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외출 06화


로텐부르크의 빛과 그림자

멋지고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

by 전나무


밤베르크에서 로텐부르크로 가자면 기차를 2번 갈아타야 한다.
뷔르츠부르크 플랫폼,

기차가 도착하기 5분 전쯤 짤막한 독일어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러자 사람들의 일부는 플랫폼 뒤쪽으로, 일부는 앞쪽으로 이동했다.
유레일 패스는 지정석이 없다.

자유롭게 아무 데나 앉으면 된다.

그런데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보아 앞쪽이나 뒤쪽을 선택해야 하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옆에 서계신 할머니께 여쭙는데 이미 기차가 들어오고 있다.
할머니는 내가 유레일패스에 쓴 Rothenburg ob der Tauber를 보시고는 앞쪽으로 타라고 알려주셨다.
맞물린 기차의 반대편에는 뉘른베르크라는 글씨가 보였다.
어디선가 분리되어 앞쪽은 로텐부르크로, 뒤쪽은 뉘른베르크로 갈 터였다.

아무 생각 없이 뒤로 탔더라면 뉘른베르크로 다시 돌아갈 뻔한 것이다.


철로 왼편의 물길 곁으로 나무들이 가지런히 늘어서 있고 오른편으론 농가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평화로운 정경이다.
엄마 손을 잡은 아이,
구부정한 노부부가 잡은 손,

손을 잡는다는 것은 친밀한 마음을 전달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러나 내 경우 나이가 들수록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게 쉽지 않다.

겨울답지 않게 따사로운 날씨만큼 포근한 정경 덕에 내 마음도 부드러워졌다.



바람결 하나 느껴지지 않은 하늘은 파랬고 그 아래 햇빛은 맑다.
게다가 큼직한 발코니를 갖고 있는 호텔은 내 마음을 온화하고 여유롭고 만들어주었다.


로마시대에 지중해와 동방에서 온 물자를 수송하던 길을 로만틱 가도(The Romantic Road)라고 불렀다.

‘타우버 강 위의 붉은 요새’라는 뜻의 Rothenburg ob der Tauber는 아름답고 낭만적인 작은 도시였다.



뢰더 문으로 들어가면서 구시가지가 시작된다.

제일 먼저 만난 성 야콥 교회에는 나무 조각으로 만든 리멘 슈나이더 (성혈 제단)가 있다.

오색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배경으로 나무를 깎아 만든 조각들이 자리 잡은 제단 앞에 서니 저절로 성스러운 마음이 든다.

교회 앞에 한 순례자의 조각이 서있다.

조각의 오른손 손가락이 유독 반짝거리는 걸 보니 아마도 그 손을 만지면 뭔가 좋은 일이 생긴다는 설이 있나 보았다.



멀지 않은 곳의 마르크트 광장은 아담하다.

시청사와 마이스터 투룽크(시의회 연회장)가 면해 있는데 그 건물에도 시계탑이 있다.

매일 오전 11시부터 5시까지 매시 정각마다 인형들이 나온다고 한다.

마침 1시가 다 되어가는 시각이기에 햇살 가득한 광장에 느긋하게 앉아 기다렸다.

양쪽의 창문이 열리고 오른쪽 창문 속 남자가 맥주 글라스처럼 커다란 잔을 들고 나와 술을 마시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서 벌어졌던 30년 전쟁에서 틸리 장군(가톨릭)이 로텐부르크(개신교)를 점령했다.

당시 시장과 의원들은 틸리 장군을 위한 연회를 베풀면서 선처를 빌었다.

알딸딸하게 술에 취해 기분이 좋아진 틸리 장군은 시장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3.25리터의 와인을 단숨에 마시면 로텐부르크 시민들을 살려주겠다는 것이다.

이에 당시 시장이던 뉴슈는 그 제안에 응했고 3.2리터의 어마어마한 양의 와인을 단숨에 마셔서 로텐부르크를 구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시계탑 오른쪽 창문에 커다란 술잔을 들고 있는 인형이 바로 뉴슈 시장이다.

그 후 로텐부르크에서는 매년 6월, ‘마이스터트룽크(Der Meistertrunk)’ 축제를 연다.

말 그대로 와인을 원샷하는 축제인데 당시 와인을 마신 시장이 3일 동안 깊은 잠에 빠졌다고 하여 축제는 3일간 지속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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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텐부르크 거리의 간판 역시 게트라이데처럼 문맹자들을 배려해 물건의 모양을 본떠 만든 형태의 간판이 많다.

