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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6. 2016

‘아더메치’한 세상을 향해
내뱉는 조롱

‘백야행’과 ‘하녀’ |  ‘백조의 호수’와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두 영화의 공통점은 리메이크 작품이라는 것, 충무로의 보증수표라고 일컬어지는 배우 손예진과 전도연이 각각 주연으로 세간의 관심을 모으며 흥행에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걸린 마법을 풀어드리겠습니다. 언제라도 당신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다.’ 


영화 ‘백야행’은 처음부터 끝까지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 중 ‘정경’이 흐른다. 영화는 발레로 유명한 ‘백조의 호수’와 비슷한 부분이 있습니다. 완벽한 사랑의 약속을 얻어야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는 오데트 공주는 지크프리트 왕자의 사랑이 절실히 필요했고, 미호(손예진) 역시 자신에게 씌워진 저주를 벗기 위해 요한(고수)의 사랑을 필요로 했지요.

 

Swan Lake

 

  로열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는 지크프리트 왕자와 오데트 공주가 함께 죽음으로 해서 끝을 내지만 볼쇼이 발레단은 사랑의 힘으로 악마를 물리친 오데트가 백조의 마법에서 풀려나  사랑의 결실을 맺습니다. 그와 비교한다면 ‘백야행’은 볼쇼이의 결말을 닮았습니다. 요한은 죽고 그 죽음을 외면한 채 하얀 드레스를 입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의 미호가 그랬지요. 하지만 미호는 오데트가 아닌 악마의 딸 오딜, 즉 흑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저 걷기만 해도 좋을 것 같다는 작은 소원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 소년과 어머니를 죽인 소녀는 14년이란 긴 세월 백야를 각자 홀로 걸었지만 기다림만으로 해결될 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신분제도가 사라졌다? 그리 믿으십니까? 계급은 아직 존재한다는 생각입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렛의 코르셋을 조이던 뚱뚱한 흑인은 차라리 눈물겹게 아름다운 하녀였지요. 사소한 일까지 인권 침해를 왈가왈부하는 현시대에도 엄연히 신분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제도적인 규정의 선을 긋지 않았을 뿐 실제는 더욱 비참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하지요. 하녀에서 식모, 가정부, 그리고 가사 도우미로 호칭은 점점 고상하게 바뀌었지만 그들의 위치나 가치가 높아진 건 아닙니다.      


  영화는 연기·연출·촬영·미술·음악 등 여러 측면에서 눈만 호사했을 뿐 뚜렷한 메시지의 전달력, 즉 화두가 없었습니다. 한국영화 사상 최대 규모로 50억 미술작품이 등장하고 영화의 70% 이상을 촬영했다는 700평의 대저택은 성이요, 갤러리였어요. 화이트 블루와 블랙이 대저택의 호화스러움을 더욱 잘 표현해주었는데, 처음부터 눈에 띄던 거대하고 화려한 샹들리에는 충격적인 엔딩신에서 그 가치를 발했습니다. 완벽한 소믈리에처럼 부의 상징인 와인을 즐기며 아침마다 그랜드 피아노를 연주하는 주인 남자 훈(이정재)의 분위기는 왕자, 아니 황제의 포스였으며 유일한 아름다움이기도 했습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폭풍’ 3악장과, 26번 ‘고별’ 1악장은 스토리를 예고하는 장치로서 선택된 곡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Tempest - 3rd  ,  Valentina  Lisitsa


  주인 여자 헤라(서우)는 쌍둥이를 가진 만삭의 임산부로 늘 마리아 칼라스의 오페라 아리아를 듣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늘 듣는 곡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의 집 하인이던 제라르에게 셰니에를 구해달라며 그를 사랑하기에 비참한 생활을 견디어 왔다는 내용의 오페라 ‘안드레아스 셰니에’ 중 아리아 ‘어머니는 돌아가시고’입니다. 태교를 위한 음악이라면 마땅치 않은 곡이죠.      


  그 곡은 하녀 은이(전도연)의 복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요. 은이는 자신에게 반강제로 낙태시킨 것에 대한 복수로 주인집 식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수억 원짜리 샹들리에에 목을 매단 후 분신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도 꿈쩍하지 않지요. 애완견만큼도 못하게 무가치한 이름, 하녀이기 때문입니다. 은이의 복수는 실패지요. 그녀의 죽음은 소름 끼치는 안티 클라이맥스일 뿐이었습니다. 고참 하녀 병식(윤여정)이 툭하면 내뱉던 대사 ‘아더메치’(아니꼽고 더럽고 메스껍고 치사한), 그 말은 너나 할 것 없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통을 한 마디로 대변해 주는 말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또한 어쩌면 우리 모두는 하녀의 일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씁쓸해지더군요.        





La mamma morta  -  Maria Call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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