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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한집사 Oct 18. 2024

<인간실격>을 사랑하던 나의 20대는 어땠을까

2009년 7월 23일 23:16에 작성한 글

 처음으로 손목을 그었을 때는 사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일단 이 순간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 사용한 건 엄청 큰 식칼이었는데 한참을 그어도 아프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고, 그냥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 같은 기분에서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한참을 그었는데 좀만 더하면 편해질 거란 미친 생각이 들었다. 눈치챈 그가 창문을 뛰어넘어 들어와 말리는 통에 그만두었다.

 

 그 뒤로 몇 번 손목을 더 그을  때는 좀 더 작은 칼을 사용하게 되었다. 물론 그 후로는 손목을 그을 때마다 처음과 다르게 통증이 엄청 심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긋다가 그만두고, 그만두고... 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죽고 싶단 생각이 들 때마다 손목을 긋게 되었다. 아파아파아파아파아파란 느낌이 들면 정신이 들었다. 씨발 졸라 아프다, 내가 왜 이래야 하지? 이런 거 일단 힘들어서 죽고 싶고 어쩌고 간에 당장 뒤지겠는데- 죽는 게 더 힘들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비로소 그때 살고 싶어졌다. 정확히 말하면 살고 싶다기보단 손목을 그만 긋고 싶어졌다.

 그 후 이도저도 못하는 병신 같은 나의 한심함이 밀려오고 자해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냥... 미친 듯이 울었다.

 

 정말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은 손목 같은 거 긋지 않는다고 했다. 쌈박하게 뛰어내리던가 목을 매달지.

 정말 그랬다. 실제로 목을 매달아 보려고 한 적도 있는데 막상 해야지, 싶으니까 무서워서 실행할 수가 없었다. 그러니까 뛰어내리던가 혹은 뛰어들던가, 목을 매달아 버리던가 하면 나의 결정을 더 이상 번복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손목은 긋다가 멈출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차마 죽지도 못하면서... 죽고 싶을 때 아니 난 살고 싶을 때-  그거보다 이게 더 아파를 느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자해였던 셈이다.

 

 오늘은 도서관에서 혼자 점심시간을 보내기가 무료해서 진짜 오랜만에 도서 대여점에 들려서 만화책 신간 나온 걸 한 권 빌려왔다. 내가 예전부터 좋아하던 만화였는데 남자주인공이 교통사고로 죽고 말았다. 여자주인공은 망연자실한다. 계속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갑자기 내가 작년에 절절하게 느꼈던 상실감이 다시 밀려왔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듯한 그 느낌-

 

 신경정신과 의사는 그러니까 알레르기 같은 거라고 했다. 누구에게나 정신적으로 취약한 부분이 있기 마련인데, 당신에게 그것이 이별이라고 나의 성장과정을 찬찬히 되짚어가며 말해주었다. 너의 무의식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이별이기 때문에 넌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헤어져’란 말을 할 수 없다고 했다. 끊어낼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달라져야 해. 네가 나에게서 상담을 받는다면 넌 그와 헤어지더라도 천국에서 살 수 있어.

 사이비 교주가 구원을 약속하며 속삭이는 느낌이었다. 한 달 정도 병원에 돈을 쏟아붓다가 그만두었다. 날마다 보는 게 교육학 책이면서 병신같이 상담 파트 안 봤냐, 결국 내가 해결해야 한다.

 물론 이제 그때같이 아프지 않다. 의사는 나에게 너는 BPD에 근접한 성격을 갖고 있어서 문제라고 말했다. 자아이질적인 질환이 낳은 통증. 그때는 정말 아팠다. 죽을 것 같았다. 안정제 같은 건 어차피 도움이 안 된다며 잠이나 잘 자라고 당시에 엄청 강력한 수면제를 처방해 주었다. 지질한 수면유도제와는 차원이 달랐다. 먹고 정확히 30분 내에 쓰러졌다. 다음 날에도 머리가 아팠다.

 그 의사가 나에게 주었던 도움이라면 나의 이 모든 통증은 결코 사랑의 상실로 인한 아픔이 아닌 단지 병리현상에서 파생된 부산물이라는 믿음을 갖게 해 주었단 사실. 나을 수 있다는 기대가 생기고 나는 선택했다. 더 이상 손목도 긋지 않겠어. 더 이상 병원 따위 다니지 않겠어. 그리고 진짜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도록 노력할 거야.

 

이 모든 걸 잊고 싶지 않아.

놓치고 싶지도 않아.

 

오늘은 괜히 떠올라서 모든 것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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