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화의 기술을 연마하는 문지기들
어느 미팅에서 마주한 대리인의 '우아하게 거만한' 태도는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위임받은 권한을 마치 자신의 본질적인 권력인 양 휘두르고 있었다. 상급자의 권위 뒤에 숨어 실무를 타인에게 떠넘기는 그 능숙한 솜씨를 보며, 나는 한 조직의 역량이 어떻게 좀 먹히는지, 그리고 한 개인이 어떻게 서서히 '퇴화'의 길로 접어드는지 목격했다.
심리학자 칼 융(Carl Jung)은 사회적 역할인 '페르소나'와 '자아'를 구분했다.
문제는 페르소나가 자아를 집어삼킬 때 발생한다. 권력자의 곁에서 권한을 대행하는 이들은 종종 권력자의 광휘를 자신의 빛으로 착각하는 '심리적 동일시'에 빠지곤 한다.
뇌과학적으로 보면, 이러한 권력 감각은 전두엽의 공감 능력을 마비시키고 도파민 보상 회로를 왜곡한다. 스스로 부가가치를 생산하기보다 타인 위에 군림하고 업무를 통제하는 과정에서 더 큰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지시'만 하는 행위는 뇌에 "나는 누구보다 중요한 인물이다"라는 가짜 신호를 끊임없이 보낸다.
하지만 이 달콤한 마취제에 취해 있는 동안,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해야 할 고등 지능은 근육을 잃고 퇴화한다. 가짜 보상에 중독된 뇌는 결국 '실행력 없는 권위'라는 껍데기만 남기게 된다.
경영학의 '대리인 이론(Agency Theory)'에 따르면, 대리인은 주인의 이익이 아닌 자신의 편익을 극대화하려는 속성을 갖는다. 조직의 흐름을 돕는 윤활유여야 할 실무자가 스스로를 '검문소'로 정의하는 순간, 조직에는 막대한 '대리인 비용'이 발생한다.
이들은 정보의 비대칭성을 이용해 문턱을 높이고, 자신의 편의를 위해 타인의 노동을 착취한다.
이는 경제학적으로 '지대 추구(Rent-seeking)' 행위와 일맥상통한다. 스스로 가치를 만들기보다, 주어진 위치를 이용해 타인의 기여분을 가로채는 방식이다. 이러한 '나쁜 문지기'들은 조직 내 심리적 안전감을 파괴하고 신뢰 자본을 갉아먹는다.
실무자들이 "저 문턱만 넘으면 또 다른 일이 전가될 것"이라며 방어적으로 변하는 순간, 조직의 효율성은 마비된다. 그가 연마한 생존술은 사실 조직의 경쟁력을 안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암세포와도 같다.
AI 시대의 선고, 기능의 대체와 책임의 귀환
그렇다면 이제 질문은 냉혹한 미래로 향한다.
과연 이러한 '생존의 기술'이 AI 시대에도 통할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AI는 권위의 무게에 압도당하지 않으며 감정적 노동 전가에 휘둘리지도 않는다. 일정 조율, 정보 전달, 권한 대행과 같은 '기능적 업무'는 조만간 AI 에이전트가 완벽하게 수행할 것이다. 그때가 오면 "내가 누구를 모시는지 아느냐"라며 거드름을 피우던 이들에게 무엇이 남을까?
AI 시대에 인간에게 요구되는 핵심 역량은 '진정성 있는 연결'과 '복잡한 맥락에서의 책임 있는 결정'이다. 권위 뒤에 숨어 책임을 회피하고 타인을 하대해 온 이들은, 역설적으로 인간만의 고유한 근육인 '책임감'과 '수평적 협업 능력'을 스스로 퇴화시켜 버렸다.
그들이 휘두르던 '빌린 칼날'이 AI라는 정교한 시스템 앞에 무뎌진 순간, 그들 곁에는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협업의 언어를 잊고 군림의 기술만 익힌 이들에게 미래는 차가운 소외의 공간이 될 가능성이 크다.
조직에서 이런 인물들을 마주할 때, 이제 나는 분노 대신 서글픈 연민을 느낀다.
그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을 소멸시킬 '퇴화의 기술'을 가장 열심히 연마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실력자는 권한이라는 도구로 부드러운 흐름을 만들고, 가짜는 권한이라는 방패로 자신만의 성벽을 쌓는다.
우리의 조직 안에는 지금 어떤 성벽들이 쌓이고 있는가?
잘못 쌓인 성벽을 '원래 다 그렇지'라는 말로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우리는 그 성벽 너머에서 AI가 대체할 수 없는 우리만의 근육을 어떻게 키우고 있는가?
내가 목격한 그 거만함은 역설적으로 '어떻게 살지 말아야 하는가'에 대한 가장 선명한 반면교사가 되었다.
시스템의 부품으로 전락하지 않고, 진정한 인간의 가치를 갈고닦는 것. 그것만이 다가올 시대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생존 전략이다.
Jane 제인
MindMark Lab은 행동신경과학과 심리학을 기반으로 인간의 잠재된 욕구와 행동 원리를 분석하여, 개인과 조직의 성장을 위한 최적의 성공 메커니즘을 설계하는 휴먼 솔루션 연구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