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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28. 2024

우연히 카사노바, 어쩌다 창업의 꿈?

8. Vrsar, Poreč, Bale







플리트비체 국립공원의 11시 티켓을 예약한 A 자매들은 오늘 새벽 5시에 이미 숙소를 출발했을 터고

B와 나는 근처의 작은 해변 마을에 갈 예정이다.


여행지를 정하는 기준은 이미지가 우선, 그러니까

일단 예뻐야 한다.

구글에서 스몰 빌리지를 검색한 후 사진과 추천 이유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 잘 알려지지 않은 작은 마을들을 찾을 수 있다.

브르사르(Vrsar)주차장은 마을의 비교적 높은 위치에 있었다.

주차정산기를 찾을 수 없어 개를 산책시키고 있는 주민에게 물어보니


'우리 동네는 공짜라우.'


하며 웃어 보였다.

주차요금이 1시간에 1.5~2유로이니 3시간이라면 커피 값은 번 셈이다.

흩어져 있는 섬들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의 반도에 위치한 브르사르의 해안으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동네 어귀 나무 밑 테이블에 주민들이 음료를  마시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벽 쪽에는 누군가 앉아있는 모습의 청동 조형물이 있는데 장난스럽게 스카프를 묶어놓았다.

여자 같기도 하고 남자 같기도 하다.

가까이 가보니 그 인물은 '자코모 카사노바'(Giacomo Girolami Casanova, 1725년, 베네치아~1798년, 체코)이다.







바람둥이의 대명사로 알려진 그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난 모험가이자 작가, 시인, 소설가를 자칭한 범죄자, 사기꾼이다.

자서전이며 회고록이기도 한 그의 저서 <나의 인생 이야기(Histoire de ma vie)> 서문에서 '나는 인생을 살아오면서 내가 행한 모든 일이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자유인으로서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 살아왔음을 고백한다'라고 썼다.


베네치아의 두칼레 궁전과 피옴비 감옥을 잇는 다리는 일명 '탄식의 다리'라고 불린다.

카사노바가 감옥에 갇힐 때 그 다리를 건너며 이제는 영영 이 다리를 건너오지 못할 거라며 탄식했다고 하여 붙여졌다.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는 역사상 그 감옥을 탈출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신장 187, 준수한 외모와 수려한 언변으로 그의 곁에는 늘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1742년, 17세의 나이로 파도바 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성직자 신분에도 여성 신자들을 꼬시는 등 일탈 행위를 일삼았고 그를 둘러싼 구설수들이 나오자 교회에서 그를 쫓아냈다. 그리고 바람둥이 행각이 시작되었다.     


성직자로 살 수 없게 된 카사노바는 20세에 군대에 입대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건너갔다가 이탈리아 반도로 돌아왔다. 화려한 언변과 재능으로 여자들을 유혹했는데, 22세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귀족이자 상원의원이었던 마테오 조반니 브라가딘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더 거칠 것이 없어졌다. 가문 빨, 돈빨로 카사노바는 각 지역을 돌아다녔다. 27세에서 29세까지는 파리에 거주했으며 여행 중에 만난 모든 여자들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들였다. 카사노바 자신의 회고록에 의하면 122명의 여자들을 안았다고 한다.   

  

그는 나이 30세에 베네치아에서 난교 파티를 열었는데 이때 수녀까지 끌어들였다가 카사노바를 탐탁지 않게 여긴 귀족층에서 그를 "이성을 유혹하는 이단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라는 죄목으로 체포했고 5년형을 선고받고 1년간 두칼레 궁전에 있는 피옴비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것이다.

년에는 매독으로 오래도록 고생하다 생을 마쳤다.


그의 어록을 보면

- 나는 느낀다. 고로 존재한다

- 나는 여자를 사랑했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것은 자유였다.

- 그들이 나를 감옥에 가둘 때 나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누구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이 감옥을 떠나노라.

