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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바 Nov 30. 2023

아, 인생이여!

2023 스카이런 도전기

2019년 5월이었다. 생애 첫 마라톤을 뛰었던 때가.

당시 같이 수영을 하던 동네 언니와 형부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5km를 신청했다.

슬하에 아이가 없던 부부였는데, 내가 다시 두 사람을 운동으로 가슴 뛰게 해주겠다며 같이 뛰자고 설득했다.

그때 나는 수영 레인에서 1번을 맡아 운동하던 때라 "5km 달리기쯤이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계속 뛰면 되겠지 하고는 동네 헬스장에서 5km 를 세 번쯤 뛰고 마라톤 대회를 나갔다.

'탕!'
페이스 조절이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때,

나는 초반에 전력 질주를 하고는 모든 체력을 소진해

피니시 라인이 보이는데도 한 발자국도 뛰지 못하고

겨우 걸어서 경기를 마쳤다.
기록은 31분 37초.
뛰다 걷다 하다가 마지막엔 기어 오다시피 했던 경기였는데, 30분 초반대의 기록이 나오자 욕심이 생겨났다.

알고 보면 나는 타고난 마라토너가 아닐까?

그렇다면 한 번 더! 얼마 뒤에 있었던 10km 마라톤 대회를 호기롭게 신청했다. 그리고 모두들 아는 '이 망할 놈의 코로나'가 왔다. 연기, 취소, 재공지, 무기한 연기..

그리고 2023년이 되었다.

코로나로 자가격리를 하면서 시작된 나의 홈트레이닝과

그 덕분에 얻게 된 작고 소중한 복근이 내 운동 생활을 꽃 피게 해준 기폭제가 되었다.

아이들과 가족 내 거리 두기가 0으로 수렴하는, 출구 없는 터널같았던 코로나 시기를 와인으로 버텼는데, 운동을 너무 사랑하게 된 나머지 알콜 섭취량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었다. 알콜이 근 손실을 가져온다나. 이제 막, '저 여기 있어요'하는 복근이 너무 작고 소중해서 와인과 소주와 맥주로부터 지켜주고 싶었다.

그렇게 운동을 꾸준히 한지 한 달이 되고, 6개월이 되고 1년이 지나갈 무렵, 마스크 없이 뛸 수 있는 첫 마라톤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다.
 갑자기 가슴이 뛴다.

우리나라 3대 마라톤 중 하나라는 동아 마라톤이다.

이젠 내가 뛸 수 있긴 할까 하는 새초롬한 의구심보다,

기록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까 하는 호기로운 자신감이 더 앞섰다. 3월 19일 대회 한달 전부터 일주일에 3~4번 헬스장에 가서 러닝머신을 주구장창 뛰었다.
아. 러닝머신....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운동기구 중 하나가 아닐까?

다람쥐가 쳇바퀴 돌리는  거랑 무엇이 다른가.

한 발자국 앞도 나가지 못하는, 여차하면 주르륵 뒤로 밀려나는 이것이 내 인생인가. 오만가지 잡생각을 하면서 뛰었다. 숨이 턱까지 차 이러다 내가 죽겠네 하고 10km를 채 못 뛴 어느 날은 세상 가장 우울한 얼굴로 집으로 돌아와 그대로 쓰러져 잤다.

어쨌거나 시간은 차곡차곡 흘러 대회 당일이 되었고,

나는 처음으로 '페이스 조절'이라는 것을 해보며 약 1시간을 한 번도 쉬지 않고 달렸다. 58분대의 기록은 그 간의 내 연습과 노력을 보상해 주는 달콤한 사탕이었다.

'역시 나는 타고난 마라토너가 맞았어!'

성과지향형인 나는 운동에서조차 성과에 목마른 사람이었다. 마라톤을 성황리에 마친 후, 도장 깨기 하듯이 한라산 백록담까지 무사히 오르고 왔다.

그럼 다음은?  '스카이런'이라는 대회가 있단다.

그냥 달리기가 아니라 123층의 롯데타워 계단을 오르는 대회라고 한다. 이 대회 역시 코로나로 중단된 이후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열리는 대회라 신청하는 것부터 열기가 어마했다. 5분 만에 마감된다는 글을 읽고 손을 벌벌 떨며 신청했다.

다행히 성공!

그런데 너무 급히 신청한 나머지 경쟁 분야와 비경쟁 분야로 나누어진 대회에서 실수로 경쟁 분야를 신청해버렸다.

'경쟁'이라는 단어가 주는 위압감과 압박감에

'이번엔 즐기자' 하고 비경쟁으로 신청하려고 했는데 그만 실수를 했다. 혹시나 수정하면 신청이 취소될까 싶어 확인해 보니 대회 시작 시간과 기록 측정 정도만 다르다고 해서 그대로 두었다. 같이 신청한 후배에게 말했더니 아마 나의 본능이 그렇게 시켰을 거라고 한다.

무어라 한 마디 반박하지 못했다.

이 자식, 나를 간파하고 있군.

