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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22. 2023

마지막 방, 5호실의 Sorrow

21. Auvers-Sur-Oise






'예술이란 얼마나 풍요로운 것인가? 본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허무하지도 생각에 목마르지도 않을 것이며 고독하지도 않을 것이다.'(테오에게 보내는 편지 중)


한 여성의 나신을 주제로 한 석판화 'sorrow'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에서 그 그림을 보았을 때 한숨 같은 감탄사가 입에서 새어 나왔죠.

오직 검은 선으로 표현된 그림에서 제목 이상의 슬픔을 감지했다면 그건 뭘까요?

한참 동안 발을 떼지 못하고 그 그림에 매달려 있었습니다.

'저 여인은 누구일까?'


1882년 1월, 네덜란드의 반 고흐는 임신으로 인해 노숙자가 된 매춘부 시엔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모델이 되어주는 조건으로 잘 곳과 먹을 것을 제공해 주 그려진 그림입니다.

1년 후 고흐는 드렌트로 그림을 그리러 떠났고 시엔과 헤어졌습니다.

그때 시엔은 고흐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난 창녀예요. 물에 빠져 죽어야만 이 세상을 끝낼 수 있습니다.'(1883년 8월 29일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

그 후 시엔은 뱃사람과 결혼을 했지만 그 또한 불행한 삶이었는지 몇 년 후 로테르담 앞바다에 빠져 생을 마감했어요.



 

 Sorrow, 1882 by Vincent Van Gogh




그림 뒤에 숨어 있는 화가들의 비운과 고통, 절망은 알려진 것만도 너무 많습니다.

화가 생활 10년 동안 단 한 점의 그림이 팔렸을 뿐 스스로 귀를 자르고 권총으로 목숨을 끊기까지 단 한 번도 행복하거나 평화롭지 못했던 반 고흐.

연인으로서 뮤즈로서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모딜리아니가 죽자 이틀 후 8개월 만삭의 몸으로 투신함으로 죽음까지 같이 했던 지독하고 운명적인 사랑을 했던 잔느 에뷔테른.

에스파냐 독감에 걸려 사망한 아내 에디트의 뒤를 따르듯 사흘 후 역시 독감에 걸려 스물여덟의 나이로 사망한 벌거벗은 영혼 에곤 실레.

소아마비에 이어 열차사고로 인해 하복부와 척추 뼈에 철골이 들어가고, 하반신 마비가 되어 전혀 움직일 수 없이 평생을 불구의 몸으로 살다 간 프리다 칼로가 죽음 앞에 썼던 글,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살아있는 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가슴 아픈 내용이죠.

비단 화가들의 비운은 다른 나라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종이 살 돈이 없어 담배 갑의 은지에 그림을 그린 이중섭,

지금은 그림 한 장에 수십억을 호가하는 박수근은 한쪽 눈을 실명하고도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미치겠다며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아 간경화와 응혈증으로 51세로 타계했습니다.

그의 마지막 말은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  



우리는 대부분 아름다움을 찾아 여행합니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은 우리가 여행하고 싶은 장소를 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2022년 5월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갔었고 1년 6개월 만에 다시 그곳을 찾아갔습니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렇다 할 이유는 없습니다만 굳이 답을 한다면  <까마귀가 나는 밀밭>입니다.

5월의 밀밭은 온통 초록이었는데 지금은 그림 속의 모습처럼 황금빛일지 궁금했지요.

그리고 당시 쉬는 날이라 못 들어갔던 라부 여인숙에 들어가 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가 마지막 숨을 내쉬었던 방과 압생트를 마셨던 그 공간에서 한 끼 밥도 먹어보고 싶었을 겁니다.



https://brunch.co.kr/@silviano/213




검색을 해보니 생 라자레 역과 북역에서 기차를 타는 방법이 있는데 나는 북역으로 갔습니다.

파리에는 파리 리옹역, 북역, 동역, 생 라자레 역, 몽파르나스 역 등 기차역이 무척 많은데요.

유럽 특성상 국가를 넘나드는 국제선? 기차들도 많기 때문에 역의 크기가 하나같이 무척 크고 복잡합니다.

하지만 침착하게 전광판을 잘 살펴보면 플랫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지요.

게다가 오베르 쉬르 우아즈 역시 일 드 프랑스 지역이기 때문에 나비고 패스를 이용하면 따로 기차표나 버스표를 구입하지 않아도 되니 시간만 있다면 가볼 만한 곳입니다.




