도 아홉 수를 잘 못 넘겼나 봅니다.


벨기에를 거쳐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을 전전하며 거의 19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하던 그는 1870년 보불 전쟁에 의한 나폴레옹 3세의 몰락과 함께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일흔 네 살에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었지만, 2년 후 뇌출혈을 일으킴으로써 결국 정계에서 은퇴했습니다.

나이 80에 신과 같은 생일 축하를 받던 그 집에서 1885년 5월 22일, 83세로 세상을 떠났지요.

그가 죽은 지 130년이 넘은 지금, 프랑스 전체의 2,500개의 도로에 그의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니스에서, 리옹에서 rue de Victor Hugo라고 쓰여있는 길거리 이름을 본 적이 있습니다만 이렇게 많은지는 몰랐습니다.



23세의 빅토르 위고(빅토르 위고 저택에 걸려있음)
40세 즈음



나폴레옹의 장례식은 국장이 아닌 군장으로 치러졌습니다.

반면 위고는 프랑스 역사상 유례없는 최대 규모의 국장으로 치러졌지요.

장례를 뒤따르던 사람 수는 당시 파리에 거주하는 인구의 숫자인 20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검은 천으로 가려져있는 개선문 아래에 그의 관이 놓이고  말을 탄 군인들이 밤새 그의 유해를 둘러싸고 지켰습니다.


초라한 나무 관이 실린 마차(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하는 관을 사용하라는 유언)는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내며 샹젤리제 거리를 지나 콩코르드 광장을 거쳐 생제르망의 판테온까지 천천히 굴러갔습니다.

검은 옷을 입고 모자를 벗은 사람들이 무릎을 꿇은 채 도시를 뒤덮었지요.

그 침묵을 깨는 것은 쇼팽의 장례식 행진곡과 말발굽 소리뿐이었습니다.

장례식 군중의 대다수가 노동자와 농부들로 위고의 작품에서 옹호했던 가장 소외된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파리의 사창가는 하루 동안 문을 닫았다고 합니다.




개선문 아래의 빅토르 위고
장례 행진
판테옹 앞에 운집한 조문객들(왼쪽 소르본 대학 옥상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있는 모습이 보인다)



보주 광장의 빅토르 위고 저택은 작가 폴 뫼리체가 1902년 파리 시에 기증되면서 재탄생했습니다.

집은 그가 살았던 그대로 재현한 게 아닙니다.

그가 남긴 유물들을 수집하여 그의 삶의 시기에 따라 새롭게 꾸며놓은 것이지요.

예를 들어 그가 망명생활을 했던 영국 건지섬에서의 식당 모습이라든가 위고가 죽음을 맞았던 침대 등을 가져다 재배치하여 꾸민 것입니다.

빅토르 위고가 살던 집을 이처럼 박물관으로 운영햐는 곳은 또 있습니다.

영국 건지섬의 오뜨빌(Hauteville)과 루앙에서 멀지 않은 리브 앙 센에 있는 빅토르 위고 박물관(Musee Victor Hugo)입니다.




위고가 망명 중 살았던 영국 건지섬의 오뜨빌
위고가 망명 중 살았던 영국 건지섬의 오뜨빌
리브 앙 센에 있는 빅토르 위고 박물관(Musee Victor Hugo)
리브 앙 센에 있는 빅토르 위고 박물관(Musee Victor Hugo)



메종 드 빅토르 위고는 총 일곱 개의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요.

첫 번째 방은 위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가족 초상화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 (1802-1885)는 스탕달의 소설 [적과 흑]의 배경인 브장송에서 태어났습니다.

나폴레옹 군대 휘하의 장군이던 아버지를 따라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로 이사를 다니며 문학적 감성을 꽃피웠지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녀가 명민하고 똑똑하면 법학 공부를 시키는 건 국룰인지 그의 부친은 위고에게 법학을 공부시켰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게 자식이라는 말처럼 위고는 문학가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두상
가족 사진(오른 쪽 금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 빅토르 위고의 부인)




위고는 소꿉친구였던 아델 푸셰와 스무 살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지 10년쯤 지나 보주 광장의 집으로 이사를 했을 때 여배우 쥘리에트 드루에를 만나 사랑에 빠졌지요.

