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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Dec 19. 2016

전혜린의 뮌헨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



중세와 대리석을 동경한 사람,

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의 책을 좋아한 사람,

검정 스커트에 검정 머플러를 즐겨 두르고 다니던 사람,

여자라는 옷을 거추장스러워했던 사람.


parzer

                                               


내가 독일의 땅을 처음 밟은 것은 가을도 깊은 시월이었다. 

하늘은 회색이었고 불투명하게 두꺼웠다. 

공기는 앞으로 몇 년 동안이나 나를 괴롭힐 물기에 가득 차 있었고 무겁고 칙칙했다. 

스카프를 쓴 여인들과 가죽 외투의 남자들이 눈에 띄었다.
아무도 없는 비행장 뮌헨 교외 림(Riem)에 내렸을 때 나는 울고 싶게 막막했고 무엇보다도 춥고 어두운 날씨에 마음이 눌려 버렸었다.

...

내가 유럽을 그리워한다면 안개와 가스등 때문인 것이다.


Riem airport


1955년 가을, 뮌헨 대학에 입학한 전혜린의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첫 구절을 읽었을 때 가슴 한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전혜린의 뮌헨, 내가 그곳에 간 이유 중에 그녀가 들어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를 쓰고

칸딘스키와 클레가 그림을 그리고

토마스 만이 자주 거닐었던 뮌헨의 슈바빙에 전혜린이 살았었다.                                   


뮌헨 대학교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전혜린은 모교인 서울 법대 강단에서 독일어 강의를 했다.

매주 수요일이면,  스무 살의 법학도는 전혜린을 만나는 독일어 시간을 기다렸다.

제자는 시를 써서 바치고, 젊은 여교수는 제자에게 편지를 건넸다.

혜린은 그 청년을 장 아제베도라고 명명했다.

순수한 영혼의 대화를 나누며 스무 살 제자와 사랑이라는 탈출구를 찾았을 때, 

청년의 어머니가 전혜린을 찾아왔다.

어머니는 제발 아들과 헤어져달라고 무릎 꿇고 빌었다.

두 사람은 헤어졌다.

 

혜린이 장 아제베도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녀가 죽기 닷새 전에 쓴 편지이다.


"장 아제베도! 

 

내가 원소로 환원하지 않도록 도와줘! 정말 너의 도움이 필요해. 

나도 생명 있는 뜨거운 몸이고 싶어. 

가능하면 생명을 지속하고 싶어. 

그런데 가끔가끔 그 줄이 끊어지려고 하는 때가 있어. 

그럴 때면 나는 미치고 말아. 

내 속에 있는 이 악마를 나도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있어. 

악마를 쫓아 줄 사람은 너야. 

나를 살게 해줘."


부치지 못한 편지는 그녀가 죽은 뒤에 발견되었다. 


겨울과 검은색을 좋아했던 여자, 

1월 1일에 태어났고, 

눈 덮인 수유리에서 새벽, 취중 객사한 날도 1월 11일이었다.

죽음의 본능은 음습한 겨울을 비키지 못했다.

선택이라 하더라도 어쩌면 예정된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영업 중인 대학로의 <학림다방>, 

지금은 사라진 명동 술집 <은성>은 그녀가 예술가들과 어울리던 아지트였다. 

1950년대~60년대 명동 시절,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던 술집 <은성>은 탤런트 최불암 씨 모친이 경영하던 곳이다. 

김수영, 박인환, 변영로, 전혜린, 이봉구, 오상순, 천상병 등이 막걸리 잔 너머로 문학과 예술의 꽃을 피웠던 <은성>은 50~60년대 예술의 중심지인 명동에서 가난한 시대 예술가들의 사랑방이었다.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소설가 김봉구 씨가 <은성>의 단골이기도 했으며 박인환 시인이 죽기 얼마 전, '세월이 가면'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검은 옷, 검은 스카프를 두른 유난히 눈빛이 깊은 여자는 끝없이 담배를 피우고 웃고 이야기했다. 

이념과 현실, 자아 사이에서 고뇌할 때 학림다방과 은성은 권태와 광기를 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도피처였다. 

뮌헨에서 정신적 자유를 맘껏 누리다 온 전혜린은 이곳에서의 하루하루가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이 되어버린 학교도 그에겐 해방구가 되어주지 못했다. 

순수한 영혼으로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디에도 없었다.




1965년 1월 9일 토요일


하늘의 푸름은 마치 수정처럼 맑고 깊었지만 기온은 영하 10도 이하로 급강하한 몹시 추운 날이었다.

