쌈닭
당신의 분노는 현재 삶의 좌표를 알려준다.
‘드라마를 쓰고 싶다.’고,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어 들어간 회사에서, 3년 내내 창의적이지 않은 일만 하다가, 결심했다. 지독한 서른 앓이 끝에 가슴에 늘 품고 다니던 사표를 던졌고, 드라마 작가를 양성한다는 학원에 등록했다. 무모하고 허황됐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드라마는 갈등!’이라 강조하셨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불구경, 싸움 구경을 보여주려면 인물들 간의 끊임없는 긴장, 도무지 풀 수 없어 뵈는 숙제와 난관을 얽히고설키게 짜 넣어야 한단다. 주인공을 극한으로 몰아가다가, 똥줄이 다 타들어갈 무렵 구사일생으로 돌파하게 하는 극적인 스토리텔링을 배웠다. 그렇다고 무작정 말도 안 되는 사건이 빵빵 터지면 삼류가 된다. 중요한 건 캐릭터! 주인공의 성격이다. 순하기만 한 인물은 갈등이 일어나질 않는다. 까칠해서 없던 문제도 만들어 내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좌충우돌 문제아가 낫다. 인격적으로 훌륭하기보다는 어딘가 하자가 있어서 공감 가능하고 성장의 폭이 큰, 변화하는 인물이 주인공으로 제격이다.
문제였다. 내가. 어느 글쓰기나 마찬가지지만 문체에는 필연적으로 작가의 색깔이 베어난다. 드라마도 예외가 아닌데, 나의 성격과 습성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갈등을 싫어하고 회피하는 평화주의자요, 체제 순응적인 소시민이다. 마음이 약해서 주인공이 곤란한 상황을 잘 견디지 못한다. 그런 내가, 직접 작가가 되어 인물들에게 감정이입을 하다 보니, 문제가 일어날 만하면 바로바로 피할 구멍을 내주고, 행복하게 해결해줘야 직성이 풀렸다. 나의 습작들은 별 볼 일 없이 클라이맥스가 두드러지지 않는 맹숭맹숭한 이야기로 끝이 났다. 습작생들 간에 이런 얘기가 도는데, ‘네가지가 없어야 드라마를 잘 쓴다.’ 난 네가지가 있는 관계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시집을 가버렸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서 아내도 되어보고, 엄마도 하려니 내가 변했다. 필연적인 변태의 과정을 거쳤다. 둘째를 임신했을 때의 일이 생각난다. 외출을 할 일이 있어 남편이 지하철까지 태워주는데, 추운 날씨에 동행한 아이도 있고 나는 임산부이니, 남편은 최대한 출입구에 바로 들어갈 수 있도록 차를 대주었다. 그런데 차를 가까이 붙이는 바람에 내릴 때 우리 차 문이 대기하고 있던 택시의 옆면에 닿았다. 강조하건대, 닿은 거지 친 건 아니었다.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조심히 인도에 올라서는 순간 오만상을 한 아저씨의 얼굴이 창문 밖으로 쑥 나왔다.
“뭐야! 문이 닿았잖아! 차를 그렇게 가까이 대면 어떡해! 아이씨!!”
나는 약속 시간이 늦어, “죄송해요.” 하며 가던 길을 갔다. 한 발짝, 두 발짝, 세 발짝……. 딱 거기서 멈췄다. 갑자기 기분이 심히 안 좋았다. 국가 최악의 저출산율 시대에 내가 무려 ‘둘째’를 ‘임신’했는데, 귀하신 몸이 이런 막대접 받다니. 나도 모르게 고개가 휙 돌아갔다. 눈을 흘기며 몸까지 택시 쪽으로 틀어 소리를 질렀다. 너무 식상해서 화끈거리고, 창피한 바로 그 대사를, 기어코, 뱉고 말았다.
“아저씨! 왜 나한테 반말이야?
당신이 뭔데, 반말이냐고!”
분명히 말하건대, 내 인생에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말이다. 생에 많은 다짜고짜 반말을 당했거늘, 그저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의 반말은 당연하게 받아들였고, 권력자의 반말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젠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어 그런가, 아니면 ‘욱’ 잘하는 남편과 살아서 닮아가는 건가, 아니면 혹시, 설마, 사회학 관련 인문 서적을 보기 시작해서 그런 건가? 배운 여자가 되니 세상의 부당함을 인식하지 못하던 세포들이 마구 깨어난다. 몰랐던 인식체계가 발동되면서 프로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불편러’가 됐다. 큰일이다.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 그저 묘하게 불쾌했던 일들이, 알고 나니 선명하게 화가 났다. 나는 이미 깊은 강을 건너 버렸다.
어느 초등학교에 ‘6학년, 목숨 걸고 공부할 시간’ 이란 현수막이 걸렸단다. 교장 선생님이 학생들의 학구열을 돋우고 열심히 공부하란 뜻에 내건 현수막이겠지 싶다. 나는 저 말에 어떤 특별한 감정을 느끼지 못했는데, 이 문구를 문제 삼아 사진을 찍고 교육청에 고발한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송인수 대표. 교직에 계시던 분인데, 우리나라에서 과도한 학업 노동에 시달리고 심각한 경쟁 스트레스에 내몰린 아이들을 안타까워해 사교육 걱정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인생을 거신 분이란다. 세월호에서 희생된 학생수에 달하는 300여 명의 아이들이 매년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다는데 이 귀한 아이들에게 목숨을 걸고 공부하라는 말은 그분의 분노 신경을 건드렸다.
나는 보았다. 한 사람이 특정하게 분노하는 영역은 그의 인생 좌표를 알려준다는 걸.
내가 요즘 욱하는 것들을 떠올려 본다. 일단은, 가사나 육아를 ‘도와주겠다’는 남편의 말을 그냥 넘기지 못한다. 콕 짚고 목청 높여 토론할 문제다. 아이와 함께 뽀로로를 보다가 모두들 넋 놓고 루피가 맛있는 거 해 주기를 바랄 때도, 웃기지만 토 달고 싶다. 여성의 수고를 당연시하고, 약한 사람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가진 게 없는 사람의 노동을 막 부려먹는 무수한 세상사에 화가 치민다. 한마디라도 하고 싶다. 이렇게 변한 내가 편하지 않다. 쌈닭 같은 내가 피곤하다.
그런데 혹시 나, 이제, 드라마를 쓸 수 있는 건 아닐까?
소중한 분노를 재료 삼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