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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기억

어린 시절이 현재에 미치는 영향

by 김봉란
unsplash @Janko Ferlic

생애 첫 기억에 대한 글을 썼다. 치유하는 글쓰기 수업의 첫 과제였다. 시간 여행자처럼, 나는 기억 조각들을 징검다리 삼아 한 발 한 발 과거로 향했다. 초등학교 교실을 지나, 탁아소, 비행기, 그리고 마침내 더듬어서 도착한 곳은 시골 할머니 집 안방이다.


빛바랜 창호지가 정겹도록 누렇고, 아담한 방구석에 고요가 숨 쉰다. 서너 살 먹은 어린 내가 새우처럼 동그랗게 웅크린 채 옆으로 누워있다. 등이 보인다. 따뜻한 할머니의 벽 같은 등. 일부러 나를 보지 않겠다며 돌아누우신 게다.


나는 할머니랑 연결되고 싶은데, 손도 꼭 잡고 품에 안겨서 토닥토닥 자고 싶은데, 외면당한 느낌이다. 실은 이미 어른들에게 한 번 혼난 뒤이다. 엄마랑 자지 않겠다고, 할머니랑 자겠다고 떼를 부려서 그렇다. 그러니 할머니를 잡아끌 수는 없고, 할머니 방에서 자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지. 근데 눈물이 고이는 건 어쩔 수 없어 이불 끄트머리로 눈을 훔치면서 마음을 참는 중이다.


A4 한 바닥을 채웠다. 숙제를 위해 기억 저 편의 모든 감각을 동원했다. 첫 기억이라는 것이 너무 가물가물해서 안 써질 줄 알았는데, 막상 적다 보니 어린아이의 서러움이 제법 생생하다. 어렸을 때 일들이란 게 사실인지 아닌지, 혹은 꿈을 꿨던 건지, 사진을 보고 상상한 건지, 누가 얘기해 준 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모호함이 있지 않은가. 선명한 증빙자료도 턱없이 부족하고.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내 것이 틀림없다. 아무도 몰랐던 어린 나의 감정이었으니까.


선생님은 각자들이 가진 마음의 실타래를 풀어볼 수 있도록, 써 온 숙제들에 관해 한 마디씩 말씀해 주셨다. 내겐 솔직하게 털어놓으셨는데, “반란 씨의 마음은 잘 해석이 안 되네요.” 괜찮았다. 자가진단을 할 수 있었다.


할머니랑 절대로 떨어질 수 없다고, 울고 불던 다섯 살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늘 일이 바빴던 엄마의 손을 잡고 비행기에 올랐다. 하루의 대부분을 함께 보내던 주양육자 할머니와 떨어진 불안감과 공포 때문에 기내에서 끝없이 울어댔다. 온 승무원들이 나를 달래느라 안달이었을 게다. 선물을 받았다. 갈색 눈이 깜빡거리는 신기한 인형이었다. 사탕과 쪼꼬도 입에 물었던 것 같다. 그래도 할머니가 보고 싶다고 시끄럽게 우는 내게 엄마는 거짓말도 했다. 지금 할머니한테 가는 길이라고. 아닌 것 같았다. 아무리 어려도 직감이라는 게 있었지 싶다. 한참을 기진맥진하여 도착한 땅에는, 낯선 아저씨가 서 계셨다. 먼저 유학을 가서 자리 잡고 계시느라 오래도록 못 뵀던 아빠였다.


그 후로도 얼마나 더 할머니 이름을 불렀을까. 지금이라면, 영상통화니 문자니, 지구 반대편에 살아도 옆집에 있는 것처럼 연락하고 살았겠지만, 그때는 가난한 유학생이 비싼 전화비도 부담스러워 통화도 잘 못 하던 80년대였다.


내 사랑 할머니랑 떨어져 지내는 6년 동안 한 번을 못 만났다. 11살에 상봉했을 때에는 어색함만 남았던 것이 내 서글픈 첫사랑 이야기이다. 보고 싶었던 아들 내외와 손녀를 만나고 마음이 편해지셔서 그랬을까, 할머니는 3년 만에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어릴 적의 감정들이 마흔이 다 되도록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이를 낳고선, 육아에 몰입했다. 첫 아이는 어린이집도 보내지 않고 내내 품에 데리고 있었다. 애착에 집착했다. 아기에게 조금이라도 불안감이나 거절감을 심어주기 싫었다. 모유수유를 했는데 첫째는 유치원에 입학하고 나서야 다섯 살 무렵에 단유를 했고, 둘째는 4살인데 아직도 수유 중이다. 나도 아이를 어딘가에 맡기고 내 시간을 가지고 싶지만, 아이가 엄마와 떨어질 때 우는 모습을 보는 게 더 힘들었다. 미국에 가서도 부모님이 공부와 일을 병행하시느라 탁아소에 맡겨졌던 기억이 내 안에 새겨져 있다. 영어를 할 줄 몰라서 화장실 한 번 가겠다고 말하는 것도 어렵고, 무서웠다. 거기서도 내내 울었다. 물론 내 아이들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있고 불안할 일도 적다. 그런데도 내 기억과 경험 때문에 나타나는 반작용의 힘이 세다. 친구가 내게 말했다. 애들이 아니라 엄마가 분리 불안이라고.


전업 엄마로 보낸 시간이 벌써 7년이다. 이제, 사회로 다시 발걸음 하고 싶다. 때로는 빨리빨리 애들을 맡기고 나의 삶을 이어나가지 못한 내가 바보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물론 함께 아이를 돌봐줄 조력자가 없어서 더 그랬지만, 어쨌든 불가항력적인 마음에 이끌린 내 인생이다. 덕분에 아이들과 좀 더 오래 친밀했고, 이야기는 쌓였으며, 엄마의 간절함은 짙어졌다.



내용은 잘 모르는,

어느 회장님이 쓰셨다는 신간 제목이 떠오른다.

'그늘도 인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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