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임을 자율로 오해하는 조직이 잃고 있는 것들
"경력직이시니까 업무는 혼자 먼저 부딪혀 보세요.
하시다가 모르는 게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시고요."
조직에 새롭게 합류한 경력직 직원들이 심심치 않게 듣는 말 중 하나다.
이는 겉보기에는 직원의 역량을 신뢰하고 자율성을 부여하는 멋진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래서 실제로 많은 리더가 이런 방식을 선호하며, 이것이 실력 있는 인재를 가장 빠르게 조직에 적응시키는 이른바 '야생성 있는' 온보딩(Onboarding)이라 믿는다.
하지만, 그게 정말 효과적일까?
물론 리더들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스타트업이든 규모가 큰 기관이든, 현대의 조직은 늘 바쁘고 리소스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규 입사자를 위해 A부터 Z까지 매뉴얼을 쥐여주고 하나하나 가르쳐 줄 여유가 없다.
더욱이 '기업 경력'을 높이 사서 채용한 인재라면,
백지상태의 신입사원과는 '첫날부터 달라야 한다'라는 기대감이 작용한다.
그 때문에 리더의 머릿속에는 "이 정도 연차라면 말해 주지 않아도 스스로 맥락을 파악하고,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며, 시스템의 빈틈을 알아서 메워가며 일할 수 있겠지!"라는 합리적인(혹은 합리화된) 기대가 깔린다.
그러나 조직 및 심리 전문가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지점에는 매우 치명적인 인지적 오류가 숨어 있다.
바로 '자율성(Autonomy)'과 '방임(Abandonment)'의 혼동이다.
경력직이 가진 역량은 이전 직장에서 쌓아온 전문 지식과 문제 해결 능력이다.
하지만 그 역량이 새로운 조직에서도 곧바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구조적 토대와 지원'이 필요하다.
아무리 운전을 잘하는 베테랑 레이서라 할지라도,
난생처음 보는 차의 시동 거는 법도 알려주지 않은 채
"일단 트랙을 돌며 부딪혀 보시죠?"라고 등을 떠민다면,
그는 레이싱 스킬이 아니라 와이퍼 작동법을 찾는 데 에너지를 쏟게 될 것이 자명하다.
기본적인 사내 시스템 세팅,
업무 권한 신청 프로세스,
조직 내 보이지 않는 의사결정의 룰 같은 것들은
'부딪히며 깨달아야 할' 업무적 도전 과제가 아니다.
그것은 조직이 새로운 멤버에게 먼저 준비해 쥐여주어야 할 기본적인 지도와 나침반에 가깝다.
그렇기 때문에, 지도도 없는 상태에서 낯선 땅에 던져진 사람에게 "모르면 물어봐라"라는 친절한 또는 친절을 가장한 그 말은, 사실 신규 입사자에게 엄청난 '인지 부하(Cognitive Load)'를 일으킬 뿐이다.
어디까지가 내가 알아서 해야 할 영역인지,
누구에게 물어보는 것이 실례가 아닌지,
이 시스템을 세팅하는 데 내 시간을 써도 되는 것인지,
끊임없이 눈치를 보고 상황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쁜 조직에 빠르게 적응하고 문제 해결에 쓰여야 할 귀한 인지적 자원이, 조직의 불친절한 시스템을 해독하는 데 낭비되고 마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데 더 뼈아픈 사실은,
이러한 '방임형 온보딩'이 조직이 그토록 바랐던 신규 입사자의 퍼포먼스를 오히려 지연시킨다는 점에 있다.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입사 초기 조직에 대해 가져야 할 '심리적 안전감'과 '신뢰'가 빠르게 마모된다.
그리고 직원은 "이 조직은 일할 환경을 갖춰주지 않고 결과만 요구하는구나"라고 느끼게 되며, 이는 곧 소극적인 태도나 조기 퇴사로 이어지는 씨앗이 된다.
이쯤에서 조직은 묻고 싶을 것이다.
"그럼 경력직에게도 신입처럼 하나하나 떠먹여 줘야 합니까?"
물론 아니다.
성숙한 조직의 온보딩은 떠먹여 주는 것이 아니라, '능력을 펼치고 뛰어놀 수 있는 안전한 그라운드'를 정비해 주는 것이다.
그러니 "일단 알아서 부딪혀 보라"는 말은,
노트북 세팅이나 권한 신청 같은 소모적인 행정 절차에 쓸 말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사업 전략을 기획하거나,
난제에 봉착했을 때,
구성원의 과감한 시도를 독려할 때 써야 할 빛나는 언어로써 쓰여야 한다.
사람을 뽑아 놓고서, 업무의 룰과 시스템이라는 최소한의 세팅된 장비조차 지급하지 않은 채 전장으로 내모는 것을 우리는 '자율'이라 부르지 않는다.
진정한 리더십은,
구성원이 '불필요한 장애물'에 부딪히지 않고,
'진짜 중요한 업무'에 온전히 부딪힐 수 있도록 길을 닦아주는 데서 시작된다.