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의 달

어르신께 좋은 선물을 받는 건... 가끔 너무 슬플 때가 있습니다.

개원 초기의 일입니다. 개업하고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손재현 어머님 말씀의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했었습니다.






당시에 손재현 어머님은 암 수술을 하신 지 4년 정도 되셨습니다. 암 치료 후 몸이 못 견디게 불편하신 분들이 종종 오시는데, 그런 분이셨습니다. 그때 70대 중반 정도셨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한의원에는 허리, 다리, 팔, 어깨, 목의 통증으로 침을 맞으러 다니셨습니다. 이 어머님이 아프다는 말 이외에는 거의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처음으로 다른 이야기를 꺼낸 것은 거의 1년 가까이 물리치료와 뜸 치료를 한 다음이었습니다.



“원장님. 우리 집에 오디오 큰 게 있어요.”

“오디오요? 어머님 음악 듣는 거 좋아하세요?”

“그럼요. 좋아하지요.”



당시에 저는 소식지를 격주에 한 번씩 발행했었습니다(아래에 샘플로 하나 올렸습니다. ^^ 예전이라 태영한의원이라고 되어 있네요.). 왜냐하면 환자분들 티칭 할 때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것을 좀 정리해서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손재현 어머님은 그 소식지에 써진 글을 읽고 저에게 말을 걸었던 것입니다.





















“근데 그 큰 오디오를 아깝지만 버렸지 뭐야. 이젠 듣지도 않아.”

“아이고. 어머니 아까우셨겠어요.”



저는 깜짝 놀라서 대답했습니다. 사실 지금 생각해 보면 조금 다른 대답을 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그러자 어머님은 더 놀라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래도 내가 가지고 있는 첼로는 안 버렸어. 원장님 연말에 베토벤 합창 보러 가신다고 저기 적어놨더만. 나도 저기서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활동도 하고, 애들 데리고 레슨도 하고 그랬지.”



이 순간 저는 저절로 와~~ 하고 작게 탄성이 나왔습니다. 지금은 잦은 수술과 침상안정으로 인해 걸을 때마다 숨이 찰 정도로 몸이 둔해지셨지만, 첼로까지 하셨던 분이라니... 어머니라고 불렀지만 사실 아주 나이 많으신 할머니셨기 때문에 정말 상상을 못 했습니다.








그 오디오 이야기가 있고부터 어머님은 말이 많아지셨습니다. 그러고는 몇 가지 질문을 집요하게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반복적으로 이야기하셨던지 그걸 물어보셨던 어머님 표정이랑 자세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날 정도입니다.



“원장님. 근데 원장님은 오디오는 있어요?”

“저요? 저는 컴퓨터로 듣는데요?”

“쯧쯧. 그거 말고. 원장님 시디 넣는 오디오 있냔 말이야.”

“어머니 컴퓨터로 씨디 넣어서 들을 수 있어요.”

“아 그래?”



그러곤 다음 날이면 또 이렇게 물어보셨습니다.



“원장님 오디오에 씨디 달린 거 맞지?”

“네 어머님. 요새는 컴퓨터로 다 들을 수 있어요.”

“(혼잣말로) 그래 좀 뭣하면 차에서라도 들으면 되지...”

“네?”

“응? 아니야. 됐어.”



그때부터 다소 무뚝뚝하던 어머님이 갑자기 친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오실 때마다 열심히 치료해 줘서 많이 낫다는 말씀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게 정말 이상했던 점은 그즈음부터 해서 수술 이야기도 몇 번이나 꺼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저도 경험이 많지 않을 때라서 그러려니 하고 넘겼습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님이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녹음한 앨범 하나를 가져오셨습니다. 사라사테의 곡이 들어있었고, 그중에 집시의 달(지고이네르바이젠)이 메인 곡인 것 같았습니다.



“원장님 이거 들어. 원장님 음악 좋아하신다니 내가 다 좋네. 차에 있는 오디오로 들어도 되니까 시디 꽂아서 들어. 알지?


사실 내 동생이 바이올린을 잘했어. 그래서 집시의 달을 종종 켜줬거든. 근데 이게 쉬워 보이지만 정말 어려운 곡이야. 흉내는 낼 수 있어도 제대로 켜기가 보통이 아니거든. 나는 걔가 종종 생각이 나네. 나보다 일찍 갔지 뭐야. 우리 형제들끼리 같이 있었을 때는 참 좋았었는데. 요즘 그 생각이 자꾸 나.”



.



그게 어머님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아직도 제 방 한켠에는 어머님이 주신 CD가 뜯지 않은 상태로 소중하게 잘 보관되어 있습니다.






<제가 당시 썼던 소식지>

-이 소식지를 쓰고 한참이 지나도 안 오시기에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마지막 인사였네요 ㅠㅠ


아... 이별 선물은 너무 싫다.


어머님, 너무 다재다능하셔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라사테집시의 달은 바이올린 곳인데, 처음에 어머님이

말씀하실 때는 무슨 곡인지 몰랐습니다. 그런데 검색해 보니 지고이네르바이젠이었습니다.


저는 힘들었을 때, 젊은 사라장(Sarah Chang)의 지고이네르바이젠 공연 녹화본을 보곤 했습니다. 그러면 다시 영혼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떠돌아다니는 이방인 집시, 그 우울함과 격정적인 정열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디에서나 존재하는 희망을 느낄 수 있게 해 준 것 같습니다.


음악과 예술은 듣는 이로 하여금 영혼을 고양시킵니다. 저는 연말에 종종 부천시향에서 연주하는 베토벤의 합창을 듣습니다. 오늘은 사라장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으며,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에 음악을 채워야겠습니다.


어머님들 다들 멋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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