로텐부르크 골목들을 거니는 시간이 행복하다.

가끔씩 단체 여행객이 지나가는 걸 제외하면 오가는 사람들도 많지 않았다.




로텐부르크의 전통과자인 슈니발렌은 눈을 뭉쳐 만든 것 같은 '스노 볼'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축제나 결혼식 등에 많이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밀가루 반죽을 칼국수처럼 납작하고 길게 밀어서 돌돌 감으며 튀겨낸 후 슈거 파우더나 시나몬 등을 뿌리기도 하고 초콜릿이나 견과류를 얹는 등 그 종류가 무척 많다.

여행 중, 일부러 맛집을 찾아다니지는 않는다.

그냥 예뻐 보이는 베이커리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담한 크기의 빵집 내부는 온통 동그란 슈니발렌으로 가득했다.

크기와 색깔이 다른 슈니발렌의 종류가 무척 다양해서 선뜻 고르기가 쉽지 않았다.

중요한 건 모든 슈니발렌이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쁜 색을 갖고 있었다는 것,

6가지가 세트로 한 봉지에 들어있는 것을 선택했다.

우리나라에선 망치로 깨 먹는 과자라고 알려졌지만 손으로도 쉽게 부서졌다.

빵도 아닌 것이, 과자도 아닌 것이 달콤하고 고소하다.

처음 먹어보는 바삭함에 기분도 달달 해지는 듯하다.

우연히 들어간 빵집 Zuckerbackerei는 로텐베르크를 대표하는 슈니발렌 맛집이었다.

그 후 하이델베르크에 가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슈니발렌을 샀었는데 식감이 퍽퍽하며 영 맛이 없었다.

결국 다 먹지 못하고 한국까지 들고 돌아왔다.

사람들이 맛집을 찾아다닐만한 이유가 다 있는 것이다.



마르크트 광장에서 아래쪽으로 쭉 내려가다 보니 엽서처럼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난다.

플뢴라인(Plonlein)이다.

굳이 삼거리라고 할만한 길은 아니지만 오랜 시간 그 자리를 지켜온 집과 길이 아름다웠다.



흔히 로텐부르크를 중세의 보석이라고 한다.

나는 그 말이 마땅치 않다.

보석은 화려함의 대명사이다.

중세 시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자그마한 도시가 보석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게 그냥 싫다.


파스텔처럼 고운 색깔의 벽과 지붕 위에 해와 그림자가 무늬를 짜고 있는 모습에 카메라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감독의 사인을 받는 배우가 나타나듯 골목길에 사람이 나타난다.

몇 군데서 사람들은 우연히 내 뷰 파인더에 들어왔다.

그들로 인해 밋밋할 수 있는 사진에 감칠맛이 더해졌다.



강이라고 할 수 없는 작은 실개울 너머에 집들이 보인다.

타우더 강이다.

짙은 갈색의 나무껍질을 비집고 나오는 초록색 나뭇가지들은 멀리 보이는 집들을 커튼처럼 아름답게 가려주었다.

평화롭고 아담한 풍경이 이어지고 있다.



어딘지도 모르는 골목들을 에돌아 걸었다.

그곳에서는 그게 가장 잘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로텐부르크는 그런 곳이다.

방향 없는 발길이지만 길 잃을 염려는 하지 않았다.

생각하기에 달렸다.

멋있는 삶,

행복한 삶,

아름다운 삶,

비슷한 것 같지만 모두 다르다.

멋있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이 으뜸이겠지만 셋 중 한 가지만이라도 해당한다면 족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만족이라는 것,

그 무게와 질량과 부피는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범위에서 해나가는 내가 고맙다.

아무것도 없는 노란 벽에 햇빛이 그려놓은 그림자 그림을 한 장의 사진에 담는 시간이 행복했다.



작은 마을을 하릴없이 혼자 걷고 있는 시간이 멋졌다.

명품 백과 보석을 대한 관심이나 욕심 없이 가끔 가고 싶은 곳을 찾아갈 수 있는 내 마음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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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로 치면 <아름다운 가게> 쯤 되는 리세일 샵을 발견했다.

맘에 드는 물건들이 상태도 좋고 값도 싸서 1시간쯤 구경을 한 듯하다.

작은 데님 가방과 반질반질 윤이 나는 양가죽 손지갑, 그리고 카키색 스카프 하나를 샀다.

20유로의 발길이 가볍다.



어느새 서쪽하늘에 붉은 노을이 수채화처럼 번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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