서울대학교  문리대 앞의 동숭동 학림다방 오른편 맨 구석의 창가 자리에 밤색 밍크코트를 입은 여성이 앉아있었다. 

오후 들어 몇 시간째 며칠 전에 내린 잔설을 이고 있는 바깥 풍경을 무심한 시선으로 내다본다.

대학이 방학중이었기 때문에 다방 안은 한산 했다. 

누군가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그때 한 젊은 여성이 문을 열고 다방 안으로 들어섰고, 검은 스카프를 한 채 창가 자리에  앉아 있던 여인이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 세 시간이나 기다렸어!"

그날 약속 없이 학림다방에 들렀던 서울대 법대 후배인 이덕희가  전혜린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그들은 다방 한가운데에 놓인 난롯가로 자리를 옮겨 앉아 토요일 오후를 담소로 보냈다.



저물 무렵 두 사람은 학림다방을 빠져나와 명동에 있는 은성으로 갔다.

은성은 당시 문화 예술인들이 단골로 드나들던 유명한 대폿집이었다.

은성에는 소설가이자 <연합신문> 문화부장인 명동백작 이봉구가 앉아 있었다.

명동의 <모나리자>나 <돌체>에 들러 친구들과 함께 음악을 듣다가도

"술 좀 마셔 봐야겠어요. 어떤 것인가를 음미해보자는 거지요."라며,

두부 집에서 막걸리  잔을 앞에 놓고 크고 검은 눈동자를 번득거리는 전혜린을 이봉구는 또렷이 기억했다.

여러 사람이 합석에서 두어 시간 동안 떠들어댔던 그날의 술자리는 매우 유쾌했다.

전혜린은 무척 고조되어 보였고, 다른 날과 달리 더 자주 웃고 더 큰소리로 많은 말들을 했다.

곧 수필집을 낼 예정이고, 책 제목도 정했다고 했다.

전혜린은 이덕희에게 귓속말로 "제목은 나중에 너한테만 알려줄게"라고 속삭였다.

그녀는 국제 펜클럽대회에 참가할 예정이며, 그 때문에 건강진단을 받았다고 했다.

"글쎄 내 몸이 괴물처럼 건강한 거야."

짧은 겨울 해가 지고, 바깥은 이미 어두워진 뒤 은성에서 나온 전혜린과 이덕희,

동행했던 후배 등은 한잔 더 하기 위해 신도 호텔 살롱으로 자리를 옮겼다.

은성에서 신도 호텔 살롱으로 가는 도중에 전혜린은 이덕희에게,

"세코날 마흔 알을 흰 걸로 구했어!"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무척 달뜬 음성이었다.

2년 전 마릴린 먼로가 세코날 60알로 자살한 것을 빗대 말한 것일까?

신도 호텔의 살롱에서 칵테일을 마시는 동안 전혜린은 몇 차례나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에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아직은 젊은 소설가들이었던 김승옥, 이호철 등과 합세한 전혜린의 일행은 천장이 낮은 대폿집으로 자리를 또 옮겼다.

소음과 담배연기가 자욱한 그곳에서 그들은 약 한 시간 동안 술을 더 마셨다.

전혜린은 술을 꽤나 마셨고 취한 눈치였지만, 담배를 피우면서 다리를 건들거리며 노래를 흥얼거리는 것이 기분은 유달리 좋아 보였다. 

담배를 쥔 손톱 밑은 때가 까맣게 끼어있고, 누군가는 그 불결란 손톱을 '검은테가 둘러진 부고'라고 했다.

10시쯤 되었을 때 전혜린이 홀연히 일어서더니 입구에서 손을 흔들어 보이고 사라졌다.

그것이 전혜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음 날 전혜린은 죽었다.

당시 신문은 1단짜리 여섯 줄 기사에서 '희귀한 여류 법철학도요, 독일 문학가'인 전혜린의 죽음을 '수면제 과용으로 인한 변사'라고 발표했다.

뮌헨 유학 시절 이미 한 번의 자살 미수 경험이 있던 전혜린의 죽음이 수면제 과용으로 말미암은 사고사였는지,

과도의 저혈압으로 인한 자연사인지, 자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전혜린의 사후, 구구한 억측이 떠돌았지만 그의 죽음은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장석주-나는 문학이다 중>



요절한 예술가는 많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미스터리 한 죽음을 맞았다.

기형도가 그랬고 김광석이 그랬다.

평범과 피상, 저 너머의 절대 세계를 동경하고 그것을 향해 한 걸음씩 내딛는다는 것.

그것은 결실도, 업적도 아니다. 

