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브라쇼브
낡은 게 편안합니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낡음과 늙음에 대한 생각을 곁에 두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오래된 것 만이 갖고 있는 고고함,
겹겹의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힘,
그런 것이 마음을 누긋하게 합니다.
오래된 중세 마을을 걷다보면 내가 살아보지 못한 누군가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 듯합니다.
그 낯선 풍경들은 이상하리만큼 늘 어색하지 않아요.
집과 담도 생명이 있나 봅니다.
낡았다기보다 늙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면요.
담장에 늘어진 빨간 이파리들에게서 내 나이를 봅니다.
저렇게 고울 수 있으면 좋겠지요.
하지만 껍데기보다 마음의 주름살이 더 중요합니다.
살아있는 동안 삶의 무게가 가벼우면 좋겠습니다.
공원에는 아직 푸른 옷을 입고 있는 나무들과 죽어서도 눕지 못한 위인들의 동상들이 서 있습니다.
목적 없이 그냥 길을 따라 걷습니다.
광장이 나타나고 각각의 이름이 붙여진 문과 광장과 성당을 차례로 만나게 됩니다.
브라쇼브는 그만큼 작습니다.
어느 나라, 어느 도시를 가던지 적으로부터의 방어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탑과 요새들이 많습니다.
먼 옛날일수록 영토를 빼앗기 위한 싸움이 많았습니다.
불타고 고치고 새로 짓고 오랜 시간을 지켜온 브라쇼브 조상들의 애씀이 여기저기 남아 있습니다.
멀끔하게 차려입은 소년이 뻘쭘하게 꽃을 들고 서 있습니다.
브라운 컬러의 외투, 허리에 맨 화려한 벨트가방, 그리고 멋진 운동화까지 보통 멋쟁이가 아닙니다.
옆에 놓인 가방속에 꽃다발이 수북하게 들어있는 걸 보니 팔려고 나온 모양입니다.
바이아 마레의 시장에서 할머니에게 샀던 꽃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주근깨가 귀여운 소년의 얼굴은 자전거라도 타다가 넘어졌는지 입술과 손등에 상처가 남아 있어요.
꽃을 팔려고 하는 의지 없이 그냥 입을 꾹 다문채 서있는 쑥스러움이 귀여웠습니다.
'사진 찍어줄까?'
고개를 끄덕하더니 더더욱 동상이 되어버린 소년, 갖고 있던 사탕 몇 알을 전해주었지요.
우연히 맘에 드는 카페를 발견했습니다.
빈 테이블이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붐비는 그곳은 브라쇼브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블랙 처치이고 바로 앞에 있는 카페 채널 9입니다.
진짜 오랜만에 만난 믹스드 베리 타르트와 카푸치노는 환상의 궁합이었습니다.
손바닥보다도 작은 파이 한 조각에 기분마저 달달해졌지요.
블랙 처치의 티켓 판매소 옆으로 작은 상점이 있어서 들어가보았습니다.
아기자기한 인형과 소품들이 무척 많습니다.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생길 정도로 예쁜 것들이 가득했지요.
맛있는 커피에 눈호강까지 하고 나니 브라쇼브가 갑자기 사랑스럽습니다.
블랙 교회는 브라쇼브에서 가장 독특한 랜드마크이자 루마니아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교회입니다.
1689년 대화재로 마을 대부분이 파괴되고 교회 벽이 검게 변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복원하기까지 거의 100년이 걸렸습니다.
비엔나와 이스탄불 사이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교회로 7톤짜리 종은 루마니아에서 가장 크고 무겁습니다.
내부에는 발코니, 스테인드글라스 창문, 거대한 오르간, 돌기둥이 장관입니다.
그리고 독특한 것은 교회 내부에 걸려있는 양탄자들인데 그게 뭔지는 몰라도 무척 귀한 대접을 받고있다는 느낌이 들었지요.
이것은 브라쇼브 상인들이 신에게 감사하기 위해 교회에 기부한 기도용 카펫 컬렉션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규모라고 해요.
교회 창문에 특수 자외선 차단 유리를 설치하여 변색을 보호한다고 하니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대우를 받는 카펫이 아닐까 합니다.
광장 한쪽의 시청 건물 벽에 독특한 그림이 있습니다.
