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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모르는 아랫집 수험생을 위한 기도

같은 상황, 다른 반응

by 김봉란

새벽 4시. 부스스 일어났다.

나는 절대로 미라클 모닝 하는 부류가 아니다.

인생이 걸린 일 아니면 이 시간에 일어날 수 없는 인간이다.


그럼에도 지금, 미명에 정신을 차리고 앉은 것은,

아랫집의 이름도 모르는 수험생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내 자식의 앞날이 달린 것처럼,

혼신의 힘으로 기도를 올렸다.


Unsplash Aaron Burden


“아랫집 학생을 위해 기도합니다.

좋은 컨디션으로 일어나

아침밥 소화 잘 시키고,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장에 가게 해 주소서.

담대하고 용기 있게 해 주시고.

떨리지 않도록 붙잡아 주소서.

열심히 노력한 것 힘껏 쏟아내고 오기를.

공부한 모든 것 명확하게 기억나게 하시고,

혹여 모르는 문제가 나오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슬기롭게 문제를 풀어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리까리한 건 잘 찍을 수 있는 지혜도 주시고,

공부한 것 이상으로 더 잘 볼 수 있게 해 주소서.

시험의 시작부터 끝까지

분초마다 그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고

평안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 그를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소서.


무엇보다,

이 시험을 잘 보고 못 보고에 인생이 달려 있지 않음을

꼬옥 알게 하시고,

시험 결과에 상관없이

그의 인생이 귀하고 아름다운 길로 나아가게 하소서.


아멘."



이름도 모르는 그녀를 위해 이렇게 마음을 쓰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바로 어제서야, 그녀가 고3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제는 평소와 다름없는 아침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를 몇 번 가지 않는 8살 오빠가 느지막이 일어나 3살 여동생을 일부러 깨웠다. 둘은 죽고 못 사는 5분을 꽁냥 거리다가 금세 사랑과 전쟁 모드로 돌변했다. 저럴 거면 동생을 왜 깨우는 건지 원! 갑자기 레슬링이 시작됐다. 아빠가 요즘 바빠 아들을 데리고 놀아주질 못했더니, 오빠는 세 돌도 안 된 여동생에게 레슬링 교습이다. 자기들끼리 엎치락뒤치락하더니 침대 바깥으로 밀려나간 누군가가 쿵쿵쿵! 상황을 진정시키러 달려갔다. 조심히 놀아야지, 잔소리를 퍼붓는 그때!


“띵동”


택배 올 게 없는데, 누구지?

빼꼼 문을 열어보니 앳된 얼굴의 안경 쓴 아랫집 학생이다.

마스크 너머 수줍게 인사를 한다.


“죄송한데요, 제가 내일 수능이라서,

오늘 하루만 조용히 부탁드려요.”


“어머! 정말요! 몰랐어요.

너무너무 죄송해요. 시험 꼭 잘 보세요!!”


아랫집 학생이 수험생이라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내가 너무 무심했다.


1층에서 층간소음으로 올라온 건 이번이 딱 두 번째다. 아기가 돌 좀 지났을 무렵, 냄비를 꺼내어 드럼처럼 탕탕 쳤을 때를 제외하고는 처음 있는 일이다. 갑자기 아랫집의 사정을 알고 나니, 좀 멍했다.


수능을 보는 학생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실은 이 집으로 이사하게 된 것도 층간 소음 문제 때문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올라오시는 1층의 어머니와 아들 때문에 노이로제가 걸렸다. 계단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가슴이 벌렁벌렁해졌다.