그녀는 위고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서 살다가 망명하는 곳마다 따라가 그를 보살폈고 결혼하지 않은 채 평생을 빅토르 위고를 위해 살다가 1868년에 사망했어요.


그의 아내는 남편에 대응하여 평론가이자 작가인 샤를 오구스팅 생 보브와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는 위고의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드루에와 사귀는 와중에 위고는 유부녀 레오니 당츠와 7년 넘게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간통죄로 체포되어 위고는 감옥에서 2개월, 도네는 수녀원에서 6개월을 보낸  석방되었지요.

그뿐 아니라 위고는 여배우, 매춘부, 그의 글을 좋아하는 팬, 하녀 또는 혁명가 등 모든 연령대의 다양한 여성과 관계를 맺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부인 아델 푸셰




위고는 3남 2녀의 다섯 자녀를 두었었습니다.

다 가질 수는 없는가 봅니다.

자식복은 없었으니까요.


첫째 아들은 태어난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아 잃고

둘째이며 장녀였던 레오폴딘은 열아홉에 세상을 떠납니다.

르아브르의 이름난 선박 재벌이었던 바카레가문은 평소 존경하던 빅토르 위고와 친분을 맺고 가족 간에 왕래를 하다가 바커리의 아들 샤를과 위고의 맏딸 레오폴딘이 결혼을 했습니다.

신혼부부는 어느 날 센 강으로 뱃놀이를 하러 갔는데 그만 배가 전복이 되었어요.

물에 빠진 레오폴딘은 임신 중이었고 그녀를 구하려던 남편도 함께 사망했습니다.


프랑스 언론인이자 사진가였으며 프랑스 소설가였던  둘째 아들 샤를 위고는 아버지를 만나 저녁식사를 하려고 가던 중 뇌졸중으로 사망했고(45세).

셋째 아들 프랑수아 역시 45세에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위고의 다섯 자녀 중 그보다 오래 살았던 유일한 사람은 아델이라는 막내딸입니다.

하지만 그녀 역시 문제가 있었지요.

환각을 포함한 정신분열증을 앓았는데 그 병은 위고의 가족력이기도 합니다.

파리 외곽의 부유층을 위한 정신병원에 보내진 그녀는 1915년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부모가 너무 오래 살면 자식을 앞세운다는 옛말이 생각나네요.




둘째이며 장녀였던 레오폴딘, 왼쪽 4세, 가운데 14세
위고와 아들 프랑수와



다마스크(주로 커튼으로 쓰이는 두꺼운 직물)가 걸려있어 레드 라운지로 불리는 두 번째 방은 위고가 당대 예술가들과 교류하던 낭만적 시기를 보여주는 구성인데요, 이곳은 <레 미제라블> 집필실이기도 했습니다.






중국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세 번째 방은 당시 유럽 상류층에서 유행했던 중국풍 고가구가 배치돼 있습니다.

이곳의 유품은 위고가 건지 섬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 동안 함께 살았던 그의 애인 쥘리에트 드루에의 집인 오뜨빌을 위해 디자인된 장식과 가구들로 꾸며져 있는데요.

중국식 패널은 위고가 디자인하고 오뜨빌에서 고용한 장인의 도움으로 그림을 그려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로써 위고의 장식가로서의 재능을 알 수 있음이지요.

사실 위고는 4,000점 이상의 그림을 그렸고 약 3,000개의 그림이 아직도 존재합니다.

원래 평범한 취미로 추구했던 그림은 일반적으로 짙은 갈색 또는 검은색 펜 및 잉크 워싱이 있으며 때로는 흰색이 가미되기도 하고 컬러가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리스트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았고 그 시대의 프랑스 작곡가 베를리오즈와도 친분이 두터웠으며 쇼팽의 장례식에도 참석했었습니다.