그 그림은 길거리의 화분에서도 보았는데 나무뿌리 위에 왕관이 올려져 있는 조금은 신기한 형태입니다.
다른 나라에서 보던 나라들과 여러 가문들을 상징하는 문장과는 사뭇 다른 것이 뭔가 스토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브라쇼브의 문장인데요.
솔로몬왕의 왕관이 참나무 뿌리 위에 놓인 것으로 각각의 뿌리는 브라쇼브 주의 마을 32개를 상징합니다.
11세기, 헝가리의 솔로몬왕은 쿠만족의 침략을 받고 도망을 갔습니다.
쿠만족은 극도로 잔혹한 전사들로 길을 막는 사람은 누구든 죽이며 영토를 확장했지요.
솔로몬은 양쪽이 절벽으로 나뉜 깊은 숲에 도착하여 자신의 왕관을 근처의 나무줄기에 얹어놓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쳤습니다.
왕관을 쓰고 있지 않으면 누구도 왕이라는 걸 모를 거라 여긴 것이죠.
왕을 뒤쫓던 쿠만족은 왕관을 발견하고 왕이 절벽으로 떨어져 죽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후 솔로몬은 말을 타고 절벽을 뛰어넘어 동굴에 숨어 살아남았는데요.
오늘날 그 지역을 솔로몬의 계곡이라고 부른답니다.
수백 년이 지나 숲을 걷던 한 농부가 왕관을 발견하여 시장에게 가져다주었지요.
브라쇼브는 왕관의 도시(독일어로 크론슈타트)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왕관이 발견된 장소가 바로 브라쇼브 의회 광장에 있는 의회 건물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그곳에 솔로몬의 왕관이 올려진 나무뿌리 모양의 커다란 문장이 생긴 겁니다.
비둘기들이 떼 지어 선회하는 의회 광장(스파툴루이 광장)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골목에서 한 무리의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의 표정에는 온통 환희로 가득찼습니다.
학생들의 손에는 여러 나라의 국기가 프린트된 커다란 현수막이 들려 있었는데 한가운데 ESN이라는 글씨가 쓰여있더군요.
그것은 루마니아 에라스뮈스 학생 네트워크(ESN)가 주최하는 핼러윈 이벤트의 하나였습니다.
루마니아의 독특한 문화유산, 그러니까 인근의 브란 성(드라큘라 성)과 여러 전설을 바탕으로 한 지역들을 돌아보는 축제로 학업이나 인턴십을 위해 루마니아로 온 유학생들이 참여하며 201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쉽게 말해 유학생들의 대규모 파티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호러 파자마 파티, 핼러윈 파티, 드라큘라 익스프레스 보물찾기, 깃발 퍼레이드 등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며 트란실바니아의 문화유산 곳곳을 여행한다고 합니다.
광장 주변의 레스토랑의 테라스 좌석은 어디나 거의 만석입니다.
그곳에서 살짝 벗어난 한적한 레스토랑 데이 프라티(Dei Frati)를 찾아갔지요.
그곳 역시 빈좌석이 없었고 이미 저녁 식사 예약도 끝났다고 하더군요.
우리만 구글을 찾아보는 게 아니니까 당연한 결과겠지요.
평점 4.8에 4848개의 리뷰가 있으니 그야말로 보증된 맛집임이 분명합니다.
할 수 없이 다시 광장으로 나와 돌리시마(Dolissima)라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습니다.
테라스석은 이미 만석이라 선택의 여지없이 실내 좌석에 앉았지요.
병아리콩을 곁들인 아보카도 샐러드와 여러 종류의 고기와 감자튀김이 있는 2인용 BBQ 그릴을 주문했습니다.
주문과 서빙이 늦어지는 것은 손님이 많은 이유도 있지만 종업원의 수가 현저히 부족한 탓입니다.
루마니아는 대체로 그런 편이었지요.
한참을 기다린 후에 거대한 철판 플레이트가 테이블 위에 서빙되었는데요.
너무나 많은 양의 고기와 감자튀김은 먹기도 전에 질릴 정도였어요.
그런데 문제는 양이 아니라 맛입니다.
고기는 질긴 데다 누린내도 나고 프렌치 프라이 마저 질깁니다.
어떻게 손가락만하게 굵게 썬 감자튀김이 질길 수 있는지 모를 일입니다.
