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외출 03화

탈린, 그곳의 공기가
전해주는 이야기

폴란드,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여행(9. 탈린)

by 전나무





D와 J는 처음, M은 두 번째, 그리고 나는 세 번째의 탈린이다. 숙소일 거라 생각하고 찾아간 주소는 아파트를 관리하는 사무실이었다. 우리가 묵을 아파트는 시청 광장의 올데 한자 바로 옆, 올드 타운의 중심이다. 그런데 4층이란다. 필요한 옷과 세면도구를 배낭에 챙기고 캐리어는 사무실에 맡겨두었다. 사무실 벽에 연도 별 숙소 평점이 붙어있었다. 8.6-9.3까지 높은 점수였다.


호텔 로비 같은 아파트 관리사무소
아파트 연간 평점
탈린의 아파트



환한 미소를 띤 아가씨가 여전히 전통의상을 입고 아몬드 볶음을 팔고, 시청사 꼭대기엔 토마스 아저씨가 수호신처럼 탈린을 보살피고 있다. 하늘색 꼬마 기차가 골목을 누비고 자전거 릭샤를 끄는 청년도 여전하다. 톰페아 성으로 오르는 길목 수도사 복장을 한 동상이 몇 개 서 있다. 없던 동상이 생겼다.



볶은 아몬드 파는 아가씨
탈린의 하늘색 꼬마 열차
자전거 릭샤
탈린 시청사의 토마스 아저씨
수도사 조형물


탈린은 곳곳이 대수술 중이었다. 비루 문 근처는 물론 올드 타운 곳곳이 파헤쳐져 울퉁불퉁, 카메라를 들이대도 뭔가 마땅치 않았다. 탈린에 대한 기억이 먹칠되는 느낌이다. 세 번째 찾은 탈린은 그렇게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여행은 논리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 느끼면 된다.


탈린은 공사중



툼페아 성으로 올라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유리창을 똑똑 두드리니 창문이 열리고 피자를 전달한다. 그곳에도 피자를 배달하는 사람이 있었다. 오토바이가 아닌 자전거 배달이라 친숙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새콤 달콤 시원한 레몬 아이스크림
자전거로 피자 배달하는 청년
말간 바람 몇 줌과 붉은 지붕들이 콘체르토처럼...
류트 연주하는 소녀
길거리 기타리스트


순간적인 빛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2장의 골목 사진이 다르다. 사진의 표정이 바뀌는 순간이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자전거가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찍고 싶어 카메라를 들이대면 벌써 저만큼 가버리기도 한다. 카메라의 프레임을 통해 보는 세상은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감동적일 때가 있다. 내가 보고 싶은 것만 프레임 속에 가두니까 그렇다. 관심을 갖고 사진을 찍기 시작하면서 내게는 카메라 eye가 생겼다. 즉 카메라를 통해 보는 또 하나의 눈이 생긴 격이다.



빛의 차이(5분 전과 5분 후)
밤에도 푸른 하늘


처음에도, 두 번 째도 그랬던 것처럼 나는 새벽을 훔치러 나갔다.



노란 파이프 색깔이 맘에 들어 찍은 사진
세 자매 빌딩(현재 호텔로 사용)
탈린에서 만난 파보 예르비 콘서트 포스터
낡음에 대한 집착






아침 식사를 한 후 배낭을 아파트 사무실에 맡겼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다. 탈린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골목마다 만나지는 오래된 집들의 낡은 문과 거리의 꽃들, 카타리나 길드의 돌 벽도 있지만, 툼페아 성에 오를 때마다 만났던 할아버지 화가, 이번에도 만날 수 있을까? 은근 기대가 되었다.





아치형 돌로 만든 문을 지나 발걸음을 떼면서 과연 지금도 있을까? 아~, 여전히 그는 그 자리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도 세월을 거스르지는 못하는 듯 노쇠해 보였다. 하얀 주전자가 가운데 놓여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탈린에서 산 그림




‘그림이 참 아름다워요, 얼마예요?’