 파리 북역
프랑스다운 기차 의자 시트 컬러



북역에서 H라인 기차를 타고 발몽두아역에서 오베르 쉬르 우아즈행 기차로 갈아탔지요.

거리는 약 30km로 그리 멀지 않으나 여러 번 환승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습니다만 나름 재미가 있습니다.

1890년 5월 20일, 아를을 떠난 고흐도 나처럼 기차를 타고 그곳을 향해 갔을 겁니다.

모네 그림 속에 등장하는 증기 기차를 타고 삑~ 하는 경적을 들으며 한 없이 느리게 달려갔을 테지요.

승객들은 띄엄띄엄 몇 명 되지 않았어요.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나는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유리창을 프레임으로 띄엄띄엄 서있는 나무들은 한 장 한 장 사진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내가 원하는 곳으로 데려다주는 기차가 고맙습니다. 




발몽두아역
오베르 쉬르 우아즈역
기차역 지하 통로
그림 속 화가는 고흐일까?
기차역 부근의 벽화



고흐가 이곳으로 오기 전에 살았던 아를이나 모네의 집이 있는 지베르니는 수많은 여행자들로 무척 붐비는데 유독 이곳은 한적합니다.

거리에서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어요. 

마치 130년 전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 마을입니다.

그 평화로움이 좋아서 이곳을 다시 찾아왔을지도 모릅니다.

오베르는 고흐 외에도 바르비종에 모여있던 도비니, 코로, 피사로, 세잔 등의 예술가가 좋아한 마을이었지요.

화가들은 도비니의 집이나 고흐가 묵었던 라부 여인숙에서 며칠씩 머물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들의 그림 역시 지금의 모습과 별다르지 않았습니다.




도비니 <오베르 쉬르 우아즈>
폴 세잔 <오베르 쉬르 우아즈 마을>
피사로 <오베르 쉬르 우아즈 마을>
Victor Alfred Paul Vignon <오베르 쉬르 우아즈>
러시아 조각가 오시프 자드킨 제작한 빈센트 반 고흐(1961년)



금방이라도 비가 후드득 떨어질 기세입니다.

서둘러 밀밭과 무덤이 있는 위쪽 마을로 발걸음을 옮겨봅니다.

오베르 교회 앞을 지나갑니다.

지난 5월 친구들과 김밥과 포도를 먹었던 벤치는 비어 있고 장미꽃은 시들어 가느다란 나뭇가지만 담벼락을 등지고 서있네요.


고흐 형제의 무덤 앞에 다시 섰습니다.

누군가 해바라기와 장미가 소담하게 담긴 꽃 바구니를 가져다 두었네요.

싱싱한 걸 보니 얼마 전에 다녀갔나 봅니다.


'빈센트, 테오! 또 왔어요.'


그들의 양 옆에 나란히 묻힌 사람들은 좋겠다 싶습니다.

고흐 형제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 덕에 발자국 소리나마 늘 들을 수 있어 심심치 않을 테니까요.


이제 밀밭으로 향합니다.

이미 추수가 끝나버린 밭은 초록도 황금빛도 아닌 빈 땅만 황량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림 속의 누런 밀밭이라도 보려면 세 갈래 길이 있는 곳까지 가야 합니다.

그곳에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 있으니까요.




현관문에 걸린 가을


이정표
마지막 꽃을 피워낸 마른 잎과 낡은 문
어떤 아틀리에의 담장에 올려둔 신발 한쪽


오베르 교회
고흐와 테오의 무덤



고흐가 그림을 그린 기간은 단 10년,

고흐가 남긴 900여 점 중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머물던 70일 동안 그린 그림은 약 80점입니다.

고흐는 이렇게 말했지요.

'언젠가는 내 그림이 물감 값보다 비싸게 팔리리라'

지금은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교향곡 작곡가 말러는

'내 음악은 적어도 50년이 지나고 나면 빛이 날 거야.' 

가구처럼 있는 듯 없는 듯 편하게 들을 수 있어 가구 음악이라 불리는 작곡가 에릭 사티도 이렇게 말했지요.

'나는 너무 늙은 세상에 너무 젊어서 왔어.'

그러니까 그들의 예술은 시대를 앞섰기에 당대에 성공을 누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 그림 <까마귀가 있는 밀밭>은 그의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져 있고 그의 자살을 암시하고 있다고 합니다. 

또한 <닥터 가쉐의 초상>이 경매 사상 유래 없는 825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는 뉴스는 고흐 입장에서 기뻐해야 할지 씁쓸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부분이죠.




