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mor Liber_책을 사랑하는 시간, 공간, 인간
필사(筆寫)와 비슷한 용어로 초서(抄書)가 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거의 같다. 초서는 ‘책의 내용 가운데 중요하거나 필요한 부분을 발췌해 기록하거나 그렇게 쓴 책’을 가리키고, 필사는 책이나 글의 전부 혹은 일부분을 옮겨 적는 걸 말한다.
조선시대의 실학자이자 문장가 이덕무(李德懋)는 후학을 위해 지은 <사소절(士小節)>에서 필사를 권하면서 “손이 움직이는 대로 반드시 마음이 따라오므로 스무 번을 읽고 외운다 해도 공들여 한 번 써보는 것만 못하다”고 말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도 제자들에게 초서를 공부의 기본으로 누누이 강조했다. 다산의 많은 제자 가운데서 시인으로 일가를 이룬 황상(黃裳)은 젊을 때는 물론이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초서를 멈추지 않았다. 평생 초서한 글이 쌓이고 쌓여 그의 키를 넘었다.
예를 들면 황상은 예순일곱 살에 <장자(莊子)>를 필사했다. 또 수십 년 동안 사숙한 중국 송나라 시인 육유(陸游)의 1천 수가 넘는 시를 작은 글씨로 한 편 한 편 베껴 쓰기도 했다. 다 옮겨 적고는 그 소감을 시 ‘육유 시의 초서를 마치고 감회를 읊다’로 남기기도 했다. 76세 때인 1863년 2월에는 한 달 동안 다산의 시를 집중적으로 필사했다. 그는 평생 그렇게 옮겨 쓴 글을 <치원총서((巵園叢書)>로 묶었다.
앞서 여러 번 소개한 오에 겐자부로도 절묘한 인연으로 만나 사숙한 몇몇 스승, 이를테면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와 단테의 작품을 필사했다. 그는 필사하며 스승에게 감정이입하고 소설가에게 필수적인 문장력을 훈련했다.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필사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서점에 가보면 다양한 형태로 필사를 할 수 있는 책들이 따로 모아도 될 만큼 많다. 주변에서 공들여 필사하는 이들을 쉬이 찾아볼 수 있으며, SNS에서도 자신이 필사한 글을 올린 걸 종종 볼 수 있다. 출판사는 왜 따로 필사 관련 서적을 펴내고, 많은 이들이 필사에 시간을 들일까? 사람들이 필사를 하는 이유는 자료를 수집하거나 그저 베끼기 위해서가 아니다. 좋은 글을 숙독하고 손수 옮겨 적으며 글과 마음을 서로 비추어 보는 활동이 곧 필사다.
필사는 마음을 담은 손으로 글을 옮겨 적으며 자신을 다듬는 일이다. 필사를 꾸준히 해온 이들은 필사에 대해 “감정을 다스려주고, 생각을 열어주고, 감각을 깨워 준다”고 입을 모은다. 초서와 필사는 마음의 중심을 잡는 수련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책과 글을 옮겨 적어야 할까? 나를 깨우는 책, 마음을 밝히는 문장이다. 고전과 명문장이 가장 좋다. 명문장은 나를 돌아보고 반성하게 하는 문장, 새로운 관점을 열어주는 문장이다. 이런 문장들로 빛나는 책이 고전이다. 필사하기에 좋은 글로 또 하나 추천하고 싶은 것은 시(詩)다. 필사를 처음 시작하는 이들이라면 산문보다는 시가 부담이 덜하다. 좋은 시는 뛰어난 직관과 은유, 함축미를 보여 준다.
필사는 특별한 준비 없이 일상에서 매일 실천할 수 있다. 책과 노트 한 권, 연필 한 자루만 있으면 바로 시작할 수 있다. 필사할 때 권하고 싶은 방법이 있다. 매일 아침 하루를 시작하는 의식(ritual)으로 삼는 것이다. 좋은 글과 함께 오늘 아침을 열어보라. 새로운 기운이 솟을 것이다. 매일 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의례로 활용해도 좋다. 마음밭에 심으면 좋을 잠언과 함께 하루를 돌아보며 마침표를 찍어보라. 은은한 여운과 함께 잠들 수 있을 것이다. 어떤 방법을 취하든 필사는 책의 문장과 마음이 만나는 과정이다. 책에게 귀 기울이며 자기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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