홀연히 세상 저편으로 떠난 전혜린을 기억하는 것은 그의 생애에 이룬 업적 때문이 아니다. 

무서우리만큼 비범한 삶의 자세 때문이다.

'어느 조용한 황혼에 길가의 주막에 쓰러져 있는 집시가 있거든 나라고 알려줘!'라고 속삭였던 전혜린.

31세로 이 세상에서의 짧은 생을 휘발시킨 그녀는 가장 순수하고 단순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전쟁이 끝난 직후 1955년, 독일로 유학을 간 한국 여대생이란 상상 조차 어렵다.

당시 뮌헨에는 한국인 여성으로는, 아니 동양 여대생은 혜린이 유일했다.

1965년에 밍크코트를 입고 다니는 31세 여교수,

말하자면 금수저다.

소설 속에나 나옴직한 전혜린의 삶은 평범치 않았다.

에릭 사티의 말대로 그녀 역시 낡은 시대에 너무 일찍 세상에 온 사람이 아닌가 싶다.

맞지 않는 시대를 견딜 수 없던 그녀의 선택은 죽음이었다.

그러니까 그녀에게 죽음은 싶음이요 고픔이었던 것이다.

  

'Seerosenkreis'는 뮌헨 슈바빙 일대에서 활동하는 예술가 모임이다.

이 모임은 1940년대 슈바빙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던 레스토랑 Seerose에서 시작됐다.

그녀가 뮌헨 슈바빙에 살 때 자주 드나들던 레스토랑, 지로제(seerose)를 찾아갔다.  


슈바빙 거리를 오가는 27번 트램


수련이라는 뜻의 지로제는 간판에 연꽃 문양이 그려져 있다.

주인이 여러 번 바뀌긴 했어도 혜린의 흔적을 좇아 여전히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들이 간간히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는 전혜린이란 이름을 알고 있었다.

그녀가 즐겨 마시던 그로그(grog)나 글뤼바인(Glühwein) 대신 더블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며 나른한 겨울 햇살을 즐겼다.


사람 없는 역사는 없다.

모든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삶은 누구랄 것 없이 모두 소중하다.

 

SEEROSE


흔적이라는 것,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그냥,

그녀가 거닐었던 거리와 그곳의 공기를 느끼고 싶었을 뿐이다.

미술관, 기차역, 공원, 카페 그리고 서점...

지나갔거나 가지 않은 곳이라도 상관없다.

그저 그 공간에 잠시 머무름만이라도 흡족했다.

그러면 되지 않는가?

전혜린이 쓴 이 구절처럼 말이다.


한 권의 새 책이 맘에 들 때, 

또 내 맘에 드는 음악이 들려올 때, 

또 마당에 핀 늦장미의 복잡하고도 엷은 색깔과 향기에 매혹될 때, 

또 비가 조금씩 오는 거리를 혼자서 걸었을 때 나는 완전히 행복하다. 

맛있는 음식, 진한 커피, 향기로운 포도주... 

햇빛이 금빛으로 사치스럽게 그러나 숭고하게 쏟아지는 길을 걸어가는 일,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전혜린의   - 긴 방황 중    




밀가루 같은 눈이 내렸다. 

잘츠부르크에서 뮌헨까지 1시간 반.

빨간 커버가 씌워진 기차 의자는 퍼스트 클래스의 위상을 높여주었다.

설경이 포근하다.

뮌헨의 숙소는 호텔 & 호스텔, 그중 내 선택은 당연히 호텔이다.

개별 욕실이 있는 더블 룸에 조식도 포함되어 있다.


샤워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줄기는 열 가닥이나 되려나?
물이 아니라 바늘이 피부를 때리듯 파고들었다.

수 백 개 구멍에서 사이좋게 나와야 할 물이 열 개의 구멍에서 서로 탈출하듯이 필사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물줄기가 그렇게 강렬하게 느껴본 건 처음이다.

지금껏 다녔던 호텔 중 최악이다.

그곳을 가게 된 이유는 물론 가격 때문이다.

뮌헨의 호텔은 무척 고가였다.

중앙역 근처로 값이 저렴하고(2박 13만 원) 평점이 좋아 선택한 곳이다.

대부분 젊은이들이고 간혹 만나지는 한국 대학생들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어쩌랴, 견뎌야 할 일이다.


복도에서, 아니 정확히 말해 내가 묵고 있는 방문 앞에서 한 여성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다.

목소리가 제법 커서 신경에 거슬렸다.

방안에서 할 수 없는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나 보다 짐작했다.

통화는 30분 이상 지속되었다.

참았다.