끼미귀가 나는 밀밭의 배경이 된 삼거리



“며칠 전 바람이 파도처럼 심하게 불던 혼란스러운 하늘 아래 당당하고 거대하게 펼쳐진 밀밭을 보았어. 나는 거기서 슬픔과 극도의 외로움을 표현하려고 노력했지. 테오야, 이 캔버스에서 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보게 되길 바라” (편지 898: 반 고흐가 테오 형제에게 보낸 편지)


1890년 7월 27일, 테오는 형이 보낸 편지에 답장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형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데요?'

그 순간 고흐는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고 있었지요.

비틀거리며 방으로 돌아온 그는 이틀이나 고통을 겪다가 닥터 가셰의 연락을 받고 급히 달려온 테오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오르세 미술관)



며칠 전 오르세 미술관에 갔을 때 고흐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고흐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보편적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 아닌 그림들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지요.

특히나 그가 생의 마지막 그림들이니 만큼 의미가 남달랐습니다.

그 그림들을 소개합니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서 그린 고흐의 마지막 자화상




신경과 전문의면서 미술 애호가였던 가셰 박사는 고흐뿐만 아니라 피사로,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하고 치료했습니다. 

가셰는 그의 집 다락방에 화실을 만들어 놓고 그림을 그리는 아마추어 화가이기도 했는데요.

이 화실을 만드는 걸 도와준 사람은 폴 세잔입니다.

닥터 가셰는 화가들 사이에서 명성을 얻고 있었고 이 소문을 들은 테오는 형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로 가서 지낼 것을 추천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고흐가 그곳에서 마지막 생을 보내게 된 것은 닥터 가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고흐는 가셰의 집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고 그의 딸 마그리트와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때 가셰 박사의 초상화 두 점과 '정원의 마그리트 가셰', '피아노를 치는 마그리트 가셰'를 그렸습니다.

당시 가셰 박사는 위에 언급한 화가들의 그림을 많이 갖고 있었는데요.

그중 대부분은 치료비 대신 받은 것이었습니다.





닥터 가셰의 초상
정원의 마그리트 가셰(닥터 가셰의 딸)
우와즈강변의 배와 인물들
필롱 씨의 집
두 사람이 보이는 농가의 습작
계단이 보이는 오베르의 길
오베르 교회
오베르의 집들과 사람 한 명
가쉐박사의 정원
꽃 핀 밤나무
오베르의 정원
파란 지붕들이 보이는 마을풍경



오베르의 집들
빨간 지붕의 오베르의 길
코르드빌의 초가집들
오픈 첫 타임에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고흐 특별 전시장
주황색 옷을 입은 젊은 여인의 초상 
아들린 라부의 초상
일본 화병에 꽂힌 꽃들
초록색 화병에 꽂힌 꽃들
화병에 꽂힌 패랭이 꽃


밀밭


오베르의 포도밭
개양귀비 들판
밀밭의 추수
오베르의 평원
오베르성이 보이는 저녁효과
요르구스의 농가
오르세 미술관의 반 고흐 슬라이드 장면




초기 5년간의 네덜란드 시기 그림에선 오베르의 그림과 같은 빛과 색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유명한 <감자 먹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지요.

빛의 발견이라 일컬어지는 파리 시기엔 꽃그림을 집중적으로 그렸는데 오베르 시기에 그려진 꽃병들도 무척 아름다웠습니다.


종교화는 잘 몰라서 좋아하지 못했고 사진을 보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인물화는 섬뜩할 만큼 사실적이어서 불편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러므로 온화하고 부드러운 풍경화나 작은 꽃 그림들을 좋아했지요.

고흐의 그림을 처음부터 좋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거칠고 굵은 붓터치가 너무 강렬해서 개성이 강한 화가이구나 라는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색채와 구불구불한 선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감자 먹는 사람들, 1885년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처음 갔을 때 한 화가의 동상을 보았습니다.

읽기도 어렵고 생소한 이름이었지요.

그는 화가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François Daubigny,1817-1878)

1817년 파리에서 태어난 도비니는 사실적인 풍경과 일하는 사람들을 그린 장 프랑수아 밀레, 테오도르 루소와 함께 바르비종화파의 일원으로 느슨한 붓놀림으로 풍경을 그리던 화가입니다.


