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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Nov 13. 2016

뭉크의 그림을 읽다

설레는 이름 스칸디나비아  (4. 오슬로)




오슬로는 도시 곳곳이 예술을 입고 있는 듯 아름답습니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단연 노르웨이 출신인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1863-1944)죠.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오슬로를 찾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뭉크일 거예요. 

저 또한 뭉크의 그림을 볼 수 있다는 것에 매력을 느꼈으니까요.

지하철을 타고 뭉크 미술관 역에서 내렸습니다.

출구 벽에 뭉크의 그림이 붙어있더군요.

소풍 가는 사람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걸어가고 있었어요.

초록의 잔디밭에는 바둑돌만 한 하얀 야생화들이 지천으로 피어있습니다.  

아주 단순한 외관의 미술관 앞에 노천카페의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있습니다.     

각 나라 언어들로 된 도록들이 티켓 박스 데스크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이 뭉크를 따라 그린 그림들이 제법 그럴싸하더군요.

화실에 앉아있는 그의 흑백 사진이 인상적이었어요.






“내 그림을 팔아서는 안 됩니다. 소묘와 습작들도 전시할 미술관이 필요합니다”

그는 아무 조건 없이 자신의 전 재산과 1,100점의 회화, 4,500점의 수채와 소묘, 18,000점의 판화, 6점의 조각을 오슬로 시에 기증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준미하기 시작한 뭉크 미술관은 1963년 뭉크 탄생 100주년 되는 해에 개관했습니다. 

그러니까 뭉크미술관은 바로 에드바르트 뭉크 자신의 유언에 의해 설립된 미술관입니다. 

뭉크는 살아있는 동안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방랑자처럼 살았아요.

그러나 생의 마지막 28년 동안은 오슬로 근처에서 보냈습니다.      

뭉크는 어머니와 누나의 죽음 이후 정신이상자가 된 아버지 밑에서 어두운 유년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뭉크의 그림에서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어둠이 느껴집니다. 

뭉크의 대표작인 절규와 마돈나가 두 차례나 도난당하면서 그의 이름과 작품은 더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요.

그때마다 되찾긴 했지만요.      


'뭉크 그림에 이런 컬러의 정물화도 있었어?' 

할 정도로 밝은 컬러의 꽃과 여인, 정원 그림들이 걸려 있었습니다. 

모든 작품의 사진 촬영이 가능했지만 조그만 방 하나 만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어요. 

그렇습니다.

귀하신 '절규'는 특실에 모셔져 있었습니다.

그 방엔 지킴이가 한 분 계셨고 작품은 방탄유리 같은 보호막 속에 걸려 있었습니다.

몇 차례 도난 사건을 겪은 후 내려진 특단의 조치였던 거죠.

약간 어두운 조명 속에 걸린 그림을 보는 순간 말문이 막히더군요. 

그림에서 무슨 기운가 뻗어 나오는 듯한 느낌이랄까? 

그 아우라에 압도당하는 기분이었어요. 황홀했지요.

      

절규


“어느 날 저녁 나는 두 친구와 오슬로 교외로 산책을 나갔다. 

길 한쪽은 도시이고 발밑에는 피오르드가 있었다. 

나는 피곤했고 몸이 안 좋았다. 나는 멈춰 서서 피오르드 저쪽을 바라보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구름은 핏빛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나는 비명소리가 자연을 꿰뚫고 스쳐 지나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마치 내가 절규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이 그림을 그렸다. 

구름은 진짜 핏빛으로 칠했다. 색채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뭉크가 1862년에 쓴 일기입니다. 

절규의 환영적 체험을 글로 남긴 것인데 이 글을 읽어 보니 그림의 해석이 달리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생전에 쓰던 팔레트와 목탄, 스케치의 흔적들을 돌아보다가 

자석에 이끌리듯 절규 방에 다시 가고, 또 가고를 반복했지요.        



사춘기
결별



그동안 많은 미술관을 다녔고 수 없이 많은 그림들을 보았습니다.

