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의 주식은 소주가 아니었다.

82세의 영철 할아버지는 처음 오실 때 모습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비틀거리면서 어지럽다고 오셨는데, 병원에 다니고 다니다 이상 없으니 이제 그만 오라는 소리를 듣고 내원하셨습니다. 한약을 먹어야 날 것 같다고 말이지요.



“약 한 제 좀 지어줘 봐. 병이 뭔지도 알고 싶어. 뇌 사진도 다 찍어봤는데 저짝에서는 이상 없다는 말만 반복해. 답답해죽겠네. 이봐이봐, 내가 이렇게 누우려고 딱 머리를 갖다 대면 어지러워 죽겠다니까?”



할아버지는 금방이라도 큰일이 날 것처럼 한약을 지어달라고 했습니다. 어지럼을 낫게 하려고 오죽 이곳저곳을 다니셔서 그러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진찰해 보니 한약보다 더 근본적인 치료가 우선이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어지럼증 중 하나는 미주신경이라는 자율신경에서 비롯됩니다. 이 자율신경은 장내 미생물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미생물은 우리가 먹는 음식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어지럼 - 미주신경 - 장내미생물 - 음식



쉽게 말해 아무리 검사해도 나오지 않는 어지럼은 먹는 음식이 원인일 수 있습니다. 특히 술이나 가공식품이 문제가 많이 됩니다. 문제는 원인을 제거한다고 증상이 곧바로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점입니다. 왜냐면 파괴된 미생물들이 원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술이나 가공식품에 함유된 정제된 당류에 의해서 위장의 미생물들이 파괴됩니다. 이런 나쁜 당을 쉽게 말해 짧은 사슬 당이라고 합니다. 나쁜 당은 유익한 미생물들에게 해롭습니다. 해로운 물질을 자꾸 섭취하다 보면 옹기종기 모여서 집을 짓고 살던 이로운 미생물들의 집이 파괴됩니다. 세균총이 망가지게 되는 것인데, 그 미생물들이 다시 자라나서 집을 지을 때까지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따라서 한의학에서 전해 내려오는 섭생을 오랜 기간 하는 것이 중요한 치료가 됩니다.





“그래 소주를 내가 많이는 안 먹어도 자주 먹기는 했지.”




몇 번 대화를 나누다 보니 할아버지께서 드디어 실토하기 시작합니다. 보통 이렇게 이야기하실 때 "자주 안 먹는구나" 하고 끝내면 안 됩니다. 진료를 하다가 터득한 음주에 관한 진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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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분의 말: "술 안 먹은 지 한참 됐어."

진실: 저번주 토요일날 먹고 안 먹었으니까 한참 됐지. 아, 오늘이 월요일이야?



환자분의 말: "내가 종종 먹기는 하는데 많이는 안 먹어."

진실: 일주일에 3~4번 정도밖에 안 먹고 한 번 먹을 때 2병도 안 마신다니까. 완전 금주 중이라 할 수 있지.



환자분의 말: "조금 자주 먹기는 했는데, 진~~~짜~~ 얼마 안 먹거든?"

진실: 하루 최소 1회는 먹고 먹을 때마다 소주 반 병밖에 안 먹어.






알고 보니 영철 할아버지의 음주량은 하루에 한 번, 그리고 반 병(이라고 하기는 그렇고 반 병이 최소량)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단 술은 매일 드십니다. 반 병 이상 드시는데, 어떨 땐 하루 2~4번 먹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반 병인지는 아직도 의아하지만, 그렇다고 합니다. 그리곤 주당 환자들에게 매일 들었던 이야기를 꼭 덧붙입니다.



“그건 먹는 것도 아니야. 많이 줄였어. 요샌 먹지도 않아.


세상에 그것도 안 먹고 어떻게 살어?”




어쨌든 이 치료는 술을 당분간 안 드시게 만드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물론 금단증상이 심한 분들은 입원해서 끊는 것이 좋지만, 영철 할아버지는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대신에 침과 뜸치료를 매일 받으러 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술 드시는 것은 자제하셔야 해요. 그리고 뜸은 매일 뜨러 오셔야 돼요. 아시겠죠? 그때 제가 미주신경과 관련된 침도 놓을 거예요.”