도비니는 1854년부터 오베르 쉬르 우아즈에 정착하여 인상주의 운동의 선구자로, 처음으로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우아즈 강의 수면에 비치는 빛의 현상을 표현하는 기법을 개발하였으며, 유명 작품인 <오베르의 겨울>은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도비니는 피사로, 르느와르, 모네, 세잔과 같은 유명 화가들과 공동으로 작업실을 설계하고 장식하였는데 그것이 지금껏 남아있는 도비니 작업실 (Atelier de Daubigny)입니다.

안타깝게도 내가 방문한 시간에는 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오베르의 겨울(도비니, 오르세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는 '도비니의 정원'을 세 번이나 그렸는데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림 중 하나를 이렇게 설명했지요.


 "이것은 내가 가장 신중하게 그린 캔버스 중 하나야. 전경에는 녹색과 분홍색 풀이 있고 왼쪽에 녹색과 라일락 덤불, 그리고 희끄무레한 잎이 있는 식물 줄기가 있지. 가운데에는 장미꽃이 무리 져 피어있고 오른쪽 벽 위에는 보라색으로 단풍이 든 개암나무가 있어. 그리고 라일락 울타리와 둥근 노란색 라임 나무가 늘어서 있단다. 정면에는 분홍색 벽이 있는 집이 있고 그 앞으로 테이블과 의자 3개, 노란색 모자를 쓴 어두운 사람과 검은 고양이가 있는 그림이야. 너도 맘에 들면 좋겠구나. "      




고양이가 있는 도비니의 정원
마을 어귀에 있는 도비니 동상
도비니 아틀리에




1890년 5월 20일, 고흐는 테오와 함께 가셰박사의 주선으로 라부 여인숙 (Auberge Ravoux)에 도착했습니다.

고흐가 묵었던 방값은 하루에 1프랑, 세끼 식사 비용 2.5프랑, 총 3.5프랑이었어요. 

고흐가 살았던 여인숙이자 카페는 현재 <고흐의 집>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1층에는 고흐가 하루 세끼 밥을 먹었던 식당이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있고 2층에는 기념품 샵이, 3층에는 여인숙으로 쓰였던 작은 방들이 있습니다.

그곳은 예약제 가이드 투어로만 운영되고 있더군요.

티켓을 사면서 가장 가까운 시간을 물으니 1시 30분이라고 합니다.

그 시간으로 예약을 했지요.




라부 여인숙(지붕에 보이는 작은 천창이 있는 다락방이 고흐가 묵었던 방)
라부 여인숙 1층의 식당
반 고흐의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표시
티켓 오피스
고흐가 활동했던 시대별 설명이 되어있는 패널
고흐의 집 티켓




고흐의 죽음은 타살이다라는 설이 있습니다만 완전하게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알려진 대로 당시 상황을 더듬어본다면 이렇습니다.


고흐는 스스로 총을 쏜 후 가까스로 여인숙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여인숙의 주인 라부는 어디선가 지속적으로 들리는 신음 소리를 듣고 3층으로 올라가 그의 치명적인 상태를 발견했지요.

전화를 받은 가셰 박사가 급히 달려와 치료를 했지만 희망은 거의 없어 보였습니다.

아무런 장비도 없는 그곳에서 수술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며 울퉁불퉁한 길을 달려 가까운 퐁투아즈 병원으로 이송할 시간도 없고 그의 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판단했지요. 

고흐는 부상에도 불구하고 가셰 박사에게 파이프 담배를 피우게 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그는 허락했습니다.

옆 방에 기거하던  히르시는 빈센트가 밤새 신음하는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다음날 고흐가 총을 맞았다는 소식을 접한 경찰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거친 어조로 물었지요.

'대체 왜 자살을 시도한 거요?'

정신은 명료했던 고흐는 모기소리처럼 작은 목소리로 자신은 단지 부상을 입은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다음 또 다른 질문에 고흐는 입을 다물었고 경찰은 더 많은 것을 알아내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정오 무렵 가셰 박사의 메시지를 받은 테오가 급히 라부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형제는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마지막 밤을 나눕니다. 

테오는 여전히 그의 형이 회복될 것이라고 믿고 싶어 했지요.

그러나 다음 날 새벽 1시 30분, 빈센트 반 고흐는 테오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빈센트는 고작 37세였고 그림을 그린 지 겨우 10년이었습니다.

아침이 되고 라부는 테오와 함께 사망 신고를 하기 위해 시청으로 갔습니다.

