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박 미수

by 김봉란

꼭 빨간색이더라. ♨

불가마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간판의 그림과 그 옆의 24시 글자 말이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붉은빛이 오늘따라 왜 그렇게 불온하게 느껴지는지. 그날도 욱하는 마음에 집을 나와 동네를 서성거리다 찜질방 앞에 멈춰 섰다.


지난번엔 밤새 여는 카페에 들어가서 정혜신 선생님의 “당신이 옳다”를 두어 시간 읽었었다. 옆 테이블에는, 찾는 전화조차 오지 않는 고등학생들이 말끝마다 ㅈㄴ와 ㅆㅂ을 붙여가며 웃고 떠들었다. 사경 즈음 집에 들어가니 아이들은 만화 계 탄 날이 되어, 바다탐험대 옥토넛을 몰아 보다가 돌아온 엄마를 보고 울었다. 한편, 남편은 코까지 골며 뒤척임 없이 편히 주무셨다.


그날의 후유증은 며칠이나 더 갔다. 깨어진 바이오리듬을 되찾기까지, 육체 피로를 해소하기까지, 또 약 오른 부글부글함을 다스리기까지,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해서 이번에는 좀 더 진화된 형태의 외박을 생각한 것이다. 아무리 부부싸움을 했어도, 이 나이에 잠은 편히 자야지. 지난번 교훈을 마음에 새겼다.


실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들을 상상하며 글을 썼던 적이 있다. 드라마 단막 공모전에 습작을 내봤는데, 이야기 속 주인공은 나와 달리 아주 대범했다. 드라마는 판타지라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들었다. 화가 나서 집 나간 주부가 럭셔리 호텔에 들어가, 체크인을 하고, 기왕 이렇게 된 거 룸서비스까지 시켜 먹는 장면을 그렸다.


네이버 블로그 @황시


현실의 간 작은 나는, 홍등이 켜진 24시 불가마 앞에서도 안절부절못했다. 마치 누군가, “아줌마, 애들은 어쩌고 이 시간에 돌아다니는 거야!” 혼을 낼 것만 같고, 순찰을 도는 경찰 아저씨도 왠지 날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호텔식 호화 외박을 통쾌하게 꿈꾸며 남편 카드까지 챙겨서 나왔건만! 벌렁벌렁한 마음은 찜질방을 지나쳐 24시 편의점을 향하게 했다. 애들 키우면서 건강 생각한다고 마지막으로 컵라면 먹었던 때가 가물거렸는데, 결혼 전 내가 즐겨 먹던 참깨 라면이 떡하니 진열되어 있었다. 기분이 좋아졌다. 수십만 원 들뻔했던 호텔비를 절약한 셈이다. 천원이 조금 넘는 금액을 결제했다. 국물이 얼큰하고 고소한 참깨 라면을 후루룩 들이켰다. 그 온기로 몸과 마음을 채워 귀가했다. 지난번처럼 손해가 크지 않은, 성공할뻔한 외박이었다. 소소한 행복도 조금 얻었다.


하지만, 사실 좀 자존심 상하지 않는가?! 이제는 면도 서지 않는 나의 가출, 외박 시도가 번번이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 만 하루도, 반나절도 못 채운 바깥나들이들이! 출근하는 남편이 아침에 애들을 어떻게 해야 하나, 어디다 맡길까, 똥줄 한 번 타 봐야, 집사람의 소중함을 절감할 텐데. 부부 모두의 힘이 합쳐져야만 가정이 유지되지만, 우리 집처럼 외벌이인 가정은 주부가 억울한 경우가 생긴다. 수고로이 각자의 역할을 감당하는데도, 실질적으로 눈에 보이는 돈을 들고 와서 생색을 낼 수 있는 남편과 달리, 전업주부의 수고는 물처럼 공기처럼 당연한 배경이 된다. 존재가 중한 데 비해 존재감은 없다.


나 없이, 어디 독박 육아 한번 해 봐라! 하며 ‘나’를 좀 알아달라는 요란한 가출을 하고 싶지만, 생각해 보니 계속된 실패는 아이들 탓도 크다. 우는 아이를 생각하면 괴롭고 마음이 약해져서 뜻한 바를 성취하기 영 어렵다. 그래서 다음번에 집을 나간다면 아이를 데리고 가야겠다고 결심했고, ‘그날’이 왔을 때, 짐가방부터 쌌다.


아이를 데려간다는 것은, 그만큼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기저귀부터 입을 옷, 물티슈와 간식까지, 짐은 야무지게 쌌는데, 숙소가 문제다. 깔끔한 호텔을 가자니 카드 긁을 손이 떨리고, 모텔을 가자니 좀…. 친정을 가면, 내 편에 손들어줄 다혈질 엄마가 남편 머리를 잡을 텐데, 영구 땜통 대머리랑 살아야 하는 건 결국 내 몫이 될 거고…. 어휴. 그래도 집을 나올 때 협박은 그리했다. 택시를 타고서라도 친정에 갈 거라고! 그런 줄 알라고. 이번에야말로 남편도 움찔했다!


아이들과 손을 잡고 밤 12시에 집을 나왔다. 애들은 약간 설레는 모양이었다. 웬일이지? 이 시간에? 꽤나 먼 할미 집을 간다고? 아들은 눈치 없이 신나 했다.


빌라 단지 내에서 꾸물꾸물 발을 끌었다.

아이는 재촉했다. “엄마, 차 타려면 저기로 가야지!”

단지 밖을 향해 손을 잡아끌었다. 아들의 주도로 큰길에 도착했다. 좀 으스스했다. 인적도 드물고, 차도 없고. 고요하고, 깜깜하고, 막막하고.


그때, 아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엄마, 저기 택시다!”


앗, 진짜로 택시가 우리 쪽으로 다가오고 있다.

앗, 기사님이랑 눈 마주치면 안 되는데,

앗, 우리를 그냥 지나치셔야 하는데.

앗, 창문 내리시면 안 되는데.


나는 황급히 아이를 잡아끌며 뒤로 내뺐다.

“엄마, 택시를 타야지, 왜 그냥 가!”

답답해하는 아들은 어리둥절했다.


아들아, 진짜 택시를 탈 수는 없는 이 마음을 네가 어찌 알리요.

이 시간에 친정을 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것도 아니요,

이 시간에 친정을 간다고 해서 부모님이 쌍수 들고 환영할 것도 아니요,

이 시간에 친정을 간다고 해서 남편이 변하는 것도 아니요

이 시간에 친정을 간다고 해서 우리 가정이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니 저 택시에 무작정 몸을 실을 순 없다.

남편이 폭력을 행사한 것도, 바람을 피운 것도, 돈을 안 주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집을 나왔을까. 하향 평준화된 ‘좋은 남편’의 기준을 웃도는 요구들은 부당한 것인가.


빌라 주변을 뱅뱅 돌다 결국 집에 들어갔다. 아이들은 실망했다. 내게 짜증을 냈다. 할미 집 안 간다고 말이다. 그 모습을 보던 남편은 웃음을 참았다. 그는 눈치를 살피며 설거지도 좀 하고, 청소도 좀 해놓고, 진 사람처럼 굴었다. 져준 건가. 아무튼 나의 외박 미수는 실패했으면서도 성공한 것도 같았다.


친한 동네 엄마가 내게 말했다.

“다음번에 또 나올 일 있으면 전화해. 내가 텐트 빌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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