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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Nov 03. 2016

16. 미흡해서 좋은 4,507킬로미터의 끄적임

(유레일 4507킬로미터의 끄적임, 루체른) 






  사부작사부작 눈이 내렸다. 눈 마을 인터라켄을 떠나 브리엔츠까지, 브리엔츠에서 루체른까지 ‘내 이름은 스위스다’ 외치듯 눈이 내렸다. 골든 패스 기차의 파노라마 차창으로 비치는 설원은 풍경 사진의 앨범을 넘기듯 휙휙 지나갔다. 역의 정면이서울역과 비슷한 루체른 역 내부엔 갖가지 캐릭터들을 본 따 만든 조형물들이 걸려 있었다. 

  

브리엔츠 역
눈이 많이 내렸다
루체른 역 내의 조형물



  어디쯤에 있었더라? 역에서 나오자마자 두고두고 생각나던 나무다리를 찾고 있었다. 루체른을 상징하는 카펠교가 저 멀리 보였다. 로이스 강에 세워진 카펠교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되고 긴 나무다리이다. 다리의 2/3 지점에서 45도 각도로 굽어져 맞은편 강변에 닿는다. 루체른에 가서 맨 처음 카펠교를 보았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고깔모자 같은 삼각 지붕에는 붉은 기와가 얹혀있고 다리의 허리춤에는 붉은 제라늄과 보라색 버베나들이 잔치하듯 피어있었다. 




카펠교
세계적인 첼리스트 고티에 카퓌송 루체른 공연 포스터



 ‘흰 나방이 날개 짓 할 때 다시 저녁 식사를 하고 싶으시면 오늘 밤, 일이 끝난 후 들르세요. 언제라도 좋아요’ 

  잠 못 이루던 프란체스카가 한 밤 중에 트럭을 몰고 달려가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로즈만 다리)에 꽂아두었던, 로버트에게 보낸 쪽지(예이츠의 시 인용)


  지붕이 있는 나무다리, 카펠교를 보는 순간 영화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가 떠올랐다.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보면 거의 대부분 실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설에 뒤지지 않는 감동을 받았었다. 비를 철철 맞으며 서 있는 크린트 이스티우드(로버트), 트럭 문의 손잡이를 잡고 내릴까 말까를 갈등하던 메릴 스트립(프란체스카), 그 장면에서 나는 비 같은 눈물을 흘렸었다. 두 배우는 연기가 아니라 완벽한 두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붕 안쪽의 삼각형 패널에 걸려있는 120점의 그림은 아이들이 크레파스로 그린 그림처럼 아기자기했다. 겨울이라 꽃은 없었지만 카펠교는 여전히 우아한 모습으로 물속에 다리를 묻고 묵묵하게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우리가 묵을 호텔인 베스트 웨스트 크론은 올드 타운의 중심에 있었다. 주변엔 갖가지 프레스코 벽화가 그려진 아름다운 집들과 분수가 있었다. 옛날에는 건물 외벽을 치장하는 것이 가문의 영광과 부를 나타내는 유일무이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건물에 그려진 프레스코화

 



 작은 카펠교인 슈프로이어 역시 나무로 만든 보행자 전용 다리로 카스파 메그 링거의 판화 67점이 삼각형의 지붕 패널에 그려져 있다. 무제크 성벽을 따라 걸어 올라가니 아이들이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슈프로이어



  루체른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한 가지는 빈사의 사자상이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키려고 싸우다가 파리 튈르리 궁에서 전멸한 스위스 용병 600여 명을 기리기 위해 자연 암벽에 새긴 사자상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눈동자를 가진 사자의 얼굴이 물에 반영되어 더욱 슬퍼 보였다. 



빈사의 사자상
루체른 예수 교회(사진 왼쪽)
 호프 교회
호프 교회 안쪽 묘지



  루체른 호텔에서 스마트폰으로 항공권의 좌석 변경을 했었다. 취리히 공항을 떠나 뮌헨에서 환승할 때 예상대로 맨 앞자리, 다리를 쭉 뻗어도 되는 넉넉한 공간이라 편하게 비행할 수 있었다.

 




여행은 사소함에 감동한다. 

마음의 허기를 채우는 게 여행이다. 

낯 선 감정을 둥글리는 게 여행이다. 

초라한 여행은 없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는 과잉 긍정 주의보가 내린다. 

힘들어도 즐거운 게 여행이다.

음식이 조금 짜도 차창 한 번 바라보면 금세 잊어버리고 달콤함만 남는다.

여행은 또 다른 삶을 살아보는 일이다. 

꿈꾸듯 다른 생을 사는 시간이다.

여행은 인생처럼 예행연습이 없다.

다가오는 대로, 부딪히는 대로,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걸어가야 한다.



미흡했다. 

그런데 그 미흡이라는 단어가 맘에 든다. 

완벽이란 얼마나 숨 막히는 단어인가? 

완벽하다는 건 틈이 없는 것, 틈이 없는 아름다움은 없다. 

비어있어야 편하다. 

미흡이란 단어가 내 모습을 닮아서 좋다. 

유레일 4,507킬로미터의 끄적임(반 고흐에서 샤갈까지)의 사진과 글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줄곧 그곳에 있었다. 

미흡하나마 마칠 수 있음이 기쁘다. 

언제나 함께 하는 친구 M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


미흡해서 좋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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