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큰 딸이.
초등학교 졸업식 날 신었던 굽 높은 하이힐은 잠시 넣어두고, 보색으로 예쁘게 매치시켰던 축하 꽃다발도 이번에는 준비하지 않은 채40여 분간 진행된다는 입학식에 참석했다.
회사에는 오전 반차를 낸 터였다.
교장선생님의 훈화는 어디서 들어본 듯한 내용이었지만
라떼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길이였다.
적당한 구어체로 적당한 길이의 문장을 적당한 시간에
소화하시는 멋짐을 뽐내신 교장선생님.
그러나 그 깔끔함마저도 신입생 엄마인 나에겐
바짝 긴장을 하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였다.
이어지는 담임 선생님의 소개.
아이는 1학년 중 가장 끝 반이었는데,
선생님을 소개하자 전에는 들을 수 없었던 학생들의 환호성이 강당 뒤켠에서 피어올랐다.
인기가 많은 선생님이시구나!
무서운 선생님이신 것보다는 수월하게 학교에 적응할 수 있겠다 싶다가, 처음엔 좀 엄격한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금세 꽁무니에 붙었다. 이 정도면 내 안의 자아는 n개 이상이다. 혼자 오만가지 생각의 호들갑을 떨고 고상한 척 앉아있는 나는 중학교 1학년의 엄마이다.
불현듯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이 떠올랐다.
책가방이라는 것도 처음 사보고,
옷은 무엇을 입혀야 하나 고민도 더 깊어지고,
현장학습 날 도시락은 무슨 동물모양으로 만들어주어야 하는지 검색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렸던 나.
그중 가장 어려웠던 것은,
첫 초등학교 생활을 같이 적응하기 위한 육아휴직으로 인해동네에 갑자기 나타난 'ㅇㅇ엄마'가 되어버린 것이었다.
출퇴근을 하며 아침저녁으로 동네를 다닐 때에는 마주치기 힘들었던 아이 또래의 엄마들을 오가며 자꾸 만나게 된다는 점.
그 안에서 거미줄을 엮듯 관계가 만들어졌고,
혹여 아이의 학교생활에 지장이 생길까 온갖 눈치를 보며
그 안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나를 보았다.
누가 빨대로 내 에너지 포션을 쪽쪽 빨아먹는 듯한 기분.
30대 중반의 나이로 초등학교에 입학한 것 같은,
더듬이를 추켜 세우고 바짝 긴장했던 그때의 나.
그 또한 경험을 해보고,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별 것이 아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 안에서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던 시간도 흘러 40대의 나는 다시 중학교에 입학했다.
이제 나를 긴장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공부'다.
초등학교 때 '낮 시간의 동네와 동네 사람들'에 적응해야 했다면,지금은 '내 아이만 빼고 다 나간 선행과 학원이야기'에 적응해야 한다.
그것은 사실 적응을 넘어 두려움에 가까운 정도이지만,
아이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진짜 입학생' 앞에서는 발가락에 힘을 꽉 주고 의연한 엄마인 척한다. 집에 문제집이 일간지처럼 오는 것은 안 비밀.
내 수준에서의 최선이다, 하하하.
고등학교 입학할 땐 수능 본다며 설레발치는 엄마가 되지 않도록, 이제는 매일 중심을 잡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