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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봉란 Apr 07. 2021

벚꽃구경 대신

관심을 가지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과거의 오늘 사진이 딩동! 봄이다. 5년 전에도 똑같이 봄이 잠시 왔다 갔던 흔적이 핸드폰에 남아있다. 벚꽃, 벚꽃, 아들, 벚꽃, 아들. 벚꽃. 마스크만 안 썼지, 요즘의 풍경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한 순간의 기록 덕에 급격히 추억빠졌다.


몇 해 전, 말로만 듣던 진해 군항제에 가봤다.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삼십 년 넘는 세월 동안 이런 것도 안 보고 여태 뭐하고 살았나 싶었다. 진해 도시 한복판에 흩날리는 꽃보라를 맞으며 산책을 하는데, 아름다운 이곳에는 범죄가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경찰들은 하품이나 해 대며 할 일 없이 당구나 치러 다니겠지. 학생들은 ‘학폭’이란 단어도 모르고 팔짱 끼고 다니며 떨어지는 꽃잎르르. 마주한 풍경은 비현실적인 상상을 돋우었다. 구례, 하동, 섬진강가에서는 다짐까지 했다. 절정의 미를 뽐내는 꽃나무들아, 내 너희들의 고운 얼굴을 매해 보아주러 오리라!

안타깝게도 나는 거짓말쟁이가 되었다. 매 해 마음만 품고 실제로 걸음 하지 못했다. 계절을 챙겨 여행을 다닌다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다. 요즘처럼 여행자가 민폐를 끼칠 수 있는 코로나 시국에서는 더더욱.


그런데 아쉬움을 달래는 일과가 하나 생겼다. 요란 법석한 꽃구경 대신 고요하게 창밖 목련 나무를 관찰하는 일이다. 목련의 하아얀 잎 하나에 담긴 봄을 음미한다. 그 안에도 ‘대추 한 알’처럼, 태풍이 몇 개, 천둥이 몇 개, 벼락이 몇 개. 반할 만한 모습으로 우아하게, 꼿꼿하게 피었다가, 돌연 추한 똥색으로 갈변한다. 시시각각으로 늙어가는 나 같아서 서글퍼진다. 그럼에도 이내 희망이 솟는다. 꽃을 떨구어낸 가벼운 가지에서 연녹 빛깔 잎이 총총 돋아나고 있기 때문이다.

보테니컬 아트를 잠시 배웠다. 그러니까 식물을 그리는 예술 말이다. 여느 사십 대 아줌마답게 꽃을 좋아하고 꽃 사진이 늘어간다. 하지만 보테니컬 아트는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이미 자연 그대로 충분히 아름다운 것을 굳이 그대로 옮겨야 하나 싶었다. 나의 첫 미술 선생님이 숙제를 내주셨으니 군말 없이 따라가 보기로 했을 뿐이다.


취미생활을 시작하고서 정말 좋았던 일 중 하나는 이런 편견을 뛰어넘는 경험을 맛보았다는 점이다. 거부감을 느끼거나, 선호하지 않았는데, 막상 도전을 해보면 예상외의 만족을 얻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신대륙을 발견했다.


꽃잎 채색을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생명 없는 그림에 창조주처럼 생기를 불어넣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꽃잎의 결을 생각하면서 옅은 색부터 진한 색 순으로 겹겹이 빛깔을 입혔다.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이리저리 덧칠을 해보니 근사한 결과물이 완성됐다. 거장이 된 것 마냥 뿌듯했다.

미소이쌤과 함께 했던 [사부작 보태니컬 아트] 클래스

원래 식물 이름 같은 건 전혀 몰랐다. 초록은 풀이요, 갈색은 나무며, 빨강은 꽃인, 지극히 단순한 분류 체계만 있었다. 그런 내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니 많은 일상이 달라졌다. 길을 가다 멈추어 서는 일이 잦아졌다. 이전이라면 스쳐 지나쳤을 대상에 눈을 마주치고, 자세히 살폈다. 오래 보았다. 끝이 매끈한 잎, 톱니처럼 까끌한 잎, 잎이 좁고 작아서 붓칠 한 번으로 그릴 수 있는 놈, 잎이 넓고 뚱뚱해서 두 번 칠로 그려야 하는 놈, 대칭으로 붙어있는 아이, 어슷어슷 자유분방하게 달린 아이.


산에 가서 오지 탐험한 적 없다. 아파트와 빌라 단지 안에서, 도시 문명 곁의 식물들만 봤을 뿐인데도 멋스러운 식물을 많이 발견했다. 그들은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발견이 되든 말든 봐달라고 아우성치지도 않았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장님이 눈 뜨기를.


관심을 가지는 일,

관찰을 해 보는 일,

그것은 닫혀 있던 눈꺼풀이 벗겨지는 일이다.


그림이 날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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