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외출 04화

열일곱 번 비,
베르겐의 풍경을 쓰다

설레는 이름 스칸디나비아 (6. 베르겐)

by 전나무




잠에서 깨니 몸이 가뿐해요.

나무집에서 잠을 자고 나서 인지, 좋은 공기 때문인지 모르지만요.

커튼을 열어보니 산과 물이 어우러져 빚어낸 안개가 자욱합니다.

스카프를 둘둘 감고 후드가 달린 점퍼를 입었어요.

밖으로 나가니 살짝 안개비가 내리네요.

공기의 청량함이 몸 속 깊숙이 들어옵니다.



플롬은 고대 노르딕 어 fla에서 유래한 말로 그 뜻은 ‘평평하다’랍니다.

플랫(flat) 슈즈의 그 flat도 여기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도 그럴 것이 깊은 산과 천 미터가 넘는깊이의 피오르드로 둘러싸인 플롬은 넓고 평평했어요.

플롬은 원래 ‘피오르드의 심장’으로 불리던 작은 마을입니다.

인구는 500여 명인데 관광객은 연 50만 명,

거주하는 사람의 100배나 되는 여행자들이 매일 들고 나는 것이 불편하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아직 꿈나라에서 돌아오지 않은 듯 캠핑장에 펼쳐진 텐트들에서는 기척이 없습니다.

피오르드 지형답게 계곡의 물살이 제법 실하게 흘러 내려가고 있어요.

방금 목욕을 마친 아기 피부처럼 연한 풀꽃들이 흐림 속에 더욱 빛을 냅니다.

목가적인 주택들 문 옆엔 어김없이 쥔을 닮았을 꽃들이 자라고,

작은 사과나무 한 두 그루는 누구네 집에나 다 있어요.


그림 같은 마을
지붕에서 풀이 자라고 있는 전통 가옥


마을 어디쯤을 지나다 보니 우체통을 한 곳에 몰아서 달아 놓았네요.

우체통엔 주소 대신 자기 집을 표시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집들이 드문드문 있기에 우체부의 수고를 덜기 위함일까요?

버스 정류장에도 누군가 예쁜 그림을 그려놓았군요.

우체통이든 정류장이든 동화 같아요.




집의 꾸밈새도 화려하거나 비싸 보이는 모양새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고요.

시골 마을이던 그곳이 지금은 여행자로 넘쳐나 관광지가 되었지만

여전히 젖소를 키우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남아있더군요.

마을은 꽤 깊숙한 곳까지 연결되어 있었어요.


마치 벌초하지 않은 산소처럼 우거진 잡초를 이고 있는 지붕의 집들이 간간히 보입니다.

그것은 노르웨이 전통 집인데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장점이 있다고 해요.

풀이 너무 무성해지면 지붕 위에 양 한 마리 올려놓으면 끝!

상상만 해도 재미있는 풍경이지요?


약 한 시간을 걷는 동안 우리 외의 사람은 없었어요.

는개가 살살 뿌리는 플롬의 경치는 그야말로 방금 붓을 내려놓은 수채화처럼 촉촉했습니다.

그곳에서 살면 몸과 맘이 모두 푸르게 푸르게 싱싱할 것만 같았어요.


도로와 철로와 피오르가 나란히 가는 플롬


크림수프와 소시지, 오믈렛, 빵과 과일 그리고 커피로 아침을 먹었습니다.

여행을 할 때면 저는 뭐든 맛있어요.

다른 사람도 그런지 궁금하네요.




이제 페리를 타고 피오르드를 통과해 구드방겐으로 갈 예정이에요.

우리처럼 플롬에서 머문 사람들,

베르겐에서 오슬로에서 방금 플롬에 도착한 사람들이 한데 뒤섞였죠.

송네 피오르드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길고 깊은 협만으로 세계에서는 3번째,

길이가 204㎞, 가장 깊은 곳의 수심은 1308m, 그 깊이가 믿기지 않아요.

그 속엔 뭐가 살고 있을까?



캐리어를 배의 하현에 잘 묶어두고 2층 갑판으로 올라갔어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배의 가장자리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더군요.

하지만 굳이 의자도, 앞쪽도 별로 상관이 없어요.

피오르드는 산이든 물이든 워낙 크고 웅장하니까요.
해발 1000m를 훌쩍 넘는 눈 쌓인 거대한 산이 첩첩이 이어집니다.