좀 있다가 또 다른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예 스피커 폰으로 셋이 통화한다.

대체 왜 복도에서 그것도 셋이서 통화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 방에 아무도 없는 것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의사 표시를 하는 게 옳다.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미안하지만 조용히 해주세요. 잠을 잘 수 없네요.'

30대로 보이는 두 여성은 그 흔한 '쏘리~'한 마디 없이 바로 옆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내가 왜 그렇게 오랜 시간, 그러니까 거의 한 시간을 참았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숙소가 사람의 수준을 말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두침침한 지하 식당,

빨간 비닐 의자에 부스스한 머리카락의 젊은이들이 빵을 먹고 있다.

그 흔한 삶은 달걀 하나 없다.

치즈 몇 장, 토스트용 빵과 잼, 그리고 시리얼과 오렌지 주스

그게 전부였다.

왠지 서러운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맘을 고쳤다.

뭐 어때?

굶는 것도 아니고 내가 원하는 여행을 하고 있는데 그러면 된 거 아냐?



독일의 건축물은 대부분 웅장하며 어둡다.

해가 나지 않은 겨울의 음습함이 더해지니 마음까지 무거워진다.

U반을 타고 마리엔 플라츠에서 내려 광장으로 올라가니 제일 먼저 신시청사가 보였다.

겨울이라 검정 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압도적이라 거리가 우중충하다.

시계탑에서 매일 11시에 인형이 나와 춤을 춘다는데 보진 못했다. 

건축의 컬러와 건축의 외관이 현대적으로 보인 탓일까?

같은 광장에 있는 구시청사가 신시청사처럼 보였다.

구 시청사 옆에는 성 피터 교회는 뮌헨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로 11세기 후반에 건립되었다는데 독일답지 않게 환하고 아기자기한 모양이다.

마리엔 플라츠는 말 그대로 성모 마리아의 광장이라는 뜻이다. 

이 광장의 주인공 격인 황금 마리아상이 신 시청과 구 시청 사이에 있다.

스웨덴은 잠시 뮌헨을 점령했었다.

30년 전쟁이 끝나고 뮌헨은 멸망할 위기에서 벗어났다.

그 사건을 감사하고 기념하기 위해서 근처 프라우엔 대성당의 황금 성모상을 이곳에 옮겨와서 높은기둥에 올리고 경축한 것이라고 한다.


신 시청사
시계탑의 춤 추는 인형
신 시청사로 들어가는 문
장남감 박물관


뮌헨에서 가장 큰 프라우엔 교회로 들어서면 한쪽 발자국 모양이 찍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일명 ‘악마의 발자국(Teufelstritt)’은 이 교회의 명물이다.   

교회를 건축할 당시 건축가는 악마와 거래를 했는데, 창문이 보이지 않는 교회를 만든다면 악마가 건설을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대로 악마는 교회 건설을 도왔으며 완공이 되자 건축가는 악마를 교회 안으로 안내했다.   

악마가 선 자리에서는 교회의 창문이 보이지 않았으며 그 자리에 악마의 발자국이 남았다고 한다. 

악마를 속이고 만들었다는 창문에는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가 장식되어 있다.            

 

프라우엔(성모 마리아) 교회, 악마의 발자국
프라우엔 교회의 스테인드 글라스


일종의 궁전 박물관인 레지덴츠는 바텔수 바흐 왕가 궁전으로 영화의 극치를 보여준다.

내가 느끼기엔 프랑스의 베르사유나 오스트리아의 쇤부른 궁전보다도 화려하다.

단지 웅장하고 광활한 프랑스식 정원이 없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나는 화려한 것보다 수수하고 톤 다운된 색깔을 좋아한다.

그래서 보석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일까?

보석의 방은 무심하게 설렁설렁 지나쳤다.



레지던츠의 백미는 단연 안티콰리움이다.

16세기에 르네상스식으로 조성되었는데 궁전 내에서 가장 오래되고 넓은 홀이다.

알프레히트 5세가 수집한 고대 그리스‧로마 풍의 흉상과 121명의 역대 왕들의 초상화를 전시한 선조화 갤러리가 압도적이다.

홀의 양쪽에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벤치가 쭉 이어져 있어 앉아서 둘러볼 수 있다.

특히 홀의 앞쪽에 궁전의 회랑을 그림 그리듯 대리석 조각을 이어 붙여 만들어진 석판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돌만 가지고 그렇게 완벽한 입체감과 원근감을 나타낼 수 있는지 보고도 믿기지 않는다.

대체 인간의 능력은 어디까지인지?


