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집을 나선다
9시 30분 즈음, 애매한 저녁 시간에 정처 없이 그냥 걸으려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아파트를 나선다
입구 옆 벤치에 남자가 앉아있다
까만 방한모자를 쓰고 슈퍼에서 장을 봐온 봉투인지 쓰레기봉투인지 모를 두둑한 봉지를 옆에 두고 마스크를 반쯤 걸쳐 쓰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문득 저 남자가 할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하며 와락 안기는 상상을 한다
그럼 나를 안아주며 특유의 무뚝뚝한 다정함으로 내 칭얼거림을 받아주는 모습을 상상한다
차가운 가을밤의 코 시림인 건지 그리움의 눈물을 참느라 코가 찡해진 건지 모른다
그냥 문득 벤치에 앉아있는 노년의 남자를 보면 그의 뒷모습을 보면 할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근 10년을 병원에서 있었던 사람이라 내 상상은 정말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꾸 상상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봤다
이제 더 이상 나와 같은 곳에 발 붙이고 있지 않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도 길가는 다른 노년의 남자를 보면 여전히 할아버지였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그가 내 부름에 뒤돌아보며 내가 뛰어가길 기다려주는 내 할아버지였으면 한다
할아버지와 비슷한 체형의 남자의 뒷모습을 보면 자꾸 현실에서 멀어진다
내 상상 속 할아버지는 나와 손을 잡고 걸어가니까
내 눈앞에서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봤다
그럴 수 없다는 걸 안다
보고 싶다
그립다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