최고의 걸작들이었죠. 

그러나 책이나 인터넷에서 보던 것과 가장 다른 느낌의 그림이 바로 뭉크의 절규였답니다.

무슨 영적인 힘이 느껴지듯 했으니까요.

       

뭉크에게 죽음은 그의 예술세계의 기본 색조를 이루는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의 고통스러운 기억은 유년부터 시작합니다.

5살 때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지요.

14살 때 사랑했던 누나 역시 폐결핵으로 어머니를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뭉크의 유년은 ‘요람을 지키는 검은 천사들과 함께 한 시절’이라 표현되기도 합니다.


뭉크의 아버지는 괴팍한 의사였습니다. 

아버지는 뭉크가 의사가 되기를 바랐지요.

하지만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고 미술학교에 진학한 뭉크는 이후 파리로 갔습니다.

초기에는 밝은 색채의 풍경화와 인물화들을 그렸어요.

뭉크는 서른두 살에 남동생과 아버지의 죽음을 다시 마주하게 되었지요.


그림을 통해 자신이 느끼고 있는 불안과 공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모티브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닌가 싶어요.

뭉크는 평생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그가 살았던 시대적인 배경에는 

절망, 자살,압생트,마약,광기,허무주의,무정부주의,악마주의가 만연했습니다. 

그러한 세기말 분위기의 영향도 받았겠지요.


마돈나



뭉크의 첫사랑은 도발적인 유부녀였습니다.

뭉크는 첫날밤이었지만 그녀에겐 많은 날 들 중의 하나일 뿐이었죠.

뭉크는 첫사랑에 집착했지만 팜므파탈이었던 그녀에게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뭉크가 베를린에 살 때 또 한 번의 사랑이 찾아왔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다그니 유을입니다.

그녀는 뭉크의 어린 시절 친구로서 음악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와 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거죠. 

 다그니 유을은 바로 마돈나의 모델입니다.


뭉크는 유학 온 그녀를 친구들에게 소개하게 됩니다.

친구 둘 모두 첫눈에 그녀에게 반했고 

뭉크를 포함하여 세 사람이 경쟁하듯 그녀를 사랑했으니 4각 관계?

 

이  재기 발랄하고 아름다운 그녀는 프시비지예프스키와 결혼했습니다.

프시비지예프스키는

니체의 철학에 심취해 있던 폴란드의 작가였어요.

쇼팽에 대한 특이한 해석을 할 정도로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피아노도 수준급으로 연주를 하는 사람이었죠. 

뭉크에 관한 내용의 최초의 논문을 쓴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A급인 사람을 상납한 거나 만찬가지 였던 거죠.

뭉크는 제 무덤을 파고만 셈입니다.

 뭉크는 참을 수 없는 질투의 감정에 휘말리게 되었지만 이미 배는 떠나고 

두 남녀의 배신감에 치를 떨었지요.  


마돈나는 어딘지 모르게 괴기스러움이 느껴지지만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뭉크는 이 그림 속에서 삶과 죽음을 직접 연결하는 끈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글로 남겼습니다. 

“당신의 얼굴에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과 고통이 넘칩니다. 

왜냐하면 죽음과 삶은 손을 잡고 

수천의 죽음과 수천의 삶을 연결하는 고리가 

이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1903년 <사랑의 개화와 죽음>의 주제로 라이프치히에 전시되었고 

그 이후 다섯 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돈나의 그림이 조금씩 다르게 보이는 것입니다.  


뭉크의 세 번째 사랑 역시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두 번의 연애 실패로 사랑과 여자에 대한 혐오감과 기피증으로 인해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요. 

결혼이 싫었던 뭉크는 자연히 그녀를 피하게 되고, 

그녀는 뭉크에 대한 집착이 더해갔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죽을병에 걸렸으니 병문안을 와달라는 거짓 메시지를 뭉크에게 전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병문안을 간 뭉크는 

그녀가 미리 베개 밑에 숨겨두었던 권총으로 위협을 받습니다. 

