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 인류멸종 편
지구 인간들이 멸종위기에 놓였고 세상은 아비규환이었다. 어느 정도 시끄러운 일들이 지나갔고 이제는 조용해졌다. 괴생물체의 출현이 있을 때만 피하면 생존자가 거의 없어서 잠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 괴생물체가 튀어나올지 모르니 늘 긴장해야 했다.
아비규환이든 잠잠하든 내 속은 타들어간다. 난 여자를 너무 좋아한다. 여자 없이는 하루도 못 사는,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다 못해 터져 버리는 그런 남자다. 그런 나인데 하필 내가 사는 지역에 출현한 괴생물체는 순식간에 인간을 다 죽여버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숨게 만들었다. 그 숨은 사람들 중에는 상당수가 여자였다고 한다. 아, 아직 다 못 만나봤는데. 이놈의 괴생물체는 어디 숨어있다가 나와가지고는 사람을 공격해 버린다. 그때 나는 도망치는 여자들의 모습을 보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여자들을 다 살리고 싶었다. 괴생물체들이 남자들만 공격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왜 여자들도 죽이냐 이 말이다! 남자들만 죽이라고. 나는 또 재수 없게 살아남았다. 이럴 거면 나도 죽이라고.
죽지 못하고 죽지도 않았기에 나는 살아갔다. 괴생물체 첫 출현때와는 내가 달라졌다. 혼자 사는 법을 알게 되었고 괴생물체 공격에 대비가 가능했다. 우선 배가 고파서 아무도 없는 편의점에서 허기를 채우고 언제 공격 올지 모를 때를 대비하여 무기를 챙겼다. 아포칼립스에 관련된 영화와 소설책을 많이 봤기에 무엇을 대비해야 할지 습관적으로 알고 있었다. 당연히 현실적은 체감은 상당히 달랐지만 그래도 갖출 건 다 갖추었기 때문에 종종 밖으로 나갈 수 있었다.
황폐하다. 날아다니는 종이쪼가리들이 보이고 잘린 사람들의 팔다리나 목, 흉부, 엉덩이 같은 인체 부위들이 널브러져 있다. 이전에 봤던 영화보다 더 참혹했다. 잘려나간 여자의 머리도 보인다. 아, 저 여자가 살아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괴생물체 출현 전에 나는 매일 여자를 만났다. 나는 여자의 모든 것이 다 좋았다. 그녀들의 고운 머릿결부터 시작해서 잘 다듬어진 눈썹, 살짝 올린 속눈썹, 초롱한 눈동자, 오뚝 솟아오른 콧대, 도톰한 입술. 여자 얼굴에 붙어있는 모든 걸 다 좋아했다. 또 그녀들의 얼굴 아래로 내려가보면 목선과 그 울림에서 나오는 목소리, 옷 속으로 가려진 그녀의 몸까지 모든 것이 다 사랑스러웠다. 매일 여자를 만나려고 노력했으니 적어도 일주일에 7명은 만난 셈이었다. 하루에 한 명만 만나는 게 아니었으니. 그렇다. 나는 카사노바였다. 바람둥이나 난봉꾼이라는 말은 사양한다. 난 모든 여자에 다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축복받은 부모덕에 일을 안 해도 되는 시대에 태어났고 할 일이라고는 여자 만나는 게 일일 수밖에 없던 그런 바람둥이라 불렸던 남자이다. 나는 평생 쓰고도 남을 돈이 있었기에 하루 종일 내가 만난 여자를 사랑해 주는 일이 나의 직업이라고 당당하게 말... 은 하지 않고 생각만 했다. 이런 나의 삶은 정말 축복받았다고 생각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지금 내 눈앞에 괴상하게 생긴 괴생물체가 서있다. 여자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나의 즐거움을 앗아간, 지금 내 눈앞에 서 있는 저 증오스러운 괴생물체를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여자를 못 본 지 꽤나 된 지금, 내 모든 호르몬은 지금 저 괴생물체를 죽이기 위해 사용되고 있었다. 괴생물체가 내 무기에 맞고 죽는다. 여자 만나는 능력 말고 또 다른 능력이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이야. 괴생물체 출현 이전에는 '카사노바'였고 이후에는 '괴생물체 헌터'가 되어 새 삶을 살고 있었다. 괴생물체의 몸에서 흐르는 이상한 액체를 보며 나는 이전에 뜨겁게 사랑했던 한 여자가 떠올랐다.
20 후반대 때 뜨겁게 사랑한 '이슬'이라 불렀던 여자가 있었다. 가장 불타오를 나이에 가장 뜨겁게 사랑한 여자였다. 나는 여자를 만나면서 늘 언젠가는 헤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를 진심으로 만나는 여자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여자들은 나를 가볍게 만났기에 그럴지도 몰랐다. 아마도 내가 카사노바가 된 이유는 ‘이슬’이 때문일 것이다. 이슬이는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우리는 마치 영원히 함께 있을 것처럼 만났다. 그녀의 아픔, 슬픔, 기쁨 모두를 함께 공감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난 후 법적으로도 함께이고 싶어 청혼을 했다. 이슬이는 머뭇거렸다. 그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불안함을 느꼈다. 이슬이는 말했다.
