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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바 Dec 02. 2023

착각일지도, 의심일지도

나의 첫 한라산 등반기


토요일 아침 6시 23분, 동작역에 9호선 급행열차가 도착하는 시각이다. 김포공항 역까지 소요되는 시간은 26분. '느긋하게 다음 주 북클럽 책이나 보면서 가자' 하고 탄 지하철은 캐리어로 그득한 시장 바닥이었다.
역시 나만 부지런한 게 아니었어...

회사 동기 언니와 1년 후배, 그리고 나.

40대 기혼 여성 3명의 1박 2일간 짧은 일탈!

일탈이라고 하기에 한라산은 너무 기름기 쏙 빠진 담백한 목적지인 것 같다.

주기적으로 만나는 회사 멤버들 5명과의 단톡방에서 약속을 잡으려고 일정을 맞춰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얘기가 오가다 내가 등산을 가고 싶다고 했고, K가 비행기 티켓을 알아보며 한라산을 제안했고, S는 목적지가 제주도인지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 채 만나기로 했다. 서울에서도 약속을 맞추기 쉽지 않았던 사람들인데 이 거대한 실행력이 그저 놀랍다.

한라산아 기다려!

공항에 먼저 도착한 K가 저 멀리 보인다.
"언니, 나 지금 회사 사람 만났는데, 우리랑 같은 비행기에 한라산 일정이랑 코스도 같대! 옆에 있던 사람이 '올라가서 아는 체해도 되죠?'라고 하는 거야! 너무 놀래가지고 ~ "
어..?
이게 무슨 소리?

가장 먼저 공항에 도착했던 K가 보자마자 하는 말이

한라산을 향한 설렘에 한 조각 먹구름을 몰고 왔다.
우리 세 명은 회사에서 만났지만 언니 동생하는 예외적 관계고, 굳이 밖에서 회사 사람과 마주치고 싶지는 않다.

어떻게 이 여행을 왔는데!

한라산 등반은 그 어떤 방해도 용납할 수 없는 숭고한 버킷리스트라고!!
게다가 K가 언급한 회사 사람들은 중년의 남성들. 흠.

(후배들이었으면 반가웠을까?)

여러 사건들로 우린 회사의 일부 중년 남자들에 대한 알레르기가 있다. K의 어깨너머로 슬쩍 본 그분은 K와 같은 사무실 내 다른 팀에서 근무했던 분이라고 했다. 같이 일할 당시 과묵하셔서 나쁜 기억은 없는 분이니 자주 마주치지만 않으면 껄끄러울 일은 없을 거라는 K의 말은 울렁이는 내 마음을 다독여 주었다. 곧 보안검색대를 통과하며 어마어마한 인파에 치였기에 고개를 빼꼼 내밀던 불안도 그 틈에 흩어지려는 찰나,
"어?! 다들 어디서 많이 본 사람들 같은데? 000 씨 와이프 아니에요?"
막 탑승하려는데 발걸음을 멈추게 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낯선 '중년 남성'이었다.
나와 남편은 한라 등반 멤버 중 유일한 사내 부부인데, 그분은 그저 팩트를 말한 것이지만 내 입장에선 기분이 썩 좋진 않다. 남편을 아는 것이지 나를 아는 것도 아니면서 알은체 하는 것이 영 거슬린다. 나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인데...  순간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다.
"아.. 네.."
혹시나 비행기에서 옆자리에 앉진 않을까 걱정하며 제주 여행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우리의 대화 주제 중 하나는 '중년 남성 조심'.
회사에 직원들이 많다 보니 다양한 사건 사고들이 많았는데, 그중 몇몇 중년 남성들이 사고 친 이야기가 도마 위에 올랐다. 신입 여직원을 편애하며 플러팅 비슷한 행동을 하는 모 차장, 위트 있는 사람인척 하며 성적 농담을 던지는 모 부장, 사내부부이면서 회사의 다른 여직원과 바람이 났다는 모 대리..  물론 모든 중년 남성 회사원이 그렇다는 건 아니다.

(오해 금지. 남초 회사라서 확률상 빈도가 높을 뿐이다)
정말 별꼴이라며 정신없이 얘기를 나누다 도착한 카페는  다음 얘기를 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로지르는 보트가 그림 같은 제주 바다가 펼쳐진 포토스폿에서 사진을 찍으려는데, 우리를 찍어줄 사람이 뒤에 없다.우리 앞에 계셔서 사진을 찍어드렸던 노년의 부부께 사진 한 장 찍어달라 부탁을 드렸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시며 사진을 찍어주셔서 활짝 웃는 단체 사진을 건졌다. 여행 즐거이 하시라 인사드리고 카페로 들어가 주문을 하고 테이블로 가는데, 동기 언니가 그 부부 중 남편분의 휴대폰을 카메라로 찍고 있는 게 아닌가?
"언니 뭘 찍은 거야?"
건너 건너 테이블에 앉으신 그 부부가 들릴 새라

조용히 물었더니, 투박한 메모장에 적힌 제주도 명소 목록을 얼른 찍어가라고 하셨단다. 부인이 저 테이블에서 기다리는데... 불순한 의도까지는 아니었을지라도, 내 남편이 만약 그랬다고 생각하면 스멀스멀 기분이 나쁠 것 같은 것이 영 찜찜한 것이다.
"바람피우는 사람들은 와이프가 옆에 앉아 있어도 눈빛만으로도 가능하대!"
언니가 결정타를 날린다. 하아. 진짜...




8시간의 꿈같았던 한라산 등반!
보기 어렵다는 백록담에 새파란 하늘에 덥지도 춥지도 않은 날씨까지 완벽한 등반이었다.
사우나를 마치고 흑돼지로 목구멍까지 배를 채운 후, 돌아오는 밤 비행기에서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본다.
'프로필 사진 바꿔야지!' 하고 내 사진을 보는데..
아. 저기 뒤에 있다, 회사 중년 남성.
'한라산 백록담'이라고 적힌 고목 앞에 서있는 내 뒤로 흔한 행인처럼 지나다가 찍힌 그분.
정상에 사람이 정말 많았기에 배경에 사람 몇 명쯤 같이 나오는 건 당연했지만, 몇 장 되지 않는 그 사진에 찍혀있는 걸까..
후에 K에게 듣기로는 정상에서 여기저기 둘러보다 제법 여러분 그 중년남성과 눈이 마주쳤다고 했다.
'이 기쁨을 굳이  분들과 나누고 싶지 않아!'
우리 셋은 마치 대본처럼 같은 멘트를 공유했다.

한라산을 등반한 해로 기억될 2023년의 마지막 달이 되었다. 그때의 사진을 다시 꺼내보다 잠시 생각해 본다.
그 중년 남성은 그때 무슨 얘길 하려 했을까.
백록담이 너무 좋아서,
하늘이 너무 예뻐서,
등반한 기쁨을 나누고 싶어서
반가운 마음에 그저 인사를 건네려 했던 것일. 

어쩌면 편협하고 옹졸했을지도 모를 그날의 내가 24년엔 조금 더 넓은 마음을 가지는 사람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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