물을 따라 솟은 까마득한 절벽에선 수많은 폭포가 쏟아져 내려요.

이름 지어지지 않은 폭포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끼리는 서로 알 거예요.

비가 내리고 바람이 차가워서 든든히 챙겨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도저히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어요.

잠시 선실로 들어와 의자에 앉았지요.

선 내에 앉아있으니 밖이 거의 보이지 않았어요.

페리를 무한정 탈 수도 없는 일, 몸이 좀 따뜻해지자 다시 갑판으로 나갔지요.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 하늘 빛 따라 변하는 물 빛



과자 따먹기 대회에 출전한 갈매기들의 묘기가 펼쳐지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과자를 내밀자마자 갈매기들은 매의 눈으로 정확히 포착하여 과자를 채갔지요.

하늘은 파란 얼굴을 내놓았다가, 먹구름을 깔아 놓기도 하고 무시로 표정을 바꾸었습니다.




'웰컴 투 구드방겐'

그곳 선착장엔 민가는 없고 기념품점, 레스토랑, 전통 가옥들이 몇 채 있을 뿐 별 다른 건 없었어요.

보스까지 갈 버스를 기다렸죠.

보스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베르겐으로 가야 합니다.

보스의 기차역은 정말 좁고 사람들이 많았어요.


구드방겐의 레스토랑
전통 가옥 형태로 지어진 상가 건물
보스 행 버스
보스


보스에서 기차를 타고 가는 중이었어요.

중간쯤 갔을까?

도중에 정차한 역에서 기차가 좀처럼 출발할 생각을 안 하는 거예요.

이상하다 생각하는데 경찰들이 기차에 올라타는 게 보이더군요.

그리고 잠시 후 한 청년이 그들에게 연행되어 기차에서 내렸습니다.

영화 장면 같았어요.


여경이 남자의 백팩을 검사하는 중


베르겐 래디슨 SAS 호텔은 아름다웠어요.

파란 소파, 글이 줄줄 써질 것 같은 큼지막한 책상,

창을 열면 나무를 가르는 벌목장,

탁월한 위치와 럭셔리한 호텔이 맘에 쏙 들었지요.


베르겐 역
호텔 로비
커다란 창 앞에 놓인 책상이 무척 맘에 들던 룸
방에서 내다본 풍경 - 빛바램이 자연스런 기와, 천창


크고 작은 산들과 피오르에 둘러싸인 베르겐은

13세기까지 노르웨이의 수도였다고 합니다.

피오르드 앞에 있는 옛 부두 브뤼겐에는 작은 골목이 있습니다.

무심코 걷다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곳이에요.

그곳으로 들어간 우리는 깜짝 놀랐지요.

독일 상인이 머물던 목조건물 60여 채가 남아 있는데요.

켜켜이 나이 듦의 매력을 여기저기서 뽐내고 있어요.

삐걱거리는 나무계단과 처마,

대형 북어 모양의 조형물,

보수를 위해 쳐놓은 푸른색 망사 천막의 컬러까지도 맘에 들더군요.

어쩔 줄 몰라하며 폭풍 사진을 찍었더랬죠.

1층은 카페와 기념품 상점이 들어서 있고

2·3층은 예술가들의 작업실로 쓰인다고 합니다.


어머나~

무스탕, 양털 코트를 입은 여인도 있어요.

지붕 색이 아름다운 집
돌벽 컬러가 멋진 집
낡은 나무가 맘에 들던 집


하루 동안 열일곱 번쯤 비가 내렸고 열여섯 번쯤 개었어요.

개었다는 것은 비만 그치고 흐린 상태로 있는 게 아녜요.

불이 켜진 듯 해가 쨍하고 나서 '나 밝음' 하다가도

금방 '나 슬픔' 하며 부슬부슬 비가 내려요.

좀 있다 또 개이겠지?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우산을 펼치려고 하면 그치곤 했죠.

그런데 저는 그게 나쁘지 않았어요.

그냥 좋은 걸 어쩌나요?


베르겐의 날씨는 평소에 궂은날이 많다고 합니다.

365일 중 270일가량 비나 눈이 내린다니 알만 하죠.

베르겐은 어느 해엔가 유럽에서 가장 깨끗한 도시로 뽑혔다고 하는데요.

다름 아닌 하루에도 몇 번씩 내리는 비 덕분 아니겠어요?



피시 마켓에는 정말 어마어마한 크기의 생선과 킹크랩들이

진열 대위에서 육체미를 자랑하고 있어요.

