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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란 Apr 05. 2021

취미는 장비빨이 필요한가?

하수는 연장 덕을 봐야 한다

등산 한 번 하기 전에, 캠핑 한 번 가기 전에 장비부터 갖추려는 사람이 있다. 내가 그렇다. 취미 생활하다 가산 탕진한다던데, 다행히 나의 취미는 소소한 그림 그리기로 시작했다. 약간 좋은 색연필을 구매했다. 아, 참. 질 좋은 스케치북도 하나 얹었다.

@redtedart

실은, 꽤 오랜 시간 바이올린을 가르쳤다. 전공생, 입시생, 초급 어린이, 취미 어린이. 다양했다. 진지하게 사력을 다 하는 입시생과 전공생을 가르치는 건, 보람 있는 일이었다. 페이도 셌다. 단, 그만큼의 스트레스를 함께 짊어져야 했다. 실기시험의 압박과 입시 스트레스를 학생과 동일하게 받다 보니, 어떤 날은 1시간 레슨을 하고 나온 나의 미간에 세로로 깊은 두 줄이 새겨져 있었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는 줄을 짚는 위치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 감으로 정확한 포지션을 알아야 하는데 0.1 센티미터라도 높거나 낮으면 음정이 틀린다. 정확하게 공명이 되어 울리는 딱 그 지점을 짚지 않으면 음정은 비슷할지 몰라도 투명하고 깨끗한 음색이 나지 않는다. 또 활의 각도가 엇나가면 쇤 소리도 잘 난다. 그러니 깽깽이라는 별명이 있다. 소리에 예민해야 잘할 수 있고, 할수록 더욱 예민해진다.


가르치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류는 취미로 하는 어른이었다. 직장 다니느라 연습을 할 시간이 별로 없어, 늘 진도가 제자리인 사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드물게 만나본 어른 제자 중에는 일터에서 찌든 스트레스를 바이올린으로 승화시키는, 제2의 인생은 바이올린과 함께할 것 같은, 열정 어린 부류가 있었다. 늘 궁금한 게 많고, 귀가 고급이라 이상이 높았다.

@Johanna Vogt

이런 어른 제자는 장비 욕심을 부렸다. 연습용 바이올린은 10만 원대부터 구할 수 있는데, 그 윗등급의 60만 원 정도 되는 악기를 사거나, 더 윗 단계의 백만 원을 웃도는 악기에 눈독을 들였다. 비싼 악기는 적은 노력으로 고운 소리가 나는 반면, 싼 악기는 힘을 들여야 좋은 소리가 난다. 유튜브에서 간혹 전공자가 연습용 싸구려 악기와 비싼 악기를 모두 연주해 보고 어느 악기가 더 좋은 건지 맞춰보게 하는 실험도 하던데, 그럴 때 의외로 못 맞추기도 하고, 큰 차이가 안 날 때도 있다. 그것은 그만큼 숙련된 솜씨로 소리를 뽑아내기에 가능한 일이다. (또한, 바로 앞에서 소리를 녹음하는 상황이니, 그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좋은 악기일수록 바로 앞에서만 쟁쟁거리는 것이 아니라 대규모 콘서트홀의 2층까지도 풍부한 소리가 전해진다.) 그렇다면 취미로 하는 사람일수록 더 쉽게 좋은 소리가 나는 악기를 써야 하는 것이 아닌가? 장인은 연장을 탓하지 않지만, 장인이 아닌 사람은 연장빨이라도 받아야 하니까.


여기에 매우 긍정하는 입장이다. 단서조항은, 본인이 그 음색에 대한 식별이 가능할 때 말이다. 바이올린 줄을 예로 들어 보겠다. 연습용 바이올린 줄의 기본은 ‘도미넌트’ 현이다. 각각 다른 4개의 줄이 한 세트인데, 5만 원정도 한다. 연습용 악기를 구매할 적에는 이 보다 더 저렴한 줄을 껴서 판매한다. 으레 “도미넌트 현으로 바꿔드릴까요?"라고 묻는다. 5만 원을 추가하겠냐는 말이다. 도미넌트 현이 튼튼하기 때문에 보통은 바꾸기를 권장한다.


그런데, 도미넌트보다 비싼 줄도 많다. 각 줄은 특색이 있다. 악기와의 궁합도 고려해야 하지만, 일반적으로 화려하고 쨍쨍한 볼륨을 원하면 ‘비전 티타늄 솔로’를, 좀 더 깊은 음색을 원한다면 ‘오블리가토’를 부드러운 소리는 ‘에바 피라찌’를 쓴다. 그러니까, 이런 더 비싼 고급 현을 쓰려고 한다는 건, 그 음색이 자신의 취향에 확실히 다는 판단이 서고, 연주를 했을 때 도미넌트를 쓰는 것과 차별화된 소리를 낼 수 있으며, 그에 대한 자가 인식을 할 수 있을 때 쓰는 것이 좋겠다. 억대 바이올린을 갖고도 10만 원짜리 바이올린과 동일하게 깽깽거리고 있다면 그 좋은 악기가 아무 소용이 없을 테니 말이다.




나는 색칠 좀 한다는 사람들이 소장한다는 프리즈마 유성 색연필을 들였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쌔' 문구세트를 바라보는 설렘이 돋았다. 일부러 종류도 많은 132색으로 골랐다. 촤라락 펼쳐 칼라차트를 칠하며 색연필들과 통성명에 들어갔다.

덤으로 영어 공부도 했다. Ochre가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찾아보니 황토란다. Poppy Red에서 Poppy가 뭔가 했더니 양귀비꽃 이름이다.


색깔에 진심인 편이다. 약간씩 다른 색감차이를 인식해서 마음에 꼭 드는 색을 서로 다른 면에 칠했다. 심지어 132색에 포함된 노란색이 조금만 더 다양했으면 좋겠다고, 많고 많은 초록색 중에 딱 마음에 드는 '그 초록'이 없다고 느껴질 때도 있었다. 물론, 덧칠을 해서 조색하듯 만들어 가면 됐다.


검색의 바다를 항해했다. 색연필 하나도 어찌나 많은지, 정말 놀라웠다. 물을 묻히면 번지는 수채화 색연필, 파스텔 계열이 예쁜 홀베인, 메탈릭 계열이 매력적인  더웬트, 500색이나 된다는 펠리시모, 전문가용 라인이 따로 있는 까렌다쉬나 파버카스텔의 색연필들도 두루두루 살폈다. 덕후의 징조가 보였다.


그러나 취미에 불붙는 것이 일시적일 수 있음을 감안했다. 중고나라에 들어가 보니, 거의 새것인데 안 쓴다며 내놓은 색연필들이 보였다. 잘은 모르지만 그분도 처음엔 화르르해서 샀을 고급 장비다. 지금 가진 도구에 만족하고 취미를 대하는 나의 지구력을 지켜보기로 했다.

장비를 구매하는 기준으로 적당하다.

칼라차트를 만들며 색 하나의 영롱함과 색 하나의 오묘함에 마음이 홀딱 빠졌다. 대단한 그림이 아닌 그저 작은 네모상자를 칠했을 뿐인데, 미술치료를 받은 것처럼 평온함이 느껴졌다. 그렇게 취미의 세계 속으로 한 발 젖어들었다.  


그리고,


색연필 외에 또 다른

미술재료 개미지옥으로 점점 빠져들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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