안티콰리움


어디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울림이 상당히 좋다.

발길이 저절로 소리를 따라갔다.

왕실 예배당일까?

한 남자가 피아노를 조율하고 있었다.

곡선으로 벽돌을 쌓아 만든 작은 무대는 높은 천장과 아치 형의 회랑으로 감싸있어 소리가 둥글게 감싸질 수밖에 없어 보였다.

단지 피아노의 소리를 고를 뿐이데 그 마저 아름다워 한참을 서 있었다.



궁중의 아기씨가 만졌을 작은 하프와 쳄발로,

각각의 방에는 모두 다른 모양과 색깔의 도기로 만들어진 페치카가 놓여있고 샹들리에는 더없이 화려했다.

벽지며 가구, 침구들이 현재 세상에도 없을듯한 고급스러움과 기품이 놀라울 뿐이다.



레지던츠 옆에 바이에른 슈타츠오퍼, 즉 바이에른 국립 오페라 극장이 있다.

뮌헨에 머무는 동안 공연이 없어 아쉬움이 컸다.

빨간색 sight seeing 2층 버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다음 날, 100번 버스를 타고 일명 박물관 섬으로 불리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는 알테, 노이에, 모던 3개의 피나코테크가 있다.

피나코테크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회화 수집관이란 뜻이다.      

 


- 얼마예요?

- 1 euro

- 1유로라고요?

- 네, 일요일에는 항상 모든 피나코테크가 1유로예요.

 


평일의 피나코테크 입장료는 각각 7유로에서 10유로이다.

그런데 일요일은 세 곳 모두 단 1유로라는 것이다.

모르고 갔던 터라 횡재가 따로 없구나 싶었다.

지난밤, 호텔에서 시끄러웠던 여성과 조식 때문에 뮌헨이라는 도시가 살짝 실망스러웠는데 기분이 살짝 좋아졌다.

사람 맘이 참 간사하다.

이런 문화적 서비스를 동반하니 누구나 예술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다.

독일에는 '아벤트 카세'라는 게 있다.

저녁을 뜻하는 아벤트와 입장권 판매소를 의미하는 카세를 결합한 이 용어는 오페라나 콘서트가 시작되기 1시간 전 창구에서 남은 표를 할인 판매하는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베를린 필 등의 공연장이나 오페라극장에는 주머니는 얇지만 문화가 고픈 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때 티켓을 사면 70유로의 오페라를 단 돈 10유로에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생들이 구매할 수 있는 10유로 자리 좌석을 별도로 마련하기도 한다.

즉 음악에 관심이 있고 발 빠르게 예매에 성공한다면 100유로가 넘는 콘서트도 10유로에 볼 수 있다.

이런 문화 시스템이 우리에게도 보급되면 얼마나 좋을까 싶다.  


1유로라고 해서 사람들이 유달리 많이 몰려와  북적북적 대지도 않았다.


알테 피나코테크(Alte Pinakothek)는 15-16세기의 독일 회화 중심으로 꾸며져 있다. 

그러니까 알테는 영어로 old라는 뜻일 거라는 짐작이다.

뒤러의 독일 전시실, 다빈치‧라파엘로. 렘브란트 등의 회화가 있다.   

그리고 노이에 피나코테크(Neue Pinakothek)의 노이에는 영어로 new를 뜻하는 말로 근대 회화들이  클림트의 음악, 에곤 실레의 고통, 고흐의 해바라기 등을 볼 수 있다. 

클림트의 마가레트 비트겐 슈타인의 초상이 무척 아름답다.

그의 화풍이 살아있지만 화려하지 않고 깊이 있는 고상함에서 지성미과 기품 있는 느낌이 맘에 들어서다.


마가레트 비트겐슈타인의 초상
에곤 실레, 고통
클림트, 뮤직
모네, 수련
고흐, 해바라기
폴 시냑의 그림들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은 페르디낭 호들러의 1892년 작품 <생에 지치다>였다.

한 생을 건너오기가 저토록 힘겨운 것인가?

그림 속의 사람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생에 지치다


모던 피나코테크의 모던은 말 그대로 20세기 이후 현재까지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달리, 피카소, 마티스, 파울 클레, 칸딘스키, 워홀, 클림트 등의 그림 외에도 현대 조형물이 위트 있게 전시되어 흥미로웠다.


모덴 피나코테크에서 가장 맘에 들던 마티스의 그림들,

마티스 미술관에는 마티스가 없던 기억 때문에 더욱...


3곳의 피타코테크를 3유로에 들어갈 수 있던 덕에 맛있고 푸짐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mixed grilled pl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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