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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심한집사 Oct 23. 2024

'장애'라는 정체성

배려하지 마, 그냥 존중만으로도 충분해

 “아빠 아직 젊다!”

 전날 밤, 전화에서 아빠는 분명 내게 그렇게 말했다. 자신은 아직 젊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실제로 100세 시대라는 현대 사회에서 당시 아빠의 나이 정도면 한창이긴 했다. 그때 아빠는 겨우 쉰셋이었으니. 할머니가 사는 우치 마을에서는 젊은이 소리를 들으며 청년회장도 거뜬히 할 연배였다.

 그래도 늘 마음이 쓰이는 아빠였다. 아내도 없이 홀로 뻔한 교사 월급으로 딸을 둘씩이나 키워낸 짠돌이 우리 아빠. 보나 마나 싸구려 음식으로 저녁을 때웠을 것이 분명해 한바탕 잔소리를 퍼붓고 통화를 끊었음에도 찜찜함은 가시질 않았다. 

 그날 밤, 아빠의 그 말을 믿지 말았어야 했다.

 아빠의 뒤를 따라 교사가 된 나는 다음 날, 학생들과 기말고사 진도를 나가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수업 중 누군가 교실 문을 두드렸다. 아빠가 쓰러졌다는 비보였다.


 장애. 

 이 두 글자는 나와는 인연이 없는 단어라고 생각했다. 선천적 장애인보다 후천적 장애인이 더 많다는 사실도 이전엔 전혀 몰랐다. 아빠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다시 얻은 생에 따라붙은 이 두 글자는 나로 하여금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을 알게 해 주었다.

 아빠의 새로운 정체성은 ‘경증 언어장애인’이었다. 조금씩 좁아진 뇌혈관은 어느 순간 결국 완전히 막혀버렸고 아빠의 뇌를 불가역적으로 훼손했다. 그 결과 아빠는 대부분의 언어를 잃어버렸다. 혹독한 재활에도 불구하고 몇몇 개의 단어들만 더듬더듬 말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을 뿐, 아빠의 의사소통은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나마 편마비로 인해 절뚝이는 한쪽 몸은 걸을 수 있다며 나라에서 장애로 인정해 주지 않았으니 다행인 셈인가.

 유창하다 못해 너무나 빠른 말로 평생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던 우리 아빠. 그런 사람이 이제는 음성 언어도, 문자 언어도 잊은 채 세상과 단절되고 말았다니……. 낯선 아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은 아빠가 아니라 오히려 나였다. 나는 한동안 밤이면 숨죽여 울었다. 

 하지만 아빠는 울지 않았다. 아니, 아빠는 나와 전혀 달랐다. 새로운 자신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 매일 같이 뒷산 둘레길을 올랐다. 서툴게나마 ‘안녕하세요.’라고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고, 대화 중인 동네 사람들에게 다가가 한 마디라도 던지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더니 어느새 산꼭대기 쉼터에서 함께 운동하는 친구까지 사귀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나와 아빠가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갔을 때였다. 우리는 함께 물건을 골랐고 계산대로 향했다. 수북하게 쌓인 물건들의 바코드를 찍던 와중에 아빠는 하나의 가격에 의문이 생겼다. 그래서 계산원에게

 “얼마예요?”

라고 물었다.

 하지만 계산원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빠는 재차 물었다. 네 번이 넘게 물었다. 계산원은 단 한 번도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일부러 아빠의 질문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을. 아빠의 구부정한 자세, 성치 않은 걸음걸이, 그리고 어리숙한 말투……. 한눈에 보아도 소위 ‘장애’를 지닌 것이 분명한 사람이 바로 우리 아빠였다. 그녀는 내 말에는 분명히 반응하면서도 아빠에게는 선택적으로 귀가 멀었다. 결국 나는 분노를 쏟아내고야 말았다.


 이런 사건이 물론 한 번은 아니다. 그리고 가끔 타인에게 털어놓기도 한다. 그럴 때면 대개 사람들은 이런 반응을 보이곤 한다.

 “진짜 나쁜 사람이네, 장애인이라고 무시하는 거야?!”

 이처럼 틀에 박힌 듯한 대답을 듣고 나는 위로에 감사하다고 말을 하지만, 실은 또 한 번 상처를 입고 만다. 그들의 열띤 항변에 깔린 장애인에 대한 시혜적 인식 때문이다. ‘장애인이란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존재’라는 그 말. 뒤집어서 생각해 보면 그들에게 장애인은 온전히 배려만을 받아야 하는 존재일지도 모른다. 나는 그 인식이 참으로 서글프다.

 인간은 누구나 인간 그 자체로 존중받아 마땅하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을 지닌다. 우리 아빠가 ‘경증 언어장애인’이란 복지 카드를 지니고 있는 것도 그저 아빠만의 정체성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배려가 아닌, 존중의 대상일 뿐이다. 


 바람이 있다면 사람들이 타인의 투박한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따뜻한 마음과 열린 가슴을 지녔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온다면 나보다 더욱 씩씩한 우리 아빠가 더 큰 목소리로, 더 많은 말을 하며 지금보다 더 활발하게 세상과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아빠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지 않았더라면 나조차도 절대 몰랐을 이 세계에 대해 사람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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