그건 아마 쇼팽의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와의 친분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급스러움이 넘치는 중궁식 방
위고가 조각하여 만든 패널
중국식 도자기



네 번째 방은 현재 박물관의 그림, 사진, 판화, 원고, 인쇄물 등의 전시하고 있습니다.

이 방은 망명지에서의 위고의 삶을 보여줍니다.

위고가 반세기 동안 불륜 관계를 지속했던 여배우 쥘리에트 드루에(Juliette Drouet, 1806~1883)의 흔적도 볼 수 있는데요. 비록 정부였지만 드루에는 <레 미제라블> 원고를 정서하고, 망명지까지 따라가서 그를 돌보며 위고의 문학적 성취를 지원했습니다.

조르주와 잔느의 초상화는 빅토르 위고가 아들이 죽은 후 손주들에게 전한 애정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집필실
죽기 몇 달 전의 쥘리에트 드루에, 바스티앙-르파주(Bastien-Lepage)그림


Auguste Leroux 두 개의 머리
서서 집필하던 책상
위고의 손자, 손녀
위고의 손과 원고
위고의 손
원고
레비제라블의 장발장과 코제트




마지막 방은 침실로 그가 사망할 때까지 쓰던 침대를 그대로 재현해 놓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니면 온통 붉은 색이라 그랬을까요?

뭔가 엄숙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가 전해졌습니다.

위고가 선 채로 글을 쓰던 높은 책상을 볼 수 있고 그의 79번째와 8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정부가 선물로 준 세브르 꽃병과 그가 사망할 당시의 초상화가 남아 있습니다.

모든 방의 창문 밖을 내다보면 보주 광장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마치 보주 광장이 그의 것인양 말이죠.

하지만 보이는 게 다는 아니었습니다.




침실
사망했을 당시 초상화
데드 마스크
위고의 사망 시각에 멈춘 시계
죽음을 맞은 위고
계단을 내려오며 보이는 창문
야외 스낵바
기념품샵의 깃털펜




빅토르 위고는 나폴레옹 3세 이후 19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한 프랑스인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천재적인 작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적극적으로 캠페인을 벌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1832년의 프랑스 6월 봉기를 주제로 쓴 <레미제라블> 19년간의 망명 기간 동안 집필하여 위고가 60세가 되던 1861년 탈고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지요.

"Dante tried to make a hell with poetry". wrote Hugo. "I have tried to make one with reality."

"단테가 시로서 지옥을 그려내고자 했다면 나는 현실의 지옥을 그려내고 싶었다."




레비제라블 프랑스어 초판



1878년 11월 말 위고는 뤼지냥 공주 소유의 개인 저택이었던 124 avenue Victor Hugo으로 이사했습니다.

1881년 2월 27일에 6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그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창문 아래에서 퍼레이드를 벌였던 바로 그 집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삶을 마감했지요.

죽기 이틀 전,  "사랑은 행동하는 것이다"라는 마지막 메모를 남겼고

죽기 전 마지막 말은 "검은빛이 보인다"였습니다.


위고는 국회의원의 자격으로 사형제 폐지, 빈곤 퇴치, 자유를 위해 싸웠습니다.

유럽의 수도는 브뤼셀이 아닌 파리여야 하며 단일 통화로 국경을 넘어 무역을 하는 유럽 연합의 출현, 즉 지금의 유로화를 예견한 선구자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빅토르 위고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습니다.

그의 대표작인 레미제라블의 장발장이나 노트르담 드 파리의 프롤로 신부와 다를 바 없었지요.


'인생이란 출입구가 거의 없는 공연 무대와도 같다.'라는 의 말로 마무리합니다.




빅토르 위고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집 124 avenue Victor Hugo  
파리 판테옹에 안장된 빅토르 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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