유럽의 감자는 우리나라보다 전분이 많아 파근파근하고 고소해서 뭘 만들어도 맛있습니다.
아마도 너무 오랫동안 냉동되어 수분이 모두 빠진 감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소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소시지, 감자튀김 중 뭐 하나 맛있는 게 없었지요.
샐러드 위주로 먹다가 포크를 놓았습니다.
계산서를 달라고 하니 포장해 줄까 묻습니다.
괜찮다고 했지요.
더 놀라운 건 주문부터 음식까지 뭐 하나 제대로인 게 없던 그곳은 서비스 팁을 받더군요.
간혹 고급 레스토랑들은 10%,15%,20% 중 고객의 선택에 따라 서비스 피를 받지만 유럽 대부분의 레스토랑은 서비스 팁은 자율적입니다.
게다가 음식값은 이번 여행 중 최고가였지요.
값은 최고로 치렀지만 도무지 식사를 마친 느낌이 안 들고 찜찜합니다.
물론 값도 저렴하고 맛도 있는 게 최고지만 맛만 있다면 비싼 가격도 용서가 되지요.
하지만 형편없는 서비스에 질 떨어지는 식사를 하고 비싼 값을 지불하는 건 영 기분좋은 일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4.8의 평점에 1,000개가 넘는 리뷰가 있는 돌리시마(Dolissima), 브라쇼브에 가시면 참고하세요.
광장 한쪽 산 위에는 마치 할리우드의 산 위에 설치된 입간판처럼 Brasov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그 산의 이름은 탬파(Muntele Tâmpa),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고 브라쇼브의 전경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습니다.
가끔 길거리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들을 볼 수 있는데요.
그들이 커다란 자루를 매고 다니며 줍는 건 PET병입니다.
루마니아는 PET 병에 담긴 음료를 구매할 때 보증금을 함께 지불하는데 빈 병을 반환하면 이 보증금을 돌려받는다고 해요.
즉 우리나라의 맥주나 소주를 구입할 때 병값을 지불하고 나중에 반환받는 방법과 같은 시스템인데요.
루마니아에는 연간 20,000톤의 PET병을 재처리할 수 있는 생산 시설을 보유하고 있답니다.
그것은 코카콜라와도 상관관계가 있는데요.
루마니아는 어딜 가나 유독 코카콜라 광고판이 많은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코카콜라로 도배되다시피 한 마을을 지나친 적도 있었지요.
대체 여긴 왜 저렇게 코카콜라 광고도 많고 판매하는 곳도 많을까? 궁금했지요.
루마니아의 공산주의가 붕괴된 후 코카콜라 회사는 그곳에 막대한 투자를 하여 제품을 생산 유통하기 시작했고 플로이에슈티 (Ploiesti)에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코카콜라 공장이 있다고 해요.
루마니아는 동유럽의 코카콜라 소비량의 약 70%를 생산하는 나라라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PET병을 재처리할 수 있는 대규모 공장도 갖게 된 것이지요.
브라쇼브에는 유럽에서 가장 좁은 골목인 로프 스트리트(Strada Sforii)가 있습니다.
이 길의 폭은 44cm~53cm이고 길이는 약 80m의 좁은 통로로 브라쇼브 구시가지의 두 길을 연결합니다.
이곳은 연인들이 부모 몰래 은밀히 만나는 데이트 장소였는데 그곳에서 키스한 커플은 결코 헤어지지 않는다는 믿기지 않는 속설이 전해진다고 해요.
사실은 그 좁은 골목은 화재가 났을 때 소방 로프를 끌어당기는 용도로 만든 길이라고 합니다.
그라피티와 낙서가 가득한 벽에는 여전히 낙서를 더하는 여행자들로 북적였습니다.
오늘도 맑음
루마니아에 있는 동안 단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매일이 맑음이라는 건 날씨 운이 무척 좋은 것인데 하루쯤 비가 내려도 좋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따릅니다.
그래요.
욕심입니다.
그래도 아쉬운 건 아쉬운 겁니다.
숙소로 돌아갑니다.
꽃을 팔던 소년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꽃을 다 팔았을까?'
저만치 숙소가 보이네요.
빨간 이파리들이 늘어진 담장 옆에 브라쇼브의 우리집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