만약 결혼을 안 해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을 한 거죠.

뭉크는 그녀의 권총을 빼앗으려 옥신각신하다 권총이 발사되었고 

뭉크의 왼쪽 세 번째 손가락이 절단되는 사고가 생깁니다.

화가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의 나이 39세 때의 일입니다.

그후 뭉크는 죽을 때까지 장갑을 낀 채 한 번도 손가락을 내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평생 여성 혐오와 기피증을 가졌었다는 뭉크의 여인 이야기는 이게 마지막이 아닙니다.

81세까지 사는 동안

끊임 없이 여성을 사귀었지요.

쌍둥이 딸도 있고요.

만일 그에게 여성 혐오와 기피증이 없었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그 대목이 참 궁금합니다.




오슬로 국립 미술관은 여느 미술관과 특별히 다를 바 없는 구조였습니다.

마네, 클로드 모네, 세잔느, 모딜리아니 같은 거장들의 작품 다수가 전시되어 있는데 

그곳 역시 뭉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절규와 마돈나 등 58점의 뭉크 작품을 전시한 뭉크관이 따로 있으니까요.      





도무지 입구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바다를 끼고도는 길을 따라 오슬로 오페라홀로 갈 때 성벽이 보였던 아케르스후스 성은

눈  앞에 뻔히 보였어요. 

성 안에 돌아다니는 사람들도 보였고요.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안 보이는 거예요.

이쪽저쪽을 헤매다가 우리 같은 여행자들을 만나 물어왔지요.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처지더군요.

꼭 뭐에 홀린 듯 눈앞에 보이는 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뺑뺑이질을 치다가 어찌어찌 간신히 찾아 들어갔습니다.

그날을 생각하니 지금도 땀이 나듯 하네요.


어디선가 노랫소리가 들렸어요.

조그만 연못 위 언덕에 몇 사람이 노래를 하더군요.

알토 리코더의 소박하고 차분한 음색과 참 잘 어울리는 하모니였어요. 

야외 음악회라도 준비 중인지 몇 번이고 연습을 하며 의견을 나누는 모습이 참 정여웠어요.

어린 딸의 손을 잡은 아빠, 

벤치에 앉은 할아버지와 손자, 

녹슨 물받이 홈통, 

오래된 철문, 

적절하게 옅고 진한 붉은 벽돌 벽

심심하리만큼 뜸한 사람들

그런 것들이 좋은 느낌이었죠.

 



아케르스후스 성은 오슬로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건물입니다.

성이라기보다 르네상스 양식의 궁전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1600년대 전방에 다시 세워졌고, 

1630년에는 성벽이 만들어졌습니다.

1308~1716년 사이에 적군에게 아홉 번이나 포위되었으나 

단 한 번도 적에게 넘어간 적은 없었다고 하니 대단하지요.

현재는 왕의 공식 행사에 사용되며, 왕실 사람이 죽으면 그곳에 묻힌다고 합니다.



오래된 돌담과 아치형 문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교대하러 오는 근위병이 총을 메고 막 문으로 들어오는 순간이었어요. 

놀람과 동시에 반사적으로 카메라를 들이댔어요.

아마 그들도 나만큼 놀랐으리라 생각됩니다. 





아케르스후스 성 앞에 서니 오슬로 피오르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지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성은 화려하거나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은 없었지만

 저녁나절 산책하러 올라 노을을 바라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어요.     




칼 요한 거리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더군요.

어느 도시든 3~4일만 머물면 알만해져요.

그런데 알만하면 꼭 떠나기 마련이에요.

그게 바로 너 나 할 것 없는 여행자의 모습입니다. 

이제 아름다운 오슬로를 떠나 송내 피요르드로 갑니다.

기차와 배, 버스 등 다양한 탈 것으로 바꿔 타며 플롬에 도착해서 하루 머물고 베르겐으로 가게 되지요.

빙하가 녹아내린 풍경과 비안개를 떠올리니 마음이 노글노글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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