그러나 호텔 여행자에게는 그림의 떡!

아쉬움 가득했답니다.

저녁을 먹으러 항구 앞의 레스토랑으로 갔어요.

옆 테이블 사람들이 먹고 있는 홍합이 맛있어 보였지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달라고 하니 뮬이라고 알려주더군요.

일종의 홍합볶음인 뮬은 버터와 치즈가 과하고

짠맛이 강해서 그리 맛있게 먹지는 못했어요.

하지만 연어 구이는 최고였죠.

노르웨이 연어는 알아주잖아요.




베르겐을 굽어보려면 플뢰엔산에 올라가야 해요.

고작 320m 밖에 안 되지만 푸니쿨라를 탔지요.

7분이면 가뿐히 오를 수 있습니다.

베르겐 시내 풍경이 뿌예요.

비 오는 날의 수채화였지요.

하지만 낙심은 금물이랍니다.

조금 있으면 헤헤거리며 해가 반짝할 것이니까요.


비가 내려 뿌옇게 보이다가, 아예 안 보이다가를 반복했던 플뢰엔 산에서 내려다 본 베르겐 항구



정말 그랬어요.

거짓말처럼 운무가 걷히고 베르겐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지요.

깔끔한 항구에는 고급 요트가 정박해 있고,

언덕에는 아름다운 색채의 목조주택들이 항구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플뤼엔 산에서 내려올 때는 천천히 걸으니

전나무와 자작나무 숲 길이 수필처럼 편하고 고적했습니다.

간간히 비가 내리면 처마 밑에서 잠시 긋고

그쳤다 싶으면 또다시 걸었지요.

그 하루 또한 제게 주어진 행복인걸요.

'괜찮아~'

그렇게 여기면 정말 괜찮아진답니다.



북유럽 신화 속의 괴물, 트롤
다시 맑아진 하늘



뮤지엄 광장에서 1번 트램을 타고 <Hop> 역에서 하차하면

그리그(Edvard Grieg, 1843-1907) 생가인 트롤 하우겐에 갈 수 있습니다.

콧수염 때문일까요?

저는 그리그와 아인슈타인이 닮은 것 같아요.

그리그의 작품 중 대중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곡은

아마도 페르귄트 중 아침과 솔베이지의 노래일 거예요.

아름다운 소녀 솔베이지와 가난한 농부 페르퀸트의 애틋한 사랑의 노래지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오제의 죽음입니다.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 a min 1악장도 좋고요.



그리그 뮤지엄으로 가던 중 만난 집


트롤 하우겐에서는 연주회가 열리는 공간의 이름은 트롤 살롱,

그곳의 무대는 생전에 그가 작곡하던 공간과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도록 유리로 만들어 놨어요.

런치 음악회는 놓쳤지만 아름다운 살롱을 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답니다.


유리창에 보이는 붉은 집, 그리그가 작곡을 하던 오두막
오두막 뒤로 보이는 건물이 트롤 살롱
그리그가 사용하던 가구와 피아노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다.
오른 쪽이 그리고 동상
그리그와 부인 니나, 근처에 합장한 무덤이 있다.
가운데 돌이 그리그와 부인 니나의 묘
오제의 죽음
솔베이지의 노래




오늘 밤엔 베르겐 공항에서 노숙을 할 겁니다.

새벽에 코펜하겐으로 가는 SAS를 타야 하거든요.

나이가 들면 용감해진다고 생각하셨죠?

그럴지도 모릅니다.

호텔에 든다 해도 새벽 2시에는 나서야 하고

그 시각에 공항버스는 운행을 하지 않으니 택시를 이용할 수밖에 없어요.

스칸디나비아에서도 물가가 가장 비싸다는 노르웨이에서 심야택시의 요금은 상상할 수 없지요.

설마 누군가 우리를 납치해서 섬에다 팔아넘겨 마늘이라도 까게 시킬까요?

여기는 노르웨이잖아요.


공항 2층에 슬리핑 의자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다국적 사람들이 모두 의자에 누워

스마트 폰을 보거나 잠을 자거나 하더군요.

다행히 두 개가 남아 있어 우리도 한 자리씩 차지했습니다.

그런데 영 잠이 안 와요.

스킨 헤드와 문신을 한 근육질 남자들 때문이었는지도 모르죠.

말똥 말똥거리다가 어찌어찌 새벽을 맞이했어요.

노르웨이 빠~~이~~


덴마크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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