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대체될 수 없는 인간의 마음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지만, AI는 '데이터'를 근거로 예측한다. 하지만 인간은 '감정'을 근거로 결정을 내린다. 그런데 이건 비합리적인 습관이 아니라 진화적으로 최적화된 의사결정의 방식이다. 감정은 논리의 적이 아니다. 오히려 감정은, 논리보다 빠른 판단의 언어가 되어 준다. 심리학자 안토니오 다마지오(Antonio Damasio)는, 『데카르트의 오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감정이 없는 이성은 방향을 잃는다.” 그의 연구에 따르면,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은 논리적으로 사고할 수는 있어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된다. 이는, 감정은 선택의 나침반이자 ‘무엇이 나에게 중요한가?’를 알려주는 생물학적 표시(language of importance)라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의 뇌에서 감정은, 단순히 ‘느끼는 일’이 아니라, ‘의미를 해석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앞서 잠깐 언급했듯이, 편도체는 위험을 감지하지만 전전두피질은 그 감정의 의미를 분석한다. 그리고 이 둘이 소통할 때, 우리는 비로소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된다. 두려워서 피해야 할지, 아니면 두렵지만 해야 하는 일인지를 결정한다. 하지만, AI에게는 이런 감정의 '신호 체계’가 없다. AI는 데이터의 확률로 옳고 그름을 계산하지만, 인간은 감정의 진폭으로 옳고 그름을 느끼고 판단한다. 그래서 인간의 판단에는 늘 ‘온도’가 있다. 그리고 그 온도는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감정은 불편할 때조차 우리를 지켜주는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한다. 불안은 주의를 요구하는 신호이고, 죄책감은 관계의 균형이 깨졌다는 알림이며, 분노는 경계가 침해되었음을, 그리고 슬픔은 회복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복잡한 감정의 언어 덕분에 자기 자신을 조율하며 살아간다. 그렇기 때문에, AI가 아무리 정교해져도, ‘옳음’과 ‘좋음’을 구분해 내는 감정적 직관은 모방할 수가 없다.
요즘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는 AI 기술은 탁월한 번역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능력은 나날이 더 발전하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정서까지는 번역하지 못한다. 언어의 표면은 문법으로 옮길 수 있을지 몰라도, 정서의 결은 세상의 맥락과 경험으로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어의 “괜찮아요.”를 떠올려 보자. 그 말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정서를 품고 있는데, 우리는 '진짜로 괜찮을 때'도 그리고 '전혀 괜찮지 않을 때'도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모순적인 말 안에는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는' 암묵적 합의가 숨어 있다. AI는 그 언어의 문법은 학습할 수는 있지만, 그 침묵의 의미까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인간의 정서의 구조는 계층적이다. 불안과 두려움이 공존할 수도 있고, 기쁨과 슬픔이 공존할 수 있듯 우리가 한순간에 느끼는 감정 안에도 언제나 다른 감정들이 겹쳐 있다. 이러한 복합적인 구조는, 단일한 ‘인풋-아웃풋(input-output) 체계’로는 해석할 수가 없다. 신경과학적으로도 우리의 감정은 하나의 회로가 아니라, ‘다중 네트워크’로 구성된다고 본다. 편도체는 공포를, 섬엽(insula)은 혐오를, 대상회(cingulate cortex)는 슬픔과 공감의 통증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 회로들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얽혀서 새로운 감정적 맥락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정서는 AI가 하는 ‘계산’이 아니라, ‘조화’의 결과로만 설명될 수 있다.
심리학자 리사 펠드먼 배럿(Lisa Feldman Barrett)은, 감정을 ‘뇌가 맥락 속에서 즉흥적으로 구성하는 개념적 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즉, 감정은 뇌에 저장된 데이터가 아니라, ‘지금-여기(now-here)’에서 재해석되는 경험의 조합이라는 의미다. 그렇기에 우리의 감정은 언제나 유일무이하다. 또한, AI가 인간의 정서를 완벽히 번역하지 못하는 이유는, 감정이 서사와 기억들과 함께 얽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똑같은 ‘눈물’이라도, 어떤 사람은 상실을 떠올리고, 또 어떤 사람은 구원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렇게 보면, 결국 감정은 단어가 아니라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AI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간의 언어를 학습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여전히 자신만의 정서를 해석하며 1분 1초를 살아가고 있다. 거기에서 오는 해석의 차이, 그 간극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한 명의 인간’ 임을 자각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