     

빈센트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인 화가인 에밀 베르나르(Emile Bernard)가 오베르에 도착했을 때 식당 한쪽의 테이블 위에 그의 관이 놓여 있고, 꽃과 그의 그림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오베르의 신부인 수도원장이 자살한 그의 장례식을 거부했기 때문에 장례 미사는 치를 수 없었습니다.

딱한 사정을 아는 라부는 그의 여인숙에서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해 준 것입니다.

1890년 7월 30일, 아르투르 라부는 테오, 닥터 가셰, 에밀 베르나르, 피사로 등과 함께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이웃 마을인 메리 쉬르 우아즈에서 빌려준 영구차에 관을 싣고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밀밭 방향에 있는 오베르 묘지로 향했습니다.

 

장례식이 끝난 후 가셰 박사가 가져간 것은 그의 아들과 딸이 대부분 박물관에 기부하여 오늘날 오르세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테오는 감사의 표시로 형의 그림 몇 점을 라부에게 주려고 했지만 라부는 그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빈센트가 여인숙에서 그려준 그림 두 점(파란색 드레스를 입은 애들린의 초상화와 7월 14일 시청의 풍경)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족하다고 했지요.

그리고 몇 년 후, 뮬랭에 살고 있던 라부는 반 고흐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화가에게 그 그림 두 장을 팔았습니다.

그가 받은 돈은 고작 40프랑이었습니다.

                                  



아들린 라부의 초상
7월 14일 오베르 쉬르 우아즈 시청




테오는 빈센트의 유품을 챙긴 후 파리로 돌아가 다시는 그곳에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1890년 6월 10일 라부여인숙에서 쓴 편지에서 테오에게 다음과 같이 털어놨습니다. 

'카페에서 내 전시회를 여는 게 내 꿈이야.'     

하지만 테오는 형의 꿈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6개월 후 네덜란드에서 사망했습니다. 

1914년 그의 미망인은 네덜란드에 묻혀있던 테오를 오베르에 있는 그의 형이 있는 곳으로 이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형제가 주고받은 편지를 모아 출판을 했지요.

그것이 <반 고흐 영혼의 편지>입니다.

  

그의 식단은 주로 빵과 커피, 그리고 포도주는 물론이요, 압생트를 과도하게 마셨으며 그의 손에 파이프가 들려있지 않은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그림도구를 챙겨 여인숙을 나서서 그림을 그리고, 저녁이면 동생 테오에게 오늘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를 편지로 쓰면서 외로움을 달랬던 고흐는 자신의 천재적인 정신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고통으로 생을 마감한 거죠.



가이드를 따라 나를 포함한 5명이 삐그덕거리는 계단을 밟고 3층으로 향했습니다.

왠지 모를 긴장감에 발걸음이 조심스럽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자마자 첫 번 째 방 5호실이 고흐가 묵었던 방입니다.

가이드는 우리에게 그곳은 고흐를 기리는 뜻과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남겨두기 위해 사진 촬영을 금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곳은 정말 믿을 수 없이 좁더군요.

태어나서 그렇게 작은 방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 좁은 공간 하나만으로도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이 전해졌습니다.

천장에 작은 창이 하나 있고 놓여있는 의자로 그곳의 사이즈를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약 2.2평,

도무지 사람이 기거할만한 공간이 아니었지요.

불안전한 5 각형 형태의 방은 마치 감옥을 연상시켰습니다.

고흐는 침대 밑에 화구와 캔버스들을 보관했다는데 과연 침대가 들어갈 수는 있을까? 할 정도로 비좁았지요.


그곳을 방문했던 누군가가 이런 글을 썼더군요.

'그 방은 볼 것도 없으니 굳이 안 가도 됩니다.'

그래요, 볼 것은 없으나 많은 생각과 울림이 있었습니다.

그가 당시 사용했던 가구는 자살을 한 사람의 것이라는 이유로 모두 내다 버렸고 고흐가 죽은 후 아무에게도 임대되지 않은 채 비어 있었지요.


바로 옆방인 6호실은 무명 화가인 안톤 히로시히가 살고 있었다는데요.

그곳은 고흐의 방보다 훨씬 넓고 단순하고 투박한 가구들이 갖추어져 있어서 상대적으로 고흐의 방과 더 비교되어 감슴이 아프더군요.     




사진에서 느껴지는 것보다 훨씬 작습니다.



라부 여인숙의 식당 유리에는 이런 말이 쓰여있습니다.

'우리는 그를 무척 좋아했어요. 우리는 그에게 빈센트 씨라고 불렀지요.