나도 당연히 아랫집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으니, 문제가 될 만한 요소를 해결하고 싶었다. 다만, 그 문제라는 것이 고치기 어려운 류의 것이었다. 당시 남편은 야근이 잦아 12시, 1시에 들어오는 날이 많았다. 늦은 밤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으면, 갑자기 빌라 전체를 울리는 망치 소리 같은 것이 땡땡 울렸다. 물소리 내지 말라는 뜻이었다. 결국 남편은 밤마다 주방 싱크대에서 고양이 세수만 하고 잠드는 게 일상이 되었다. 제지시킬 아들은 다행히 아직 남성성이 발현되기 전의 책 좋아하고 만들기에 흠뻑 빠져있을 때라 뛰어다닐 일은 많지 않았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남편의 체중과 걸음걸이였다. 키가 큰 건 아니다. 그저 몸이 타고나기를 역기 선수처럼 땅땅하고 단단하다. 평생을 거침없이 척척 걷는 걸음걸이를 하고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사뿐사뿐으로 전환하는 것이 어려웠다. 아무리 슬리퍼를 신어도 80킬로가 훌쩍 넘는 체중의 영향이 오래된 빌라의 허술한 바닥을 뚫고 전해졌나 보다.


아랫집 아주머니는 그 해 1월에 미리 올라와서 이야기하셨다. 아들이 고3이니 조용히 해 달라고. 아이고, 힘드시겠다며, 우리도 조심 또 조심하겠다고 일렀다. 본의 아니게 죄인 된 층간 소음 가해자들이 으레 하듯, 먹거리 선물 공세도 빠트리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그분들의 성에 차지 않는 모양이었다. 상황 때문에 예민해서 어쩔 수 없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아랫집 학생 공부의 잘되고 못 됨이 마치 전적으로 우리 집의 문제인 것처럼 대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


결국, 이사를 했다. 아랫집이 비어있는 2층이었다. 마음이 편안해지니 정말 살 것 같았다. 1년쯤 자유를 만끽하면서 지내는데, 1층에 새로 이사를 들어왔다. 갑자기 긴장이 됐다. 잊고 있던 트라우마가 올라왔다.


다행히도 지난번과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역시, 그때는 아랫집 학생이 고3이라 그랬던 거구나 했다.



아 그런데!

이 집 학생도 고3이었다니.

1년 내내 모르다 수능 전날 알게 된 이 사실이 내게 너무 충격적이었다. 아랫집 학생을 위한 기도가 절로 우러나왔다. 꼭꼭 잘 됐으면 좋겠다고.


짧은 순간,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지난 집과 이번 집. 같은 빌라 내에서 이사한 거라, 집 상태는 똑같다. 남편이 다이어트를 해서, 5킬로 정도 가벼워졌지만,

애는 하나 늘었다. 아이가 두 명이라는 것은 1+1이 아니라 큰 시너지가 나는 일이다.


같은 상황,

그러나 완전히 다른 아랫집의 태도다.

물론 각자의 타고난 예민함 정도가 다를 테지.

그럼에도 달라도 너무 다르다 보니

자연스레 나를 돌아보게 됐다.

내게 닥쳐 있는 일들을 대하는

나의 자세는 어떠한지.


인생에는 드러난 현상이 아닌 반응이 중요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런데 아랫집 학생 덕에 그 말의 의미를 제대로 새겼다.


온종일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는데 집중했다.

남편은 수능으로 늦은 출근을 할 수 있어 건강검진을 예약해 놓은 바람에 대장의 모든 것을 비워내느라 화장실을 들락날락이다. 하필 이럴 때.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 나지 않게 계속 열어두고

변기 물도 모아서 내리기로 했다.


오늘 저녁에는 치킨이라도 한 마리 사서 보내야겠다.

그간 함께 마음 졸였을 온 가족 회포 푸시라고.






수능날이다.

부디 오늘 시험을 보는 모든 학생들,

잘 보고 좋은 결과 있길 빈다.


그리고,

어떠한 점수를 받든,

그 사건을 좋은 마음으로 해석하고 풀어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스무 살을 두 번 산

마흔의 아줌마가,

명문대는 나왔지만

나만의 길을 찾느라 대학 졸업 후 상당하게 방황했고,

현재는 아이들 키우며 백수로 지내고 있다면서,

꼭 이야기해주고 싶은 말이다.


그때는 시험 결과가 전부인 것 같아도,

앞으로 나아갈 길은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다양한 변수가 펑펑 터지며 내 삶에 올라탈 때,

부디, 그 모든 것을 잘 조련해 나가길 빈다고.


스무 살을 앞둔

보석 같은 학생들의

손을 붙잡아주고 싶다.


마음 단디 하라.

오늘도 무용하지만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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