“매일? 그래! 하하핫!! 낫기만 한다면야!”



설득에 성공했습니다.






영철 할아버님은 그때 난생처음으로 1개월 이상 술을 끊으셨다고 합니다. 주변에서도 거의 난리가 났고, 자제분들부터 시작해서 사위도 그 좋아하는 술을 안 드셔서 분명히 병이 난 것이 분명하다고 방방 뛰었습니다. 그런데 병에 걸리기는커녕, 오히려 어지럼증이 완전히 좋아지셨습니다.




이제 할아버지는 절대로 술을 매일 먹지 않게 되었습니다. 해봐야 1주일에 1번 정도 드시는데, 컨디션도 많이 좋아지셨습니다. 2개월이 조금 안 되는 시점에서 이렇게 변했기 때문에 할아버지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렇게 치료가 종료되고 풍족한 가을과 마음 따뜻한 겨울이 지나갔습니다. 그리고 다시 매화꽃 피는 봄이 찾아왔습니다.








“나 다시 어지러워”



누구신가 하고 보니 영철 할아버지였습니다. 내원하지 않게 된 지 10개월 정도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한의원에 오셔서는 말도 없이 혈압을 재고 계셨는데 요즘엔 술도 안 먹는데 몸이 안 좋다고 하십니다. 이제 가려는 거 아니냐고 울상이십니다. 저도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술을 안 먹으면 빠져야 하는 배가 어쩐 일인지 더 커진 거 같았고, 피부도 여기저기 가렵다고 벅벅 긁고 계셨으니 말입니다.



보통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몸이 불편하면 “왜 그런 거야?”라고 물어보십니다. 할아버지는 이번에도 1~2주간 이비인후과부터 시작해서 온갖 병원을 또 다녀오신 모양입니다. 별다른 이상 없다는 소견과 함께 말이지요. (할아버지 처음부터 여기도 같이 오시지...)



“어 어지러워. 미치겠네... 나 요즘 술도 안 먹는단 말이야.”



저도 무슨 일인지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혈압계 앞에 누가 떡볶이랑 순대를 푸짐하게 튀김까지 사서 갖다 논 것이 보였습니다. 아마 김 선생님이 또 분식을 사 온 것 같습니다. 허허 이거,, 환자들 혈압 재는 데 걸리적거리게 말이지요. 저는 슬쩍 눈치를 주며 말했습니다.


"선생님 이거 혹시 김선생님꺼에요?"



김 선생님이 슬쩍 어디를 보면서 눈치를 주는 것 같았는데...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하려 할아버지를 보니 아차! 할아버지는 이미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떡볶이를 슬쩍 품 안에 들고 있었습니다.



“아... 원장님 사실은 내가 분식을 엄청 좋아해. 맨날 먹어 그거.”

“네?”

“맨날 먹는다고. 근데 뭔 얘기 하다 그 이야기가 나왔지?”



.



이번에도 원인이 밝혀졌네요 ㅎㅎ 그 뒤로 할아버님은 허리가 아파서 내원하셔도 어지럽다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아직까지는 말이죠. ^^









어르신들의 영양

70년대 먹을 게 없을 때 그때 어르신들은 더 어려웠다고 합니다. 국가도 돈이 없어서 어르신들을 위한 예산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역 주민들끼리 돈을 걷어서 만들었던 것이 지금의 곳곳에 있는 경로당의 시작입니다. 소사동에 가장 오래된 경로당인 소심경로당 기념회에서 들었던 이야기입니다.


70~80세가 되면 어르신들은 다시 어릴 때 식습관으로 돌아가는 것 같습니다. 잘 차려진 밥보다는 라면이나 분식을 많이 드시고, 시간 맞춰 잘 챙겨 드시기보다는 대충 끼니를 때웁니다. 그게 맛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나이 들면 우울증이 심해지고, 밥맛도 없어지고, 나가기도 싫기 때문입니다.


경로당에서는 지금도 이런 어르신들에게 연락을 돌려서 서로서로 밥을 차려주고, 영양을 보충해 주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참 따뜻한 곳이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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