- 나는 여자를 위해 태어났다는 사명을 느꼈으므로 늘 사랑했고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내 전부를 걸었다.  (출처;나무위키 중 발췌)

                                




여동생이 그린 초상화




카사노바는 1742년에 연인과 함께 브르사르에  잠시 머물렀다고 한다.

이스트리아 반도에 있는 대부분의 크로아티아 도시들이 옛날 베네치아 왕국에 속했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런데 브르사르에서는 카사노바가 그곳에 머물던 것을 기념하는 축제가 있다고 한다.







그곳은 그냥 한적한 어촌 마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해안 도로에 하늘색 꼬마 기차 모양의 투어 차량이 들어섰다.


'한 바퀴 돌아보는데 40분 걸린다는데 타볼까요?

'그러자.'


독일어를 쓰는 가족들과 역시 독일어를 쓰는 부부와 함께 차량에 올랐다.

걷기엔 다소 힘든 오르막길을 누비며 아름다운 골목길을 안내하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 차량은 마치 마을버스처럼 여기저기 멈춰 서서 동네사람들과 잡담을 나누기 일쑤였다.

결국 우리가 주차장에서 내려오다 보았던 카사노바가 앉아있던 그 길을 마지막 코스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헛웃음이 나왔지만 2 사람이 10유로니 그리 나쁘진 않다.  










아직 점심 식사 시간은 안되었지만 간단히 요기를 하기로 했다.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 들어가니 마침 메뉴에 깔라마리가 있어 음료와 함께 주문을 했다.

그런데 루꼴라가 얹힌 피자와 깔라마리가 함께 서빙되었다.


'피자는 주문하지 않았는데요.'

'네~ 알아요, 이건 서비스예요.'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일단 감사의 말을 전하고 음식을 먹어보니 훌륭하다.

튀긴 오징어는 연하고 감칠맛이 그만이다.

프랜치 프라이와 데친 콜리 플라워, 거기다 버터로 볶은 짭조름한 시금치가 잘 어울렸다.

서비스로 준 루꼴라 피자에 올리브 오일을  듬뿍 뿌려 먹으니 그 또한 담백하며 고소하다.

식사가 끝날 무렵 또다시 서비스라며 작은 잔에 담긴 리몬첼로를 가져다준다.

소박한 시골의 친절한 서비스와 알딸딸한 리몬첼로에 기분이 업되었달까?

다음 목적지 포레치(Poreč)까지 향하는 길이 훨씬 가벼웠다.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 중 한 곳인 포레치는 우선 시간적으로 붐비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브르사르에 비해 훨씬 크고 번화한 해변 도시였다.

소나무가 줄지어 늘어선 도로변 주차장은 이미 빈틈없이 자동차로 빼곡했다.

한 바퀴를 크게 돌아보니 마침 차 한 대가 출차를 한다.

작은 차가 주차했던 공간이라 비좁았지만 가까스로 끼워 넣을 수 있었다.

그것만도 럭키하다.

내 뒤에 주차를 하러 줄줄이 차량들이 들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보트 택시를 홍보하는 파라솔이 늘어선 해안선은 꽤 길었고 백사장이 있는 곳에는 선탠과 수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꽤 많다.

레몬과 피스타치오 젤라토를 먹으며 오가는 사람 구경을 했다.

광장에는 깔깔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하고 일요일이라 상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았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식사를 하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유프라시우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티켓 오피스가 보였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등재된 유프라시우스 대성당(Euprasius Basilica)은 로마 가톨릭 대성당으로 이스트리아 지역의 대표적인 비잔틴 건축물이다.

내부의 모자이크는 대부분 금으로 만들어져 화려하다.



     

유프라시우스 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
유프라시우스 성당


어머니 마리아와 아이가 있는 모자이크. 왼쪽에서 두 번째: 교회 모형을 들고 있는 성 유프라시우스(St. Euphrasius)




그날 행선지 중 가장 궁금했던 곳 베일(Bale, Valle),

미국의 한 저널리스트가 미치도록 아름다운 곳이라고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곳 주차장 역시 무료,

그런데 도무지 미치도록 아름다울만한 게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냥 평범한 시골 동네다.