그는 매일 정오에 식당으로 왔고 우리가 가져다주는 음식을 남긴 적이 없고 매우 신사적인 분이었어요.'


마지막 방으로 안내된 우리는 고흐의 삶을 축소하여 만든 슬라이드를 감상했습니다.

의자도 없이 허름한 방 한쪽 벽에 기대앉아 흑백 사진과 그의 그림으로 엮은 짧은 영상을 보는 동안 눈물이 고였습니다.

이 영상은 약 10분의 길이인데 이곳에 업로드할 수 있는 한 개의 용량이 500mb로 제한되어 있어서 세 개로 나누었습니다.

스마트폰으로 촬영한 것이라 화질이 썩 좋지는 않으나 한 번쯤 보시길 권합니다.



 

고흐의 집 슬라이드쇼 1
고흐의 집 슬라이드쇼 2
고흐의 집 슬라이드쇼 3



나름 긴장을 하고 있었나 봅니다.

영상을 보고 밖으로 나오니 맥이 풀리더군요.

2시가 넘었으니 꽤나 시장합니다.

이제 고흐가 매일 식사를 했던 곳에서 밥을 먹어야겠어요.


레스토랑 내부에는 그 어디에서도 고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 흔한 그림 한 장 걸려있지 않은 게 그곳을 더 돋보이게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마치 그 시절과 똑같은 느낌이 들도록 말이죠.

당시 사용하던 투박하고 오래된 테이블과 의자, 오랜 세월 동안 걸려 있어 잘 보이지 않는 닳아빠진 거울, 그 시절 사용했을 법한 모양의 작은 와인 잔 등, 그 모든 것이 그랬습니다.

모르고 들어갔더라면 고흐가 드나들던 곳이라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할 그냥 시골의 허름한 음식점의 모습이었지요.




라부 여인숙 1층 카페
오래된 전등
낡은 거울
페인트칠이 되어 있는 벽




흑돼지로 만들었다는 햄 요리, 사이드로 삶은 감자와 와인을 주문했습니다.

그야말로 삶은 감자 몇 알이 투박한 옹기그릇에 담겨있고 거친 호밀빵은 나무 바구니에 담겨서 나왔어요.

단무지 같은 노란 무와 피클, 보랏빛이 나는 샬롯 몇 조각이 얹힌 고기는 우리나라 편육 같은 모양입니다.

그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과 역시 그 지역에서 재배하는 유기농 재료를 이용하는데 메뉴와 조리법 역시 1890년대 당시를 재현했나 보구나 싶었습니다.

드디어 고흐가 먹던 음식을 먹어볼 시간입니다.

돼지고기를 조금 잘라먹어보니 누릿 내가 강했어요.

고기 냄새를 잘 견디지 못하는 입맛이라 빵과 감자와 토핑 된 채소만 열심히 먹었습니다.

묵직하면서 살짝 드라이한 와인이 구세주였습니다.

라부 여인숙의 사진이 인쇄되어 있는 계산서는 기념으로 가져갈 수 센스 있게 만들어져 있어서 챙겨 왔습니다.




점심 식사
계산서




음식점에서 나오니 억수 같은 비가 퍼붓습니다.

돌아가는 길은 버스를 타고 발몽두아역으로 가서 H라인 기차를 타야 파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날 저녁 8시에 라디오 프랑스 필의 연주에 가야 해서 숙소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필하모니 드 파리까지 가자면 시간 여유가 많지 않았지요.

9507번 버스를 타는 곳은 살짝 언덕길인 데다가 시골실이라 인도가 따로 없었습니다.

차량이 지나가면서 물을 튀기고 백팩이 젖고 있었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숙제를 정성껏 잘 마친 기분이었지요.


<압생트가 있는 카페 테이블>이란 그림을 볼 때마다 프랑스에 가면 꼭 한 번 마셔보리라 다짐을 하곤 했었습니다.

아쉬움이 있다면 라부 여인숙 2층 기념품 샵에서 그림과 함께 판매하던 압생트를 계속 째려보기만 하다가 안 샀다는 겁니다.

뭐 하지만 그 또한 괜찮습니다.

숙소에는 마시다 남은 위스키가 있으니까요.

19세기 파리의 많은 예술가들의 영혼을 훔쳐갔던 그린색의 요정 압생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따로 하겠습니다.




압생트가 있는 카페 테이블
2층 기념품 샵
압생트 스푼과 잔
반 고흐 집의 압생트
슬라이드 마지막 화면,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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