“오빠, 결혼은 가족이 되는 거야. 이 말의 의미를 알아? 가족이 되는 거라고. 더 이상 우리 둘만의 생활이 아니고 여러 사람의 생활이 되는 거야.”
사귀면서 단 한 번도 이슬이가 가족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몰랐다. 그녀에게 가족과 관련해서 아픈 과거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아픔은 나와 함께 지내면서 해소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 말은 그녀가 나에게 해준 말이었다.
"오빠랑 있으면서 내 고통과 아픔이 다 해소됐어. 다 치유된 것 같아."
난 그녀가 했던 말과 행동을 다 기억한다. 분명히 나 때문에 치유되었다는 말을 했다. 그 후에 우리가 나눈 뜨거운 사랑까지도 다 느껴졌고 기억한다. 그런 그녀가 내가 청혼이라는 말을 꺼내자 거절식으로 말하는 것이었다. 그다음에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녀를 더 이상 만지지도, 사랑할 수도 없이 나는 다른 수많은 여자들을 만났다는 기억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체취, 웃는 얼굴, 우는 얼굴, 그 목청에서 나오는 소리, 그리고 내가 느꼈던 감정이나 느낌만을 그대로 간직할 뿐이었다.
“꺄악!”
여자의 비명이다! 괴생물체를 피해 도망간 지 세월이 꽤나 흐른 후 처음으로 들은 여자 소리였다. 그게 설령 비명이라 할지라도 나의 호르몬을 뛰게 만들었다. 나는 무기를 꽉 집고 비명이 난 장소로 뛰어갔다. 괴생물체가 한 여자를 덮치려고 했다.
“야, 인마!!”
나도 모르게 소리 지르며 괴생물체를 인정사정없이 패주었다. 괴생물체가 밉기도 했지만 오랜만에 본 이성 때문에 이성을 잃어버린 순간이기도 했다. 얼마나 패주었는지 괴생물체의 형체가 다 바스러질 정도였다.
“감사합니다.”
이 여자의 목소리.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여자의 목소리를 오랜만에 들어서가 아니었다.
30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내 귓가에서 울리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여자를 심히 좋아했지만 40세가 되자 뭔가에 끌리듯 한 동갑 여자와 결혼을 했다. 20대부터 시작된 여자 만나기는 그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여자를 만날 수가 없었다. 유혹은 많았지만 아이들까지 태어나고는 더 이상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내 아내는 좋은 여자였고 결혼하기에 나와 가장 잘 맞는 여자였다.
뜨거운 사랑은 뜨거운 사랑으로만 남기는 법. 내가 만난 모든 여자를 인터넷을 통해서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세상이었지만 나는 굳이 찾지 않았다. 이 미친 알고리즘은 가끔 내가 만난 전 여자 친구들을 소환해 냈다. 그들 중 많은 여자들이 남편과 자식들을 데리고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이슬이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그러니 굳이 50세가 된 그 당시에 내가 굳이 만날 이유가 없었다. 만나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이슬이는 나보다 많이 어렸기에 50 중반의 나이대가 된 나에 비해 그녀는 아직 40대 중후반의 나이였다. 요즘 40대의 얼굴은 이전 20대의 얼굴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아니, 그녀가 잘 관리한 건가? 이런 세상에서? 30년이다. 30년 만에 그녀의 실물을 처음 마주하고 있었다.
“오빠?”
이슬이가 그렇게나 자주 불렀던, 그 이후에는 다른 여성들에 의해 불렸던 그 단어. 오빠라는 말에 내 심장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뛰기 시작했다. 이슬이는 내 첫사랑은 아니었지만 나의 가장 뜨거운 사랑이었다.
나는 여자를 만나면 호르몬이 미친 듯이 뛰면서 바로 내 남성상의 상징을 당당히 꺼낼 줄 알았다. 어찌 보면 또 다른 괴생물체로 변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었다. 혼자 살면 별의별 생각을 다하게 된다.
하지만 이슬을 마주한 나의 모습은 마치 속세를 떠난 스님과도 같이 이성에 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있었다. 심장은 뛰지만 호르몬이 날뛰지는 않았다.
나는 이슬이를 뒤로하고 도망친 듯 뛰어갔다. 그리고 또 다른 지역으로 도망쳤다. 또 다른 여성의 비명소리다. 나는 뛰어가 괴생물체로부터 그 여성을 구해냈다. 이슬이는 아닐 테니 무조건 나는 이 여성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었다.
“오빠?”
아니... 이게 뭐야?
나는 이전에 몇 번 술집에 가서 여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나는 어디를 가든지 나와 인연을 맺은 여자는 다 기억하는 능력이 있었다. 지금 내 눈앞에는 술집에서 인연이 있던 한 여자가 엎드려져 있다. 그녀는 울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이 여자는 나를 못 알아보았다. 자신을 거친 수많은 남자 중에 하나였을 테니까. 저 끝에서 또 다른 여성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달려갔다. 괴생물체에게 당하기 직전 그 여자가 누구인지 확인해 봤다.
이럴 수가... 저 여자 역시 내가 만나 본 여성이었다.
그랬다. 나와 인연이 있던 모든 여자들이 다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아 내 눈앞에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