그는 한참을 망설이듯 생각하다 말했다.

‘20유로 주세요, 이 그림이 꼭 갖고 싶으면 얼마를 생각했는지 말해보세요.’

어투나 억양이 점잖았다. 단지 그림을 파는 장사치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장난처럼 웃으며 말했다.

‘10유로요’

꼭 10유로에 사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림을 반값으로 툭 깎으려고 생각한 건 아니었다는 말이다. 10유로를 말하면 15유로쯤 흥정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또다시 잠시 생각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렇게 드리리다. 그런데 잠깐 기다려요, 같은 그림으로 갖다 드릴게요.’

돌담의 빈 공간에 넣어둔 가방을 뒤적거리다가 내게 와서 말했다.

‘이 그림은 이게 마지막이네요. 여기 이 사인이 내 이름입니다.’

‘당신이 그렸다고요?’ 물으니 그렇다고 하면서 내가 고른 그림을 주섬주섬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림이 접히거나 구겨지면 안 되니까요.’

감동은 거기부터였다. 그때 그 모습을 생각하니 눈물이 글썽거려진다. 준비해둔 박스의 골판지를 그림 크기보다 약간 크게 칼로 잘랐다. 핏줄이 툭툭 붉어진 그의 손등에서 뭐랄까 섭섭함이 느껴졌다. 그림이 다치지 않게 골판 지위에 누런 테이프를 붙였다.

돌담에 걸린 작은 화병 그림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것도 당신이 그렸나요?’

화가의 얼굴이 갑자기 밝아지며 말했다.

‘아닙니다. 그건 내 딸이 그린 거예요.’

딸이 자랑스러운 느낌이 역력했다. 돈을 건네고, 그림을 받았다.

‘당신 사진을 좀 찍어도 될까요?’

‘Sure’ 흔쾌히 대답한 그는 옷매무새를 다독거렸다.

탈린에 올 때마다 그의 사진을 찍었으니 세 번 째다. 그러나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여행자들이 오가고, 그림을 보거나 팔고 했을 테니까….





소매 끝이 닳아서 해지고, 쭈글쭈글하다 못해 축 쳐진 재킷, 제대로 낡은 청바지, 벽에 걸린 그림 색을 닮은 셔츠, 푹 눌러쓴 검은 모자와 신발, 그러나 그의 표정은 맑았다.



세 번째 만난 화가


그림을 받아 들고 언덕을 오르며 후회했다. 그까짓 10유로, 왜 깎았을까? 화가에게 그림은 자식과 같은 의미일 거다. 나는 공연히 센티멘탈 해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내려갈 때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사실 나는 탈린에 3번째 왔고 그때마다 당신 사진을 찍었고 오늘도 당신을 잊지 않고 찾아왔다고…. 내가 쓴 여행기의 첫 사진이 바로 당신이었다고…. 말하면서 스마트폰으로 브런치 여행기에 있는 그의 사진을 보여주리라 생각했다. 그렇게 맘먹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는 그곳에 없었다. 다른 화가들은 모두 같은 자리에 있는데, 아직 해가 지려면 먼데 왜 벌써 갔을까? 힘이 빠졌다. 섭섭했다. 이제 탈린에 다시 오지 않을 텐데…



시청사에 올라간 여행자


단골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찾아갔다. 한 도시를 세 번 갔는데 세 번 모두 갔으면 단골 아닌가? 샐러드와 피자를 먹으며 지나가는 여행자들을 구경했다. 세 번째 탈린은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떠나갔다.