보통 30분대에 많이들 뛰었다고 하는 글들을 보고 나니,

나는 왠지 20분대에 뛸 수 있을 것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내 안에서 용솟음쳤다.

10km 도 1시간내에 완주한 나야!

때부터 약 2주간 헬스장에서 천국의 계단으로 준비를 해나갔다.
아. 천국의 계단... 계속 타면 천국 가는 계단이구나.....
러닝머신은 아주 젠틀한 운동기구였다.

천국의 계단은 정말이지 고문 기구 그 자체였다.

레벨을 5로 하고 30분을 타라는 친구의 조언에 한 계단, 두 계단 타다가, 눌렀다. 버튼을. 정지시키려고. 3분 만에.
이게 왜 이렇게 인기가 많은 운동기구란 말인가.

헬스장에서 인기 있는 새 기구가 들어왔다고 홍보한 머신이 바로 이건데. 말이 안 된다. 3분을 탔다고 내가?

꾸준한 속도로 타의에 의해 계단을 타는 것이 이렇게 엄청난 운동인 줄 몰랐던 거다.
자괴감이 들었다.

3분을 타고 2197계단을 어떻게 오를 수 있을까...
누구에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도저히 혼자서는 못할 것 같아 계단을 탄 사진을 공부 채팅방에 올려 응원을 받으며 근근이 운동을 이어나갔고, 오지 않을 것 같았던 대회 날이 왔다.

"1052번 참가자님, 대회를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스타트 라인에서 한 명 한 명 올라갔는데,

사회자들이 질문을 한다.
"한라산 백록담의 정기를 받아 준비했습니다!"
아드레날린이 대폭발하는 심장소리가 들린다.

출발! 계단부터 기록 측정이 시작되었는데,

'계단은 뛰고  도는 곳에서는 걸어라' 하는 마라톤 선배님의 조언을 기억하며 한 계단 한 계단 가볍게 뛰어 올라갔다.
그런데, 8층쯤부터 다리가 이상하다.

너무 숨이 차서 도저히 뛸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 8층인데? 난 123층까지 올라가야 되는데?
아.. 뛰면 안 되는 거였구나.....

천국의 계단을 그렇게 타 놓고도 아무 생각 없이 뛰어올랐구나 내가 ....  그때부턴 마음을 내려놓고 걸어서 계단을 올라갔다. 일반 마라톤 대회처럼 옆에서 누가 같이 달리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자기와의 싸움을 하며 혼자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 것이다. 중간중간 있는 모든 음수대를 다 거쳐 꾸역꾸역 물을 마시며 올라갔다.
마라톤 용어 중 '러너스 하이'라는 것이 있다. 30분 이상 달리면 몸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맑아지 경쾌한 느낌이 드는데, 이 행복감을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라고 한다.
119층 정도 올라가니 드디어 곧 끝이 난다는 생각과 함께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지금 나에게 러너스 하이가 온 순간인가 싶었다.(아쉽게도 몸은 전혀 가벼워지지 않았다.)

그때 앞에서 너무 힘들어하며 올라가던 어떤 여자 선수를 만났다. 대충 봐도 20대 초중반으로 보였던 그 여자분은 긴 머리를 휘날리며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계단 손잡이를 잡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휙!'
손목을 낚아챘다.

"할 수 있어요, 다 왔어!!!" 하며 그 여자분의 손목을 잡아끌고 얼마 남지 않은 계단을 같이 올라갔다.

모르는 여자분의 손을 이렇게 잡아도 되나?라고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우리는 모두 너무 힘든 상태였고, 조금만 올라가면 이 시간을 마칠 수 있을 것이었기 때문에.
"그런데 이래도 돼요?"
그 여자분이 숨을 몰아쉬며 말한다.

아. 경쟁부문. 하지만 손목을 놓지 않았다. 1,2위에 들 기록이 아닌 것을 직감적으로 알았으므로 그 여자분에게 민폐가 아닐 것임을 알아서 이기도 했고, 그보다 너무 힘든 이 순간 타인이지만 함께 헤쳐나가고 싶은 마음에서이기도 했다.

며칠 후, 대회 당일의 사진을 게시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전문가가 찍어준 사진이 제법 그럴싸하다.

그날의 고통은 온데간데없고, 여기저기 사진 자랑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잘 나왔네' 하고 사진을 넘겨보던 중 피식 웃음이 났다.

119층에서 만났던 그 여자 선수의 손목을 낚아채 같이 마지막 몇 계단을 오르던 그 순간이 찍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앞서서 올라가느라 몰랐는데, 지금 사진으로 보니 그 여자분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올라 있다. 당시의 내 갑작스러운 행동을 호의로 받아주었었나 보다 싶어 다시금 마음이 놓인다.

10km 마라톤의 좋은 기록, 한라산 백록담도 8시간 만에 주파한 덕분에 '운동에 소질이 있나 보군'했던 내 자만심을 롯데타워가 사뿐히 즈려밟아주었다.

몇 번의 도전과 성취, 그리고  실패를 하고 나니 이 경험들이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는,

안주하지 말고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그래서 내년에 다시 도전할 거다.

내 인생도 다시 리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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