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봉란 Apr 09. 2021

잠시, 어려지는 법

아이처럼

남편의 꼴배기 싫은 모습이 한 가지 있다.

발, 혹은 다리에 상처가 나서 끙끙 앓고 절뚝거릴 때.


다친 사람한테 너무 야박한 악처라고 뭐라 하지 마라.

그 내막은 이렇다. 축구를 좋아하는 남편이 유일하게 쉬는 날에,  새벽 축구 모임에 가, 부상을 당해 와서는 하루 종일 골골거리는 것이다. 정말 등짝을 한 대 후리고 싶은 마음이 솟구친다.


경기를 뛰고 있노라면, 청년 때 날렵했던 스트라이커의 모습으로 빙의해 마구 슛을 날리려고 하는데, 아뿔싸! 내 몸은 내 것 같으면서도 내 것 아닌 , 유연성도 순발력도 떨어진 상태다. 몸의 주인은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직도 자기가 무슨 20대 손홍민인 줄.


한 번은 축구를 하다가 넘어지면서 머리를 세게 부딪혀서 왔다. 혹시나 싶어 응급실까지 갔더랬다. 나는 나름 남편한테 할 잔소리를 글로 풀면서 삭이는 사람인데, 이 날은 한 소리 안 할 수가 없었다.


"지금 제정신이야! 처자식도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몸 생각을 안 하고 애처럼 축구질이야!"


그렇다. 그는 축구만 하면 아이가 된다. 먹여 살려야 하는 가족도 잊고, 내일 일터로 다시 출근해야 하는 것도 잊는다. 나이를 잊는다. 체면도 잊는다. 9살 된 아들처럼 똑같이 둥근 공 하나에 온 정신을 뺏긴다. 유희를 추구하는 호모 루덴스의 대변자쯤 되신다.

 



동이 터 오고 있다. 어두컴컴했던 거실에 빛이 스며 들어오더니 새벽 햇살이 따사롭게 손을 간질인다.


'아니, 지금 몇 시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밤을 새웠다.

아이를 재우고 12시 다 되어서 붓을 들었다.

온라인으로 수채화를 배우는데, 며칠 빼먹고 있어서 잠깐이라도 붓을 잡아야 감을 잃지 않을 것 같았다.

손만 푼다는 게 나도 모르게 그만...

수채화를 몇 년 만에 해 보는 건지 모르겠다. 고등학교 때도 미술 수업이 거의 없었다. 기억에서 가장 최근에 팔레트를 펼치고 붓을 들었던 것은 중학교 때다. 말하자면 25년 만인 샘이다. 특별히 관심이 있지 않는 한 보통의 어른들이 다 이와 같을 테지.


수채화가 색연필보다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은 확실하다. 물도 떠놔야 하고, 물기를 제거할 타월도 필요하다. 그리고 물감이 짜인 팔레트. 거기까지 가는 모든 절차를 이겨내고 가는 게 쉽지 않다. 그래서 요즘 유행하는 온라인 취미 수업들은 준비물까지 다 챙겨서 보내준다. 돈만 내면, 100프로 준비된 환경을 집으로 배달해 준다.


나의 선생님은 친히 팔레트에 물감을 짜고 말리고 또 색깔 이름까지 써서 보내주셨다. 한 번 판을 펼치는 게 어려웠지, 그다음부터는 쉬웠다. 책상 한 편에 나의 예술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언제고 스윽 가서 물 한 병 떠왔다. 그럼 됐다.


심지어 여행지에 갈 때도 미니 팔레트와 붓 하나를 챙겨갔다.  색연필 여러 개를 가져가는 것보다도 가벼운 구성이었다.

한 번 수채화의 맛을 알고 나니, 야외에 꽃구경을 갈 때도, 경치 좋은 곳에 드라이브 갈 때도, 도구들을 챙겨가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미소이쌤과 함께 했던 [사부작아트 수채화] 클래스

수채화가 은근히 까다로운 점은, 물의 농도를 조절해서 지면에 원하는 색깔을 너무 진하거나 너무 묽지 않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놈의 물자국. 나 같은 초보가 잘 범하는 실수인데 붓에 너무 물을 많이 묻히고 하다가, 그만 보기 싫은 번짐이 남는다.


연필로 밑그림을 그리지 않고 쓱쓱 칠하는 게 자유롭고 재밌는데 숙달된 솜씨가 아니다 보니 붓이 지나간 길이 상상한 이상대로 나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지우개로 지울 수 없어 계속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그리다 보니 밤을 새우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놀랄 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수채화 수업을 함께 듣던 아줌마들 중 다수가, 그런 경험을 했다. 단체 채팅방에 새벽 이른 시간에 이미지 파일이 올라오곤 했다. 어쩌다 보니 밤을 새웠다며. 한 둘이 아니었다. 유별난 예술혼을 가진 아줌마들이라 그랬을까?


우리의 내면에는 누구나 놀이를 즐기는 아이가 숨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그 유희가 우리를 몰입의 세계로 이끈다.

주변의 모든 부차적인 것들을 제치고 오롯이 나의 즐거움이 앞장선다. 아들이 1시간만 놀고 오겠다 하고선 4시간이 다 되도록 놀이터에서 정신줄 놓고 도둑잡기와 모래성 쌓기에 빠진 것처럼, 놀이는 시간에 전혀 얽매이지 않는다. 남편에게 축구가 그랬듯, 내겐 수채화가 그랬다. 


우리는 경직되고 굳어진 어른 자아로부터 잠시 탈피한다. 노화한 육신과 피곤함이 현실로 다시 몸을 잡아당겨 앉히긴 해도, 잠시 아동기로 돌아간 순간적인 경험이 우리의 정신을 이완시킨다.


9살처럼. 4살처럼.

취미, 그것은 젊어지는 샘물.


매거진의 이전글 벚꽃구경 대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