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Joana Kruse
“엄마가 한 달 동안 집 나갔었어.”
친구는 지난 일을 담담히 말했다. 그 집은 삼 남매가 있는 가정인데, 엄마가 한 달을 비우셨다니, 엄청난 부부 갈등, 혹은 고부갈등이 있었나? 조심스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고 물었다. 정작 친구는, “엄마도 그때 왜 그랬는지 모르겠대.” 라며, 웃어넘겼다. 스무 살 언저리에 들었던, 흘려버렸음직한 이야기가 마흔이 다 되도록 기억난다. 삶의 고개들을 넘어갈 때 문득 떠오른다.
엄마 갱년기 때, 난 참 무지했다. 나이 들어가는 한 인생의 시기가 그렇게 감정적으로 부축을 받아야 하는 일인지 정말 몰랐다. 이해하려 애써보지도 않았다. 엄마가 요즘 왜 저래, 하며 내 인생, 내 친구, 내 공부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있었다. 날 선 말의 전쟁을 치렀던 어느 날 밤, 우리 엄마도, 문을 열고, 나가셨다. 12시가 넘었던 시간, 달밤의 선선한 공기를 쐬고 오시면 괜찮아지시겠지. 그냥 잤다, 난. 푹 잤다. 그리고 일어나, 평소처럼 차려진 밥상 앞에 앉아 밥을 처먹었다. 인생의 가장 후회되는 한 장면이다. 그때 우리 엄마도 홀연히, 훨훨 어디든 날아가고 싶은 발을 질질 끌며 집에 돌아왔었겠구나.
또 다른 지인도 한숨을 쉬며 동서네 애가 셋인데, 글쎄 동서가 연로하신 시부모님께 아이들을 아낌없이 탈탈 털어버리고 밤낮 핸드폰만 들여다보더니 어느 날은 여행을 떠났단다. 우울증이 심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이 아프건 말건 세간엔 파격적인 며느리로 소문났다. 집안 사정을 누가 속속들이 알겠나. 하지만, 남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 쯧쯧거리는 사이, 알지도 못하는 그 동서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있었다. 그간 얼마나 참았을까? 그간 얼마나 버티려 애를 썼을까? 결국 잡아당기고 잡아당겨서 끝내 복원되지 못하는 스프링처럼, 그녀도 고장이 난 게로구나.
아주 가볍게 말하자면, 직장인이 월차를 내고 휴가를 쓰듯, 엄마에게도 쉼이 필요한 법이다. 현실적으로 엄마라는 붙박이장은 눈이 오나 비가 오나 꼭 필요한 역할을 수행하다, 꼭 필요한 '혼자만의 시간'들은 반납하며 사는 날이 길어진다. 끝이 안 뵈는 육아의 여정이 어떤 면에서는 사막과 같을 수 있다.
남편과의 애정전선에 문제가 없어도, 내 아들 신발 사 주고, 내 딸 책 하나 사 주는 게 우선인 헌신적인 엄마여도, 집은 나가고 싶은 곳이기도 하다. 요즘 많이들 보는 해방 타운이 사람들에게 공감을 사는 이유가 아닐까. (해방 타운은 기혼의 출연자들이 가정을 벗어나 외딴 장소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관찰 예능프로그램이다.)
해방 타운의 여러 출연자 중 단연 돋보이는 이는 윤혜진이다. 그녀가 오랜만에 예전 동료들과 함께 무용 연습실에 가서 웃고 떠들다가, 주변의 부추기는 소리에 후배의 토슈즈를 발에 겹쳐 보았다. 7년 만이랬다. 작아서 좀 꼈지만 어쨌든 발이 들어갔고, 몸이 기억하는 손놀림으로 리본을 자연스레 묶었고, 될까 말까 망설이던 발이 꼿꼿하게 섰고, 한때 자신이 주인공으로 활약했던 ‘백조의 호수’ 안무를 단번에 기억했다. 아름다운 춤사위를 구경하는데 묘하게 묵직한 감정이 일렁거렸다. 무수한 시청자와 함께 나도 좀 울었다.
그녀의 외출이 특별한 감동을 주는 것은, 혼자만의 시간이 그저 이벤트성 휴식으로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발레리나였던 그녀도 똑같은 시간을 통과했구나. 보통의 너와 나 나처럼 매한가지로 결혼 출산 육아의 길을 걸으며 스포트라이트 받는 자리에서 생활인으로 내려왔구나.
그녀가 오래도록 접어두었던 꿈 자락을 살포시 꺼내는 걸음이 대리만족감을 주고, 응원의 마음을 갖게 한다. 나도 언젠가? 희미하게 빌면서 말이다.
오늘 같은 가을날, 남편에게 시 한 수 읊어줘야겠다.
여보, 일 년만 나를 찾지 말아 주세요
나 지금 결혼 안식년 휴가 떠나요
그날 우리 둘이 나란히 서서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하겠다고
혼인 서약을 한 후
여기까지 용케 잘 왔어요
사막에 오아시스가 있고
아니 오아시스가 사막을 가졌던가요
아무튼 우리는 그 안에다 잔뿌리를 내리고
가지들도 제법 무성히 키웠어요
하지만, 일 년만 나를 찾지 말아 주세요
병사에게도 휴가가 있고
노동자에게도 휴식이 있잖아요
조용한 학자들조차도
재충전을 위해 안식년을 떠나듯이
이제 내가 나에게 안식년을 줍니다
여보, 일 년만 나를 찾지 말아 주세요
내가 나를 찾아가지고 올 테니까요
공항에서 쓸 편지 / 문정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