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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Oct 03. 2016

설원의 사랑, 그 짧았던 불꽃놀이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





  영화 닥터 지바고에 빠져 살던 친구가 있었다. 그게 요인이 되었을까? 그녀는 러시아인과 결혼하여 시카고에서 살고 있다. 인생이란, 카메라의 초점에 현실이라는 타이머가 플래시를 터트리는 것과 비슷하다.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타이밍은 선택의 결과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사랑이라는 사진엔 타이머가 필요치 않다. 망설임 없이 셔터를 누를 수 있는 판단과 용기가 중요할 뿐이다. 그런 생각이 드는 영화가 있다. 


  <러브 오브 시베리아>로 번역된 영화의 원제는 ‘시베리아의 이발사 (Barber of Siberia: 울창한 숲을 단숨에 밀어붙이는 벌목 기계의 이름)’. 눈 덮인 러시아의 이국적인 정서를 배경으로 유쾌한 에피소드와 가슴 찡한 순애보가 교차하는 것이, 앙증맞은 소네트와 장중한 심포니가 맞물리는 음악의 분위기와 비슷하다. 롯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연상시키는 제목이지만 영화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에 더 가깝다. 두 오페라는 프랑스의 극작가 피에르 드 보마르셰의 희극으로 <세빌리아의 이발사>, <피가로의 결혼>, <어머니의 책임>등 3부로 된 작품이다. 내용으로 볼 때 피가로의 결혼이 세빌리아 이발사의 속편 같지만  2부 피가로의 결혼은 모차르트에 의해 1786년에 작곡되었고, 1부인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로시니에 의해 1816년에 초연되었으니 작곡 시기가 거꾸로다. 



  한 여인이 미국의 사관생도인 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과거의 비밀을 풀어내는 편지는 1885년의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열차에서 비롯된다.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 제인(줄리아 오몬드)은 벌목 기계를 러시아 정부에 팔기 위한 러시아로 가는 미국의 로비스트다. 그녀는 모스크바로 향하는 이 기차에서 러시아 사관생도인 ‘안드레이 톨스토이(올렉 멘시코브)’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당시 최고의 엘리트로 꼽히던 사관생도 중 유난히 감성적이고 모차르트를 좋아하는 안드레이와 사관학교의 교장이자 황제의 오른팔인 레들로프 장군은 제인을 사랑한다. 제인에게 청혼을 하러 간 장군 앞에서 안드레이는 사랑을 고백하고 장군의 미움과 질투를 사게 된다. 제인 역시 안드레이에게 향하는 사랑을 발견하게 되지만 쉽게 다가서지 못하다가 그와 하룻밤을 함께 지내며 제인은 고백한다. “당신을 평생 기다렸어요. 당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면서….” 하지만 운명은 그들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관학교에서 열리는 <피가로의 결혼>에서 안드레이는 제인의 행동을 오해하고 그들을 영원히 갈라놓을 사고를 저지르고 만다. 황제를 시해하려고 했다는 누명을 쓴 안드레이는 눈물과 절규와 함께 수용소로 후송된다. 


  제인은 러시아에서 안드레이를 기다리게 위해 벌목 기계 발명가와 맘에도 없는 결혼을 하고 10년을 지낸다. 드디어 안드레이의 소식을 알게 된 제인이 벅찬 마음으로 그가 살고 있다는 곳을 어렵게 찾아갔지만 이미 가정을 이룬 안드레이의 가족사진을 발견하고는 쓸쓸히 그 집을 나온다. 10년을 기다렸지만 20분 만에 지워야 했던 사랑, 제인은 자신의 비밀을 간직한 채 마차를 타고 시베리아 벌판을 달리며 안드레이와의 과거와 이별을 고한다. 그녀를 멀리서 안타깝게 바라보는 안드레이 역시 그녀와의 아픈 사랑을 담배 연기 속에 묻어 버린다. 자신의 아들이 이 세상이 존재하는 것도 모르는 채 말이다. 



  군대의 혹독한 훈련에도 불구하고 달밤에 ‘모차르트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피아노 협주곡 23번 2악장을 연주하는 미국 사관생도가 그의 아들이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시베리아의 횡단 열차와 자작나무 숲, 크렘린궁과 러시아의 축제, 보드카에 취한 장군이 얼음물에 들어가는 장면 등, 영화는 다양한 시각과 청각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안드레이처럼 베이글을 먹으며 시베리아 특급열차를 타는 기분으로 170분 동안 한여름 밤을 시원하게 보낼 수 있는 영화, <시베리아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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