탈린의 새벽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갖가지 사연이 있었을 집들, 가족의 웃음소리가 자란자란 흘러나왔을 창문, 나지막하게 성가가 울려 퍼졌을 교회, 켜켜이 돌을 쌓은 성벽을 어루만지며 살펴보았다. 굽이쳐 들어가는 골목 어디서든 흥미진진한 옛이야기들이 불쑥 튀어나올듯했다. 거리엔 꽃들이 수를 놓듯 물결치고, 영업을 끝낸 노천카페는 가지런히 접힌 파라솔과 의자들이 새벽이슬을 맞으며 침묵하고 있다. 낯선 곳으로 여행을 하다 보면 공간의 변화 그 이상의 의미를 주는 도시를 만날 때가 있다. 눈으로 보이는 풍경 외에 그곳의 공기가 무언가 다른 이야기를 전해주는 곳 말이다. 탈린도 그런 곳이다. 국경을 넘었을 뿐인데 시대를 건너온 기분이다. 과거로부터 수 백 년 간 이어진 역사가 곳곳에 그대로 녹아 있다.


오래된 것들의 아름다움



탈린의 올드 타운은 전깃줄이 없다. 프라하처럼 말이다. 그러니 더더욱 시간의 저쪽으로 고스란히 들어가는 느낌이다. 내가 유럽을 좋아하는 이유 중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한 가지가 바로 돌길이다. 발바닥에 전해지는 울퉁불퉁한 돌의 맛이 정겹다. 돌로 지은 집, 돌로 만든 길, 돌담, 돌계단…, 나는 돌이 좋다.


중세 광장과 미로 같은 골목길, 그 사이에 빼곡히 들어선 옛 건물들이 마치 천 년 전쯤으로 돌아간 느낌을 준다. 기쁨과 흥분을 채운 거리의 풍경들이 다정한 목소리로 인사를 전해오는 듯하다. 아치형으로 쌓은 돌기둥 아래 빛바랜 올리브색의 나무문엔 투박한 무쇠 경칩이 달려있다. 그레이와 화이트가 조화로운 젤 소미노, 빨간 경칩이 달린 청회색 문, 그 아름다운 문고리들과 하나하나 악수하고 싶다. 산호색과 병아리색이 어우러진 건물들, 아이보리와 연두색이 조화로운 카페들, 너 나할 것 없이 모두 아름답다. 색채들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건물이나 대문, 현관 옆에는 어김없이 주물로 만든 벽 등이 고깔을 쓰고 있다. 멋대가리라고는 없는 원형 콘크리트 가로등에 익숙해진 정서인지라 그런 사소함 마저 기분 좋다. 제라늄과 이름 모를 꽃들이 창틀이며 문 옆, 노천카페 울타리마다 피어있다. 화려한 리본이나 값나가는 화분으로 치장하지 않은 소박함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 은하수처럼 자잘한 흰 꽃과 보랏빛 꽃의 어울림, 무심하게 자란 듯 노랑 빨강이 섞여 있으나 언밸런스하거나 촌스럽다는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 꽃 무더기들은 내 입 꼬리를 저절로 올라가게 만든다. 마치 어릴 때 선물 받았던 64색 파스텔 상자의 뚜껑을 열었을 때의 놀라움과 기쁨, 그것과 비슷하리라. 거리에는 갈매기 한 마리가 무심하게 돌길을 거닐 뿐 아무도 없었다.




오래된 집들이 미분의 리듬으로 시간의 곡선 위에 파도를 타며 출렁인다. 알 수 없는 새들의 몇 마디 울음소리가 자작나무 이파리들에게 노래를 불러주는 아침이면 둥근 아치형 대문에 흐드러진 제라늄이 보고 싶어 세수도 하지 않은 채 나가곤 했다. 높직하고 반듯한 살구 빛 벽에 그럴듯하게 매달려있는 빛바랜 녹색 문이 좋았다. 낡은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나이 지긋한 집, 뜨거운 태양에 녹아버린 물감처럼 군데군데 갈색으로 번진 갤러리 창, 정교한 자물쇠가 달린 문들, 돌담에 달려있는 곡선의 등, 녹슨 철제 발코니 사이로 삐죽이 손을 내민 연보라 빛 옥잠화를 올려다보는 일들이 더없이 행복했다. 다정한 탈린은 그렇게 막을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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