화장실도 갈 겸 일단 커피를 한 잔 마시기로 했다.

레스토랑 안쪽에는 생일 파티를 하는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테라스에서 맞은편을 바라보니 교회 첨탑이 보였다.

그쪽에 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자갈이 깔린 좁은 골목 안은 마치 요새 같았다.

돌을 쌓아 만든 집의 문 밖은 마치 야외 거실처럼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어김없이 꽃이 있다.

빨래는 걸려있는데 도무지 사람구경을 할 수 없다.










소아르도 벰보 성(Soardo Bembo Castle) 사이의 골목으로 발을 들여놓았다가 싱코홀처럼 빠져나오지 못했다.

마법의 골목처럼 빨려 들어간 그곳에는 정적인 컬러의 집들이 참하게 어깨를 겯고 있었다.

내게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으라는 약간은 개구쟁이 같고 선한 표정의 아빠를 꼭 빼닮은 딸은 아빠 뒤로 숨는다.




소아르도 벰보 성















여긴 또 뭐래?

보물 창고 같은 곳이 나타났다.

연극 무대 세트 같기도 하고 설치 미술을 전시한 공간 같기도 하다.

집이 허물어진 공터에 온갖 앤틱 물건들을 파스텔톤의 컬러로 장식을 해놓았는데 여간 공을 들인 게 아니다.

부서진 액자, 고물 자전거, 못쓰는 창틀 같은 폐품을 이용했지만 하나하나 정성이 깃들어져 있다.

무엇보다 무심한 듯 자연스러운 컬러 매치가 맘에 다.

돌이 튀어나오거나 자연스레 벽이 뜯겨 나간 질감, 자칫 딱딱해 보일 수 있음을 커버하는 방석과 용도가 불분명한 커튼 등이 신의 한 수였다.

 

그곳은 언뜻 보기에는 야외 카페 같지만 음료, 식사 등을 할 수 있는 아틀리에로 8월엔 재즈 페스티벌도 열린단다.

미치도록 아름답다는 그 여행자의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적어도 내겐 그럴만한 곳이다.

그런데 그곳에도 카사노바 사진과 안내문이 있었다.

아주 구석구석 안 다닌 곳이 없었군요, 카사노바 씨!












자코모 카사노바가 베일에 머물렀다는 안내문




'우리 여행 끝내고 돌아가면 이런 유럽풍 빈티지 카페 하나 차리는 게 어때?'

'좋~지요'

'네가 찍은 사진도 걸어놓고... 망가진 의자도 예쁘게 색칠해서 걸고 위스키랑 칵테일 몇 가지에 샐러드, 파스타, 치즈 플래터 같은 메뉴로 간단히 있잖아.

거기다 음악도 잘 알겠다, 대번 소문나서 장사가 잘 될 것 같은데?'

'맞아요, 유럽 할머니 같은 사장님이 새로 오픈한 카페가 무척 쿨하다고 바로 소문이 뜨르르 날 거예요.'


<Kamene Price>라는 독특한 카페에서 영감을 얻으신 B는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창업의 의지를 적극적으로 내비치셨다.

그리고 농담 반, 진담 반의 대화로 눈물이 쏙 빠지게 웃고 또 웃었다.

운전이 어려울 정도로 깔깔대며 웃다 보니 어느새 풀라 숙소에 도착했다.

그 후로도 종종 빈티지 카페 얘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곤 했다.

엉뚱한 상상이지만 엔도르핀이 솟아났던 걸 보면 가능할 수도?










'카페 이름은 부오나 세라(Buona sera) BB!

 어때요?'

'좋은데~'


*여기서 BB는 보비라는 이름(본명,77세) 멋쟁이 숙모로 이번 여행의 메이트의 이니셜이




BB의 뒷모습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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